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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너머 - 함석헌저작집 23 ㅣ 함석헌 저작집 23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동래여중에서
태백산 줄기줄기 흐르는 맑은 정기
엉키어 피어나온 동래의 고운 딸아
네 몸은 그 봉우리에 비할 듯이
높더냐
동해의 푸른 물결 흔드는 요람 속에
꿈꾸며 자라나는 동래의 맑은 딸아
네 맘은 그 바다 끝 견줄 듯이
넓더냐
금정의 깊은 바닥 뚫고서 솟는 샘의
뜨거움 늘 마시는 동래의 젊은 딸아
네 가슴 그 더운 샘을 웃을듯이 덥더냐

함석헌이 시를 쓰는 줄은 몰랐다. 이제서야 그의 명문장을 본다.
높고 넓고 뜨겁게 살라는 교훈적인 문장들은 하나도 꼰대스럽지 않았다. 고향도 잃고 집도 없고 일도 없이 가난한 그의 일상이 고스란히 시에
박혀있었다. 말 그대로 뼈에 익은 그의 체험이 거기에 낱낱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그가 탓하는 건 오로지 가식적인 인간들 뿐이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생선 꼬리밖에 남지 않은, 보따리 밖에 남지 않은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은 역사와 정치의 진창에서 피 흘리며
뒹굴었노라 하는 자신감이 생생했다. 그래서 흰 손이라는 시를 써서 신을 화자로 둔 뒤 아무 피를 묻힐 줄 모르는 비겁한 종교인들을 비웃었다.
분노하는 신이 개구쟁이 신이 되어서. 그는 찬송가 따위는 천상의 음악에 비길 데가 없다는 둥 인간 세상을 통렬히 비판한다. 원철 스님이
연쇄살인마를 부모처럼 사랑하라 했다면, 함석헌은 독자에게 언제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지를 따진다. '너'에겐 모두가 다 원수인데 친구나 애인이나
동반자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와 가정이 감옥이라 했다. 대학이 사람을 박제하는 곳이라고 한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들으면
까무라칠 말이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제법 귀에 쏙쏙 들어가는 말들이다. 역시 천재는 시대를 앞서나가는 법이다.
감옥에서 아들이
나오고 시가 나온다는 그의 말을 생각해본다. 나는 해외여행을 즐긴다는 사람들을 영 내켜하지 않는다. 알바노조의 어떤 대표급 분이 처음으로 미국을
갔다는데 코웃음만 나왔다. 어차피 다른 나라를 가도 결국 우리는 지구라는 감옥 속에 있다. 우주를 나가더라도 은하라는 감옥 속에 있다. 유라는
감옥 속에 존재한다. 과학이 발전했다지만 인간같은 타지도 못할 썩은 쓰레기의 복제판이나 만들 줄 알지 신의 세계인 무는 아직 밝혀지지도 않았다.
자기네들이 전쟁이다 공사를 짓는다 하여 무너뜨린 문명을, 자연을 아직도 복구시킬 줄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그는 아들을 낳으라고, 시를 지으라고
주문한다. 아들은 나라에 바쳐 불에 태운 뒤 에밀레종을 만들고, 시는 지어서 영혼에게 양식으로 먹여 키우라고 한다. 아들에 대한 묘사는 제법
그럴싸했지만, 영혼을 살찌워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은 어중간하게 나왔다. 이에 대해선 순서가 바뀌었는데, 함석헌은 이 지구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신곡과 실낙원은 비록 상상에서 그러했지만, 아무튼 온 세상을 불태웠다. 영혼을 뎁혀서 불을
일으키자. 자연발화시키자. 아들이던 시던 몽땅 불태워서 이 부조리한 세상을 파멸시키자. 그게 그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을까. 우리 후손들은 그걸
실천하고 있나? 그저 땅바닥에 있는 쓰레기를 주워먹으려고 눈이 튀어나오게 코가 닳도록 얼굴을 벅벅 갈으며 하루를 연명하고 있지 않나? 거지로
살더라도 정신은 올발라야 하는 법이다. 근데 우리는 지금 개만도 못한 죽음을 눈앞에 목도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지켜보고만 있다.
구의역 사고 추모 행사가 열린 8일 저녁, 행사를 지켜본 사람들은 김 씨의 사연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김 씨의 컵라면에 집중하는 만큼 김
씨가 외주 용역 직원으로 싼 값에 위험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와 본질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는 정부와 기업에 대한 문제 제기엔 인색한 것
역시 사실이다. 추모 행사를 지켜보던 한 여성은 김 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면서도 비정규직, 외주 용역만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현실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묻자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대기업에 들어간 직원들이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냐"는 말도 덧붙였다.- <워커스 no. 14> p.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