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2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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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 여자

어디에 갔을까 충남 당진 여자
나를 범하고 나를 버린 여자
스물세 해째 방어한 동정을 빼앗고 매독을 선사한
충남 당진 여자 나는 너를 미워해야겠네
발전소 같은 정열로 나를 남자로 만들어준
그녀를 나는 미워하지 못하겠네
충남 당진 여자 나의 소원은 처음 잔 여자와 결혼하는 것
평생 나의 소원은 처음 안은 여자와 평생 동안 사는 것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
처음 입술 비빈 여자와 공들여 아이를 낳고
처음 입술 비빈 여자가 내 팔뚴에 안겨주는 첫 딸 이름을
지어주는 것 그것이 내 평생 동안의 나의 소원
그러나 너는 달아나버렸지 나는 질 나쁜 여자예요
택시를 타고 달아나버렸지 나를 찾지 마세요
노란 택시를 타고 사라져버렸지 빨개진 눈으로
뒤꽁무니에 달린 택시 번호라도 외워둘걸 그랬다
어디에 숨었니 충남 당진 여자 내가 나누어준 타액 한 점을
작은 입술에 묻힌 채 어디에 즐거워 웃음 짓니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두 사람이 누울 자리는 필요없다고
후후 웃던 충남 당진 여자 어린 시절엔
발전소 근처 동네에 살았다고 깔깔대던 충남 당진 여자
그래서일까 꿈속에 나타나는 당진 화력 발전소
화력기 속에 무섭게 타오르는 석탄처럼 까만
여자 얼굴 충남 당진 여자 얼굴 그 얼굴같이
둥근 전등 아래 나는 서 있다 후회로 우뚝 섰다
사실은 내가 바랐던 것 그녀가 달아나주길 내심으로 원했던 것
충남 당진 여자 희미한 선술집 전등 아래
파리똥이 주근깨처럼 들러붙은 전등 아래 서 있다
그러면 네가 버린 게 아니고 내가 버린 것인가
아니면 내심으로 서로를 버린 건가 경우는 왜 그랬고
1960년산 우리 세대의 인연은 어찌 이 모양일까
만리장성을 쌓은 충남 당진 여자와의 사랑은
지저분한 한 편 시가 되어 사람들의 심심거리로 떠돌고
천지간에 떠돌다가 소문은 어느 날 당진 여자 솜털 보송한
귀에도 들어가서 그 당진 여자 피식 웃고
다시 소문은 미래의 내 약혼녀 귀에도 들어가
그 여자 예뻤어요 어땠어요 나지막이 물어오면
사랑이여 나는 그만 아득해질 것이다 충남 당진 여자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엠씨로도 그렇고 아예 방송계에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던 신동엽이 갑자기 다시 3사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그의 최고 경지에 다다른 섹드립이라는 이유가 크다. 그래서 한때 여러 남자들이 그의 드립을 따라했었지만 지금은 어쩌다가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되어버린 메갈 때문에 그런지 자중하는 분위기가 크다. 하지만 장정일은 무려 14년 전인 2002년 때부터 섹드립을 사용해왔음을 주시해야 한다. 아빠라는 시를 보면 맥도널드의 '소시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신동엽이 혹시 그의 아이디어를 이용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섹드립을 칠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몇몇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반미적 정치적 감정들이 들어간 단어들을 빼버리며 사용한 교묘한 점에 대해선 칭찬을 해야 하지만. 어쨌든 장정일도 그런 섹드립을 혼자서 창작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다가 터득했겠지.

 

 일단 영미시 투의 문맥이 격렬하게 눈을 사로잡는다. 미국의 세계패권에 대한 격렬한 비난은 후반대부터 상당히 격렬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 문법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망가뜨리는 게 독특하다. 미국 문화에 대해 통렬한 비난을 하는 와중에도 번역투에 대한 비난이 들어있지 않다. 물론 속 안동에서 울다라고 불리던 세일즈맨의 죽음을 담던 시에서는 우스꽝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아예 유서에 영어를 써두기는 했지만. 상당히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렇다고 요즈음 주눅이 든 남자들 특유의 주눅듬이라거나 열등감이 느껴지진 않는다. (책이 그렇게나 유명해졌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나라 교육체계를 거부하고 책을 많이 본 것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자신감은 물 속의 집이라는 시에서도 느껴지는데, 그는 명백히 이상의 시 가정을 패러디하면서 비꼬고 있다. 그가 바라는 물 속의 집도 문이 열리지 않지만, 물에서 눈을 들어보니 산 중턱에 집이 있었음을 알았으며 나르시스처럼 사람이 물 속에 집을 만들어 살 수 없다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그러고보니 자신의 경계를 정해놓은 사람도, 자신을 찾으려 물 속만 계속 들여다보는 사람도 일종의 나르시시즘이 아닐까. 이런 식의 자기고백과 자기계발적 메시지를 계속 남김으로서 그는 대담하게 자신의 사상을 시 속에 전개해 나가고 있다. 오히려 지금은 장정일에게 질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는 중졸 출신이니 그들에겐 딱히 꼬집을 것도 없을 것이다. 딱한 일이다. 요즘 일본에서 중졸 노동자에서 시작하는 고등학교라는 만화도 나오는데, 주인공이 좀더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걸 보면 이런 사람이 그래도 우리나라에 존재한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나라 지명을 적절하게 사용한 점도 내 마음에 들었다. 남쪽 지방의 이름이 많이 나왔는데 다들 기회가 있으면 여행하고 싶은 곳들이었으나 시에서는 비판적인 어투가 상당히 많았다 ㅋㅋㅋ 제주도 강정 하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고보면 지금 나름 엄청난 유명세를 탔지만, 예전부터 강정은 아는 사람들만 찾는 관광명소로 유명했던 듯하다. 전반적으로 더블린 사람들을 연상시키게 하는 리얼리티였으나, 한 번쯤은 나올 법한 애니메이션 캐릭터같은 게 등장하지 않은 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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