구관조 씻기기 - 제3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89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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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멸

새가 서서히 체온을 떨어뜨린다 자리에 앉아서 너는 일어날 준비를 한다 그전에 새가 전신주 위에서 휘청거리던 것을 너는 보았다 그전에 너는 그가 여기에 없음을 알았다 그전에 너는 잔이 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전에 실내를 휘젓는 점원이 있었다 그전에 너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전에 같은 음악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전에 커피가 식어 있었다 그전에 너에게는 하지 못한 무수한 말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디에 있지? 그전에 새가 날아오르려다 말았다 그전에 너는 이곳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전에 너는 흐릿한 꿈들이 자꾸 재생되는 것 같아 성가셨다 그전에 새가 이미 이곳에 와 있었다 그전에 새가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그전에 그것이 반복되었지만 너는 그것을 몰랐다 그전에 너는 너의 앞에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전에 너를 부르는 소리가 귀에 닿았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저기요 새가 이미 떨어져 있다 그전에 너는 일어나려고 했다 네가 앉아 있던 자리에 누가 이미 앉아 있었으므로

 

 

 시 말미에서 평론가가 신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현대 시인들이 언제 이런 신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라고 슬슬 열변을 토하기 시작한다. 그 즈음에서 나는 잠시 조용히 책을 덮기 시작한다. 요즘 책을 읽다가 이유없이 진도를 나가기가 너무 힘든 경우가 많아진다. 베스트셀러를 함부로 선정해대서다. 티비나 라디오에 목소리로 나오던 핫 미디어가 책 같은 콜드 미디어로 여과없이 섞여 들어가서이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 눈과 머리가 송두리째 타들어가는 느낌에 사로잡히고 만다. 말해두는데, 나는 황인찬 시인이 글을 잘 못쓴다고 탓하는 게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질투 쯤에 속하려나. 황인찬 시인은 무려, 나와 나이도 같은 쌍팔년도 생이다. 이 분의 급속한 인기상승을 보면 엄친아가 떠오른다. 엄마친구아들은 내 존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는 그가 쓴 글과 인터뷰를 읽고 있고, 이런 분이 내 나이에 데뷔하는데 나는 대체 이 나이가 되도록 뭘 하고 살았던가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게 엄마친구아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히 말하고 싶다. 클램프 시리즈, 에반게리온, 그리고 죠죠에서 유래된 유행어가 뒤죽박죽 뒤엉켜있는 이 황인찬의 시집을 다 읽고 나서도 자신의 아이에게 돌아서서 양서를 읽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을 거라는 사실을. (그 다음 시집이 우리나라 19금 웹툰의 제목을 본땄다고 하니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에 들어있는 애니미즘, 사랑하는 사람이 2D이기에 강제로 거리를 유지하고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 종교를 가지고 그대로 시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두라는 시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의 관점을 확실히 가지고 말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기보다 왜 그녀가 화를 내는지에 대해 먼저 생각하는 건 사회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자신을 위에 앉히면서도 높고 고결한 존재를 생각하는 오타쿠들의 지극한 모순이 들어있는 시라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이 유명한 시집은 여전히 서대경이라는, 나이가 비슷한 젊은 시인을 이기지 못했다. 유머감각도 있고 적당히 얼굴도 잘생겼으니 좋은 경험을 많이 하겠지. 무엇보다도 나는 그가 옛 애인과 사랑에 대해서 좀 더 성찰했으면 좋겠다. 경험에서 미숙한 점은 어쩔 수 없겠지.

 

 

 

번식 중에서

"당신 생각을 오래 했어요 오래전에 나는 아팠어요"
나는 웃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에서 에반게리온 레이를 연상시키는군요.

 

  

축성 중에서

교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간 사람은 교수의 아내였다 과거형으로 사람을 말하는 것은 그가 죽었다는 뜻인가? 교수는 혼자서 생각한다 시간은 얼마 흐르지 않았다 교수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하고, 그 말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죠죠 2기에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라고 한 구절이 연상되었는데 한때 절찬리 유행어가 된 적도 있어서 죠죠를 보고 만든 건지는 확실치 않음.

 

 

 

  

X

체리를 씹자 과육이 쏟아져 나온다 먹어 본 적 있는 맛이다 이걸 빛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그건 먹어 본 적 없는 맛이다

나는 벚나무 아래에서 체리 씨를 뱉는다 죽은 애들을 생각하며 뱉는다

동양의 벚나무 서양의 벚나무는 종이 다르다 벚나무에서 열리는 것은 체리라고 부른다 벚나무는 다 붉다 벚나무는 다 죽은 애들이다

나는 벚나무 아래에서 체리 씨를 뱉는다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고 그래서 더욱 붉고 그건 전해지는 이야기로

체리를 씹자 흰 빛이 들썩거린다 체리 씨를 뱉으면 죽은 애들이 거기 있다

벚나무가 솟아오른다 체리 씨가 자라면 벚나무가 된다

나는 거기서 체리 한 알 집어삼킨다 체리를 씹으면 체리 맛이 난다

 누가 쌍팔년도 오타쿠 아니랄까봐 클램프 세계를 훌륭하게 요약했군요.
 그나저나 체리를 먹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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