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닿으면 현악기로 떠는 바다
고성기 지음 / 북하우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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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은행나무

순수, 그 말까지
짐이 되어 벗어버린

알몸, 원죄 없음이
저토록 떳떳한걸

등에 진
삶도 겨운데
외투까지 껴입나

나이 들면 아이처럼
철없이 순수해져

한 그루 은행으로
겨울을 날 법한데

뿌리가
깊지 못하여
기다림도 모르나

 

 

성숙한 인간을 좋아하는 취향 때문에 항상 자매가 같이 있으면 연상 쪽을 선택하게 되듯이, 이 시집에서도 솔직히 시집살이나 사모곡같은 오래된 시가 더 좋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 연작시들은 시인이 정리했을망정 시인이 생각하여 쓴 내용은 아닐테니 심사숙고한 결과 그가 창작한 시 중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겨울 은행나무를 골랐다. 끝에서 나오는 서평에서 여러번 지적하듯이 깊이가 우러나오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연대 보증을 잘못 서서 삶을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뇌하는 가장이라거나 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구절이 많이 나오니 처음 나오는 시들을 한 번 쭉 훑어보는 것도 옛날 생각나고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왜 그럴까 계속 생각해 봤다. 아마도 잡초밭에 장미가 나면 장미도 뽑힌다고 시에서 말하고 있지만 내심으론 옳은 것만을 추구하는 시인의 정신 때문에 상상력에 한계가 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요가에 대한 이야기를 연작시로 쓴 데서 그게 잘 드러난다. 굉장히 요가를 성실히 했구나라는 생각은 드는데, 거기에서 끝난다. 지각을 했다거나, 선생님이 어느 부분에서 도저히 터무니없는 지적을 했다거나 하는 사소한 투덜거림도 없다. 시인은 착해서는 안 된다는 어떤 분의 말이 생각난다. 확실히 시를 짓고 시조문화를 살려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는 느낌은 나는데, 단지 그 뿐이다. 도저히 시에서 유려함이라던가 기발함이라던가 번뜩이는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를 아포리즘의 과잉 사태라고 해도 될까.

 딱히 이 분이 나이가 들어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게, 시집살이 4탄에서는 만약 시집갈 때 억새밭으로 가라고 한다. 그러면 손을 베여서 되돌아올테니, 어머니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맨발로라도 날듯이 달려가는 며느리의 발걸음에서 유머와 애환이 동시에 느껴진다. 분명 이 시가 시인의 시보다 나이가 더 들었는데 지금도 통하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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