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 민음의 시 209
윤의섭 지음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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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중에서

마야의 달력

달력에 표시된 동그라미의 의미는 결국 떠오르지 않았다
이날은 누구의 생일도 아니고 기일도 아니고 약속일도 기념일도
아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숫자 없으면 좋을 날짜 휴일 휴가
공연일 상연일 동창일 동호회일 검진일 월급일 아니다
인쇄 실수든가 종말일이든가 둘 중 하나는 아니다
올해 달력도 아니다

비본

그런 책이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숨겨 놓은 또 다른 예언서이거나 원상결의 저자가 남긴 참서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긴 했지만 누가 썼는지 중요하진 않다 내용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우주의 탄생과 인류의 멸족에 관한 신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기록도 믿을 것은 못되었다 가을바람이 지나가자 나무들은 한시름 내려놓듯 잎을 떨구었다 문득 그 책이 펼쳐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가 되었고 정해진 일이라는 것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잔인하게도 책장이 덮일때까지 예년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단풍 구경을 하고 열매를 걷고 첫눈을 기다린다 이날 그녀는 갈비뼈처럼 잎맥이 선명한 낙엽을 끝장놀이에 꽂는다 그 페이지부터 기원전과 기원후가 갈라진다 책에는 문자가 쓰여 있었지만 아무도 읽을 수 없었다

 

  

이전에 있음으로 시집에 리뷰를 남기면서 생각하는 데 대한 첫 단계로 이미지가 중요함을 이야기했다. 물론 난 미술에도 관심이 있고 특히 추상화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그랬으면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한 번 무언가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는 타입이다. 하지만 텍스트를 매우 좋아하는, 야동보다는 동인지 만화를 좋아하고 동인지 만화보단 야설을 좋아하고 특히 스토리와 대사를 매우 눈여겨보는 나로선 이 시집이 더 좋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말이다. 연인의 죽음이나 이별을 겪은 자들에게 세상은 하나의 묵시록이며 이 세상의 온갖 색깔도 그 심상을 담을 수 없으리라. 말 그대로 흑백, 빛과 어둠 밖에 없고 모든 현란함을 거부하는 그 감정을 시인은 담아내었다. 아마도 시집 제목인 묵시록에 해당할 것이라 생각되는, 시 10편으로 엮인 맨 처음의 시리즈는 심지어 숫자만 쓰여져 있다. 하지만 강제로 연관을 지으려 한다면 나름대로의 스토리텔링이 완성된다.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시들이 연인보다는 어머니와의 이별을 암시한다는 듯한 이야기가 연어의 여행을 설명함으로서 나오지만, 사람은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하지 않는가. 연인과 헤어진 사람이 이 시집을 붙잡고 펑펑 운대도 이상하지 않을 시들이다.

 

 

  

나도 이 시집을 보면서 에반게리온이란 애니메이션의 신지와 아스카 커플을 생각했다. 애니 공식 커플이면서 팬들 모두가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고, 만난지 얼마 안 된데다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도 안 했으면서 마치 결혼한지 10년 이상은 된 듯 권태 냄새를 풀풀 풍기며 티격태격하는 그 커플 말이다.

 

 시들이 굉장히 읽기 쉬우면서도 그 안에 담긴 사랑이 너무나 절박해서 서대경처럼 젊은 시인이 이 시를 쓴 줄 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세상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니힐리즘과 피로가 전반적으로 퍼져 있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묵시록 말고도 생각보다 그가 쓴 시집이 많아서 돌연 아연해졌다. 이 시집에서도 약간 오컬트라던가 고딕호러같은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는데, 아예 이름이 마계인 시집도 있었다. 조만간 또 구입해서 읽게 될지도(...) 오컬트 너무 좋아하는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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