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문학의전당 시인선 121
홍순영 지음 / 문학의전당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교회에서는 연옥을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연옥 영혼은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는 천국에 이르기를 고대하면서 잔벌을 씻고 있는 영혼을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 구원될 수 없어서 이승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기도만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연옥 영혼을 구하는 방법은 미사와 묵주 기도와 화살 기도의 은혜가 크다'고 단언했다.

 

 

 

간단한 시를 읽기 위해 책을 펼쳤는데 오랜만에 내 종교에 관련된 책을 보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내 동네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강릉에 계셨다고 하니 반가웠다.

 

 이 책이 발간된지 10년이 지났지만 왠지 아직도 강릉에서 솔올 성당 다니시면서 가톨릭문우회에서 글을 쓰고 계실 듯하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솔직한 글쓰기와 남을 걱정하는 착한 마음씨를 보면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마냥 칭찬만 하긴 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첫째로, 아무리 부모님이 편찮으신 이후로 강릉에 내려가서 소박한 생활을 하다 참회하면서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그 분들이 연옥에 계실 거라 단정짓는다는 점이다. 그 분들이 지옥에 계실지 연옥에 계실지 천국에 계실지는 홍순영 씨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단테처럼 산 채로 저승에 떨어져서 아는 사람을 찾아 헤메지 않는 한 말이다. 게다가 그들의 영혼이 머물 장소를 하느님이 정하신다고 할 때엔 특히 더하다.

 


 이충희 씨의 고고한 모습을 학에 비유한 시를 지었다는 점도 그녀의 글이 모자란 이유를 더한다. 우리의 눈에는 백조가 우아하고 도도해 보이지만 그들은 살기 위해 물 밑으로 물을 잔뜩 헤집으며 먹을 것을 찾는다. 이는 그녀가 온전한 자연의 시각에 머물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며, 시인의 눈으로 사물을 느긋하게 오래 관찰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수필이던 시던 소설이던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의 숙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충희 씨를 찬양하는 글을 써서 이충희 씨 본인에게 보여주는 행위는 성급하고 어리석었다.

 


 마지막으로 광화문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녀의 글솜씨에 한계가 있음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누구나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할 수는 있으며,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에서 사람들이 여흥을 즐기기 위해 모인 일과 제 16대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사람들이 모인 일은 그 목적과 성격들이 엄연히 달랐다. 그러나 자신의 훌륭했던 과거에 사로잡힌 그녀는 단지 그 둘을 '자신의 과거와는 다른 사건'으로만 치부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녀는 세월호 사건 같은 안타까운 일들에 충분히 유감을 표시하겠지만, 유가족들의 '시위를' 도와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괜히 광화문에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한 게 아니다. 그녀는 위험한 일에 나서길 꺼리고 있으며, 성당에서 하는 일 외에 모든 참여를 폭력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지. 어렸을 때 그 구절을 읽었을 때는 의문이 들었는데,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글이 솔직한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와 왜곡된 감정에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는 그녀의 성격이 다 드러나 보인다. 안타까울 정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