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기록장 칠백오십사번째.- 입 속의 검은 잎

입 속의 검은 잎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쥐불놀이

ㅡ겨울 판화 5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에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걸요?

돌리세요, 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

돌리세요, 술래

는 잠을 자고 있어요

헛간 마른 짚 속에서

대보름의 달이여

온 동네를 뒤지고도 또

어디까지?

아저씨는 불이 무섭지 않으세요?

나는 어째서 이게 빈곤한 동정 남자 대 유부녀간의 금단 로맨스 내용으로 보이는 걸까.

오늘 내내 시나리오를 그려봤는데 본인도 속으로 상상하면서 꽤나 우스웠지만

불하면 역시 불장난이 생각나고

달빛이 자신들이 누워있는 침실까지 비칠까봐 침대 끄트머리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남녀 크.

 읽다보면 글을 쓰고 싶어지는 그런 글이 있다. 소설에서도 간혹 있지만 보통 너무 길어서 엄두가 안 나는 경우가 많은데, 시는 확실히 독자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줘서 자꾸 욕심나게 한다. 그런데 이 시집이 바로 그랬다. 시에서 언뜻 비치는 어린시절 이야기는 굉장히 불행해서 내 정도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엄두를 못 낼 것 같지만, 침묵에 대한 시 두세 편은 상당히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왜 침묵을 선택했을까? 혹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파묻혀 강제로 '침묵당했'을 때, 그가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쥐불놀이도 그런 것처럼 사람의 상상력을 끝없이 일으켰다. 안개같은 상당히 끔찍한 시도 만만치 않았지만(여공이 강간당한 후에 자살했거나 혹은 타살당한 듯하며, 남자는 울부짖으며 도시를 떠난다.), 시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무한한 여운을 남기는 데가 있었다.

 나의 글쓰기에 대해 잠시 되짚어보자. 생각해보면 겉으로 쓰는 글은 최대한 어른스럽게 베테랑적으로 쓰려 노력하는 경향이 있으나, 여기 말고 다른 데 쓰는 글은 중2중2하며 페북에 쓰는 글은 유아틱 글쓰기라 상처투성이에 말할 것도 없다. 모종의 일로 나도 큰 교훈을 얻어 남들이 페북에 공개적으로 욕지거리 하는 걸 비판하고 결국 페북하지 말라고 등떠미는 일까지 초래한 나지만 나도 지금까지 돌이켜보면 욕하다 지우고 부끄러워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어쩐지 '일기'를 쓸 의욕을 잃으니 남은 생짜는 페북에서 가끔 한번씩 부리는 것 같다. 그렇지만 글을 쓰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다. 특히 요즘은 편협주의, 취향강요, 그리고 그에 대해 내 안에 존재하는 시꺼먼 분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론 기형도 씨의 말대로 침묵이 제일인 거 같기도 하고 근데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뻔뻔한 인간들 때문에, 반면 끊임없이 남들이 나를 욕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마음가짐때문에 대답이 번번이 가로막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감정에 삼켜져버리는 경향이 있어 글을 남에게 공식적으로 보이는 게 부끄럽다. 이러니 내가 항상 고스트라이터밖에 못하지. 그러나 내가 항상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1. 나도 너와 다를바 없는 인간이지만 너와는 다르게 살기 위해 노력, 아니 발버둥칠거다.

 2.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당신의 삶을 욕하고 싶지 않다. 존중하고 싶다. 이는 사실 김선우 시를 다룰 때 이야기할 생각이었지만.

 읽을까 말까 한참동안 고민한 후에 김현의 평론은 잘 읽어보았다. 사실 전문을 읽어야 이해를 하겠지만, 인생을 증오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오히려 그가 젊은 시인이어서가 아닐까?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노파가 된 느낌이 든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정신이 아직 젊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기형도 시인도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닐까? (일단 영락없이 빼도박도 못하게 중2병이니까. 저같은 것과 동일시해서 죄송하다만...) 여러모로 그의 기형도 시 해석에 반발심이 생기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쓸모없는 감정이라느니 심장이라느니 자신의 오른팔에서 은빛 불꽃이 솟아나온다는데... 그 당시엔 중2병이라는 용어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속에 살고 있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토로하는 그의 어조는 요즘 중2병들의 인정받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권력을 잡고 싶다는 아우성과는 매우 대조될 정도로 담담하다. 김현은 기형도를 닮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모든 글쓰는 중2병들에게 기형도를 닮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기왕 자기 속에 갖혀 고립될 바엔 좀 스마트하고 세련되고 우아하게 고립되란 말이다. 자본주의에 따르려는 속물근성과 그에 반하는 감정에 이쪽저쪽으로 끌려가면서 이루어지는 븅산탈춤이 상당히 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