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334
이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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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으로 돌아가려 한다

여자는 침대에 모로 누워 젖이 불은 왼쪽 유방을 꺼낸다 달빛은 유방이 아닌 여자의 얼굴을 푸딩처럼 똑똑 떠먹는다 그 자리에 고이는 시간이 순식간에 검어진다 갓난아기는 머리를 들이밀고 젖을 빤다 아기의 입과 여자의 시간이 동시에 초침처럼 오글거린다 쫄깃거린다 얼룩덜룩한 고양이 두 마리는 침대 아래로 늘어진 여자의 그림자를 핥는다 아기는 새빨개진 얼굴로 젖을 빨아댄다 제가 두고 온 어둠을 미끌미끌한 길을 빨아댄다 아기는 제가 알몸으로 빠져나온 자궁으로 돌아가려 한다 적막하고 환한 물속의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입가로 젖이 흘러넘친다 비린내가 담쟁이덩굴처럼 아기의 얼굴을 뒤덮는다 비린내는 오들오들 떤다 여자는 오른손으로 아기의 연한 머리통을 감싼다 매장의 시간에 익숙한 여자의 손안에서 아기의 머리통이 녹는다 순식간에 상한다 검어진다 아기는 필사적으로 젖을 빤다 여자의 몸속에 켜켜로 쌓여있던 울음과 시간이 끌려 올라온다 시간도 태아처럼 머리부터 빠져나온다 아기는 썩지 못한 제 울음을 제 시간을 삼킨다 아기의 숨통은 점점 더 부풀어오르는 유방 속에 묻힌다 여자의 몸이 어느 생이 이미 벗어놓은 허물처럼 주글주글해진다 달빛을 끌고 나가는 어둠에서 흙냄새가 난다 여자의 질긴 가죽이 아기의 연한 살에 랩처럼 달라붙는다 아기의 그림자가 오그라든다 뜨거운 물이 터져나온다 토막 난 고양이 울음이 여자의 온몸에 젖꼭지로 달라붙는다 길은 창 아래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다 머리가 다 녹아버린 아기의 입이 파닥거린다

 

 

하긴 음악도 그렇다. 1집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음악가가 조금만 스타일을 다르게 해서 2집을 내면 격한 비판을 받는다. 이전에 비해서 스타일이 구리다느니 천박해졌다느니, 급기야는 "1집의 분위기를 타파해보려고 스타일을 바꾸었겠지만..." 같은 같잖은 충고를 점잖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시인도 그런 비판 아닌 비난을 하는 사람들에게 우연히 소개되었다. 도대체 이전의 시인은 어땠고 지금의 시인은 어떻길래 이런 말들을 듣는가 궁금해졌었다. 그래서 김사인의 팟캐스트 방송에서 이 시인이 나올 때 기대가 컸다. 자신의 시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비하를 일상 삼아서 유머처럼 툭툭 던져대서 당황스러웠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자신의 신념에 대해선 상당히 단호하신 분. 어쩌면 그 후자의 성격이 그녀의 교수다운 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자와 거울과 벽을 앞에 놓고 하루종일 들여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근면성실한 사이보그에게서도 귀여운 점이 있었다. 그녀의 시는 섬뜩해 보이는 면이 있지만, 정작 정말로 공포스러운 것들은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게 아닐까? 마치 수위 높은 BL을 좋아하면서도 대놓고 성행위를 그리는 건 부끄러워서 여백을 남겨놓는 여학생같았다. 평론가들은 도저히 그런 점을 매력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걸까?

 영화라던가 그림에서라던가 심지어는 시장에서까지 영감을 받아서 하루종일 시간까지 체크하며 짧게짧게 시를 적어놓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전에 첨단에 대한 무슨 시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원래 시간은 흘러가고 세상은 변하는 법이다. 유행에 함부로 기댄다고 비난하기 전에 자신들은 그런 느낌을 SNS라던가 카톡이라던가에 적는 게 아니라 시로써 적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요즘 문인들이 SNS에서 일기도 아닌 본심을 까발려대는 걸 보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10x10cm 타일

아이들 넷은 모두 아버지가 달랐다 엄마는 같았다 엄마는 빨간 매니큐어를 열 손가락에 바르고 옥탑방을 떠났다 네 아이는 한방에서 조약돌처럼 뒹굴었다 비닐봉지처럼 부스럭거렸다 길모퉁이의 자판기와 나란히 붙은 공중전화에서 각기 다른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 아버지는 직장을 옮기고 잠적했다 공원에서 머리를 감고 옷을 빨고 물을 받아다 먹었다 공원은 그래서 아이들에게 아름다웠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뒷문으로 나와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을 주었다 배가 고프면 돌아가며 비키니옷장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웬일인지 비키니옷장 속에서는 배가 덜 고팠다 전기가 끊긴 방에서도 해가 질 때나 떠오를 때나 세상은 충혈된 눈처럼 붉었다 누군가 버린 꽃나무를 주워 컵라면 용기에 심었다 매직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썼다 성은 쓰지 않았다 장남이 막내의 이름을 써주었다 이름들은 모두 작은 해를 하나씩 품고 있었다 아이들이 막내의 이름을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이름이 넘실거렸다 공기들이 따로따로 반짝였다 난간에 놓인 꽃에 물을 주려고 올라갔던 막내가 의자에서 떨어졌다 뜨거운 옥탑방 앞으로였다 며칠이 되어도 눈뜨지 않았다 바람이 옥탑방을 칭칭 동여맸다 두 발에 걸을 때마다 삐약삐약 소리가 나는 노란 슬리퍼를 신기고 두 귀가 축 늘어진 강아지 모양의 가방을 메어준 막내를 트렁크에 넣었다 갑자기 어딘가에 빈 자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세 아이는 트렁크를 끌고 지하철역으로 갔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셋이 트렁크를 들었다 손잡이가 있는 쪽을 조금 더 높이 들었다 막내의 머리가 그쪽에 있었다 엄마가 돌아온다고 했던 공항이 보이는 강변에서 밤새 땅을 팠다 그곳에 트렁크를 넣었다 땅은 트렁크를 고스란히 껴안았다 흙을 덮는 장남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막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썩는 냄새가 싫었다는 생각을 떠올리느라 열한 살의 오빠는 트렁크에 구멍을 내주는 것은 잊었다 네 살배기 막내는 그곳이 비키니옷장 속인 줄 알테니 배가 덜 고플 것이다

영화는 끝났다

 

 

 

아무도 모른다 영화에 나오는 막내. 영화에서도 이 인물이 하이라이트이지만, 정말 어지간히 감동을 받으셨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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