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공동체 -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00
손미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미끄럼틀

좀, 앉을게
구둣발로 들어왔다
여기 좀 있을게
네 속에

창백한 애인이 피아노를 친다
어쩌면 이것이 절정일 수 있겠다
고개 돌리면 입 댈 수 있는 거리

우린 몰래 무릎을 열고
긴 관 속을 헤매고 다녔지
조용히 바라보았어
떠다니는 해파리들
망토를 걸치고 뛰어넘어
다른 곳으로
다른 곳으로

몸을 말아 넣으면
미끄러운 것에 눌리는 꿈을 꾼다
천천히 굴러떨어져
손잡이도 없는
네 속에

그만 좀, 앉을게
이제
나도 너의 살점인데

 

 이전에 팟캐스트 방송을 하면서 웹툰을 연재하는 여성 분을 만난 적이 있다. 자신이 10년 정도를 사귀다가 결혼상대가 아닌 것 같아서 헤어진 남자 분이 있고, 그걸 배경테마로 해서 자신이 결혼상대를 찾기 위해 맞선을 가는 등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나도 5년 사귀다 헤어진 전남친이 있고 헤어질 때 그 녀석 험담을 한 번 심하게 한 적은 있지만, 내심 그 분의 이야기가 듣기 거북했다. 솔직한 이야기를 하는 건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결혼까지 하다가 헤어진 사람인데 '결혼할 대상이 아니어서 헤어졌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상대방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 상대방이야말로 '아, 헤어져서 잘 됐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주변 사람 중에서 처음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부모에 대한 험담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불편해서 나도 곧바로 그 사람을 예의없이 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지 내가 예의없다고 지적질하더라 ㅋㅋㅋ 아무리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고는 해도 20대 초반의 나이면 벌써 몇몇은 결혼도 하지 않았나? 그런 분이 복지 쪽 일자리를 알아본다는 데서 컬쳐쇼크였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남에 대한 험담을 받아주던 비판하던 무슨 말을 해도 '자기비하'로 얼버무린다는 거다.

 솔직히 내가 듣기엔 이렇게 들린다. 내 인생은 어차피 사회가 부모가 상사가 전애인이 조종하고 있어. 나는 책도 안 읽고(내가 책 빌려줄 테니 읽어볼래?) 머리도 안 좋고(머리가 안 좋은데 용케 백수는 아니네?) 대학도 잘 못 들어가서(나 대학교 들어갈 땐 중년층이나 할아버지 할머니도 많더라?) 이렇게 살고 있어. 손뼉치며 박장대소할 일이다. 정작 힘든 일이 있는 사람들은 이 시인처럼 제대로 육하원칙으로 표현할 줄도 모른다. 집에서 그동안 해왔던 게임과 그동안 봐왔던 고어 영화들이 집에서 혼자 마시는 술기운에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시편으로 정리된다. 힘든 일이 어느 정도 줄어들 때가 되어서야, 자신의 부끄러운 일들을 숨겨가면서 에둘러 가면서 간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손미 씨가 쓰는 시의 불편함은 마치 그녀가 현재 진행형으로 불행을 겪는 것 같은 데서 온다. 글에서 생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사정을 캐물어보면 부끄럽다는 듯 씩 웃으면서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괜찮다고 얼버무린다. 하지만 그들의 글은 허언증이 아닌 듯이 들리는 것이다. 다 지나갔지만, 괜찮지만, 당신이 아파트 앞에 서 있다면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죽더라도 당신이 나를 잊지 않게 하고 싶다는 마지막 부분의 시는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걸핏하면 '다 지나가리라'를 기도문처럼 중얼거리는 녀석과는 다르게 말이다. 슬픔을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 멋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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