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기원 랜덤 시선 23
조연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철저한 야외

계절풍 탓이다. 아빠에게 척추 부근을 얻어맞고 눈물 글썽이며, 이건 여행인데, 떠나온 건데, 어째서 떠난 것들이 모두 부러운 걸까, 생각했다. 좁은 바늘귀를 가진 빛의 기둥에 기대어 창은 더 이상 얇아져서는 돌아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전신주와 변압기의 수역. 바닥에는 잠든 선단. 포플러의 혀가 만드는 풀무질. 한 묶음의 거품알들이 모두 방계로 흩어져간다. 가끔 약산성 눈물이 여공들을 싸구려 은박지로 포장해주었다. 너무나 많은 여행이 달력 밖의 길을 택했다. 구름 아래 흐르는 더러운 물을, 달의 바다에 떨어지던 태양의 물을, 나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상수리 숲에서 물결 소리를 듣기 전까지 나는 윤회가 꼭 둥근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술 마시고 읽었던 적은 있었지만 취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 시는 문장이 정말 아름답고 좋았다. 특히 여성에 대한 노골적이고 도발적인 문장이 아름답게 느껴져서 느긋하게 읽어보고 싶었다. 왠지 일본어 문체 같은 단어배열 때문에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왠지 읽는 게 쉽지 않았다. 번번히 '접속사로 보이는 부분'을 틀렸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발음이 꼬여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착오를 몇 가지 읊은 다음엔 두세번 확인하면서 읽게 되었다. 이 시를 읽은 문학평론가의 후기를 보고서야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인은 일부러 이런 장난을 쳤다. 문학평론가가 지적한 '구름 속엔 얼음 고치처럼 단단히 물고기 울음만 떠다녔다' 구절은 나도 틀렸었다. 시 한구절 한구절을 소리내어 읽는 습관을 지닌 나 정도가 아니라면 쉽게 '단단한'으로 읽고 그냥 지나갈 수 있었다. 시인은 어째서 이런 장난을 쳤을까? 책을 의무감으로, 혹은 자기 과시를 위해 속독을 써서 읽으며 느릿느릿 조용히 질문을 던질 줄 모르는 요즘 사람들에게 일침을 날리고 싶었던 것일까?

 (이 시의 말대로 그렇게까지 독서를 하는 건 아니지만, 옛날 집에 컴퓨터도 없었고 고독함을 쫓기 위해 책을 볼 땐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책 읽기를 그만두는 게 좋겠다. 이건 노역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그만두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늦었다고 본다. 그 당시엔 집에 있는 책을 모두 읽었었으며 총 몇 권이었는지 세보지도 않았다. 일기를 매일마다 썼으니 데이터 수치화 할 수 있었겠지만 중학교 때 다 버려 버렸다. 그저 부모님이 밥 먹으라고 다그치거나 때리면 그제서야 밥을 먹었고 친구들이 집에 와서 날 질질 끌고 밖에 나와서야 놀았다. 그런 시절이었다.)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게 시의 내용들은 엄청나게 진중하기 때문이다. 처음 시의 제목부터가 '근친의 집'이다. 게다가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구절, 어떤 사람이 자살하는 구절은 수없이 나와있다. 아무리 눈치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 금방 눈치챌 수 있는 구절이다. 하지만 시인은 여러 등장인물을 사용한다. 연령대도 할머니부터 약간 연상인 여성에 소녀까지 다양하다. 약간 연상인 여성은 대게 '누님'이라고 부른다. 나도 매력적인 여성은 언니가 아니라 누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시인도 같은 부류가 아닐까 싶어 몹시 반가웠다. 일상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약간 붕 떠있는 그 분위기가 몹시 좋았다. 개인적 이야기를 사회 문제로 부상시키는 그 추진력은 더욱 좋았다. "왜 요즘 시인은 사회적인 시를 쓰지 못하는가" 지적하는 꼰대들에게 조소를 날리는 느낌이랄까.

 아직까지도 이름을 선명히 외우고 있는 내 첫사랑이 생각났었다. 애인이 30명도 넘게 있다던 그녀는 팬티를 그냥 입는 건 '더럽다며' 꼭 팬티라이너를 차고 나서 팬티를 입었었다. 그것도 하루에 한번 이상 갈았었다. 사랑에 눈이 먼 내가 보기에도 그 행위는 엄연한 환경 낭비였다. 더러운 인간관계는 끊지 못하는 주제에 구강성교 같은 건 평생 꿈도 못 꿀 그녀를 떠올리며, '그녀도 많이 힘들었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이 시의 겨울을 보면서 그녀가 좋아했던 하얀색, 팬티라이너 색깔을 떠올렸었다. 이전 같았음 이런 쓸데없는 기억을 떠올린 날 저주했을텐데. 사람은 변하는 것인가.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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