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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 머무는 곳 생각 멈추는 곳엔 늘 네가 있더라
노은아 지음, 이인호 사진 / 강단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당신께
사랑해요
그 말
한마디만 전했었더라면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이생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
나 당신을 뵈옵거든
그때는 꼭

겉으론 시집이라고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대게 SNS에서 누구나 쓸 수 있는 짧고 간결한
문장들이 비유도 없이 직설적으로, 소박하게 쓰여져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큰 주제로 쓰여져 있지만.
주제를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에 맞추려는 것일까? 아님 다른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배려일까? 분명 결혼도 하신
것 같은데 신기하리만큼 자식 이야기가 없다. 과거에 대한 회상도 자신의 유년 시절이라거나 10년 전쯤에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일들에
맞춰져 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이 상처뿐이라 진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작가가 태어나려 했는데 제왕절개를 할 병원이 근처에 없어서 수원까지 가서 낳았다 한다.
그런데 그날 폭설이 와서 길이 끊기는 바람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에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인 작가를 눈보라에 노출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꼼짝없이 병원에 갖혀 있었는데 그동안 부부가 운영했던 양계장은 사고로 폐사되었고 조수로 일하던 청년이 전재산을 빼먹고 도망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아버지가 술로 세월을 허비하다 중장비면허를 따고 농사일 등으로 새출발을 했다고 하니 작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 사실을
전해듣지 않았나 싶다. 작가의 인상에 매우 깊이 남은 사건이었을 테지만, 어머니를 잃은 이후 더욱 아프게 남았을 상처이리라 생각한다. 자신의
남다른 출생?에 대한 죄책감과 둘째 여자아이라 쉴새없이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던, 무기력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억울함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는 데
그것을 해소하지 못하여 그녀에게 한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시집은 그런 트라우마를 추억으로 남기려는 부단한 노력을 담고
있다.
어떤 분이 시집을 찾길래 이 책을 추천하는데 몇 장 훑어보다 "나는 나이도 많이 먹었고 이런 일들에 대해선 충분히 알고
있다. 좀 더 수준 있는 시를 읽고 싶다."라고 말하는데 우스웠다. 대체 수준 있는 시란 어떤 시인가. 자신도 무언지 정확히 모르는, 사전에서나
나올 법한 비일상적 단어들을 마구 나열하는 것? 아님 시인 그 자신과 주변 사람들만 알고 있을 법한 추상적 비유를 남발하는 것? 하지만 잠시 이
할머니를 이해하려 해 보자. 작가의 경험 자체는 확실히 독자들 모두의 가슴 속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지만, 작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용택 시인은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을 씻기며 그들을 최대한 올바른 길로 이끌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그런 구절을 부모님께
읽어드리고 있을 때 아버지는 도중에 자리를 피했다. 아버지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건 아니지만, 아버지는 집안의 가난 때문에 4살 때부터
중학생 정도 될 때까지 남의 집에서 컸다. 나 혼자 있을 때 이 시집을 읽긴 했지만, 만일 아버지에게 이 시집을 읽어드렸다면 그 할머니나 심지어
나 같은 독자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그 할머니는 어린 시절 그래도 어머니 없이 자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게 아닐까 싶다. 자신에게 흥미가 가지 않는 시집을 '수준 낮은 시집'으로 보는 건 그 자신의 수준을 스스로 낮추는 일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