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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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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던 걸까. 저 글들을 통해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뭐였을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 부질없구나.

 

 

  

사실 주인공 요나랑 마리가 사랑하는 장면은 무지 짤막하지만 이 소설을 설명하는 데 이 이상 적절한 짤방이 없구나.

아스카: 이 바보 신지! 내가 얼마나 널 열심히 구했는데! 

 

 지금 이 시대에 모두가 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구원과 힐링이란 단어는 사실 종교에 근원한다. 구분하기가 매우 힘들지만 구원은 그리스도교가 꿈꾸던 '메시아' 즉 인류보완계획으로 압축되며, 힐링은 마음 들여다보기와 거울 닦기를 강조하는 불교에서 유래한다. 이 문장만 써도 왠지 또 종교를 믿는 인간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돌멩이를 던져댈 것 같으니 일단 이 정도로 하겠다(...) 이 책은 둘 다 다루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구원 쪽에 관련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특히 '창세기'에 집중하고 있는 점이 굉장히 재밌다. 나도 일단 가톨릭교라 후자에 집중해서 보았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자제하겠지만 이 책에 대한 평가들에 대해서 반박할 게 몇 가지 있다. 일단 이 책에 등장하는 평론가 씨가 소설 후반 부분에 '종말'이란 단어 한 번 나온 거 가지고 필이 꽂혀서 계속 종말론 이야기를 하고 계시지만 이 책에서 중요한 메시지는 요한계시록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흔하게 비교하는 1984 소설하고도 굉장히 다르다. 1984에서의 권력자 오브라이언은 굉장히 매혹적이었지만 이 소설에서 나오는 권력자들은 학자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굉장히 한국적인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브라이언보다는 대우를 말아먹은 우리나라 정치인 이한구와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자체가 소설을 그다지 읽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고 지금 사회 현상이 갈수록 말도 못하게 정치랑 얽혀들어가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 책은 사실 이쪽 계열에서는 굉장히 많은 논란이 일고 있는 문제작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서평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은 혼란스러운 심정을 나타내며 짧게 끝나고, 소수는 길게 우리나라의 디스토피아화를 피력한다. 정말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이는 나같이 포괄적인 덕후가 아니면 소설 속에서 나온 노인처럼 백내장 걸리지 않은 한쪽 눈으로밖에 볼 수 없는 장르이긴 하겠다. 종교나 애니메이션이나 장르소설이나 둘 다 깊이 파고들어가지 않아서 문제지만;

 어제도 이에 대해서 글을 썼지만 오늘도 똑같은 말을 하겠다. 정치에서 '인간'으로 구원자를 찾지 마라. 정치계는 인간보다는 그 인간의 뿌리, 즉 출신에 강하게 좌우되는 분야이다. 차라리 그 인간이 소속되어 있는 무리의 이데올로기와 공약, 철학, 역사에 주목하라. 그리고 사실상 현실의 선견자는 일을 저질러놓는 트러블 메이커에 가깝다. 그렇기에 자신이 내뱉은 말과 벌여놓은 약속들의 파장을 수습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은 절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럼 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냐고? 신은 이미 위기가 없는 절대자인데 뭐 하러 인간을 구원하겠나? 인간이 십이지장충을 구원할 수 있는가? 나에게 신이란 이런 존재다. TV를 키면 방대한 인간들이 나오는데, 그 인간 하나하나가 채널을 이루는 거다. 신은 울다가 웃다가 재미가 없어지면 재미있었던 몇몇 채널을 킵해두고 다른 쓸모없는 채널들을 하나하나 '소멸'시키는 거다.
 
 그러나 지워버린 것들 중 몇몇 채널들은 가끔 아쉬움을 남기며 머릿속에 떠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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