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길 한국의 서정시 22
김지하 지음 / 시학(시와시학)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영원한 푸른 하늘


한님을 보았다

중앙아시아의 저 숱한 초원과 산악
바이칼의 호수에서까지도
한님의 이름은
하나같이, 하나같이
'한'
ㅡ영원한 푸른 하늘ㅡ

옛 시베리아 허공에 홀로 외치던
그 외로운 신의 이름
'후에문에 탱그리'

아,
한님.
ㅡ푸르른 새푸르른 영원한 하늘ㅡ

 

  

일단 카알 마르크스의 거리에서라는 연작시를 읽다가 그가 자본론의 잔학한 이론에 충격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보고 바로 그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일단 이 시집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줄도 나오지 않았다.)

 대략 현실에서의 이야기는 이러했는데, 처음엔 교양을 쌓기 위해 자본론을 읽다가 체포되어 열심히 변명을 하고 생고생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보기엔 그냥 두통이 나서 소주에 고춧가루섞어 마시며 자본론 보다가 졸지에 억울한 일을 당해서 그 분한 심정을 괜시리 자본론이란 '사물'에 풀은 것 같다. 자라 보고 놀란 마음이 솥뚜껑에도 놀란다고 하지 않던가. 가끔씩 그 자신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지만, 그는 겁많고 찌질한 시인일 뿐이다. '현실'을 거론하는 인간들은 대부분 그런 것 같다. 전생에 싸울아비였다고 자신있게 주장하는 어느 모습이 정상적이며, 그의 현실주의가 도대체 어떤 건지는 모르겠다. 고문을 받아서 정신이 나갔으려니 하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다만 국경에서 연작시를 보면 매우 드물게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조용히 살자고 중얼거리는 모습이나 한국에 돌아가기를 싫어하는 그의 모습이 왠지 진면모같아서 슬퍼진다.  

 시를 쓸 때도 허세가 심해지지만, 인터뷰를 할 때는 그 허세가 최고조가 되는 것 같다. 고려인들에게 그들이 굳이 관심도 없는 난초 그림을 선물하는 장면에서도 보여지듯이, 흐름을 강조한다 하면서도 은근슬쩍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읽다보면 정말 심기가 불편해지는 시집이긴 하다. 하지만 나와 동갑이라는 황인찬이라는 시인의 시를 막 읽고 있는데, 시인으로서의 레벨이 완전히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똑같이 일상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지만 김지하의 시가 훨씬 더 막힘이 없고 자연스러웠다. 그의 시가 웅장한 대자연이라면 황인찬 시인은 그저 잘 가꾼 일본식 정원의 느낌이라고 할까. 확실히 시인으로서는 도저히 손을 놓을 수 없는 인재인 것 같다. 그러니 헛소리를 마구 하는 지금까지도 그에게 문학상을 주고 잘해주는 것이리라. 새삼 '시는 아무나 쓰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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