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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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손을 잡지 않았다면

 

이문재

 

아직 손을 잡지 않았다면
아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면
그대는 아직 그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 모른다면
지금까지 자기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면
그이는 아직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날카로운 첫 키스가 첫 단추가 아니다.
첫 키스는 서툰 기습 같은 것이다.
사랑은 손에서 시작한다.
사랑은 손이 하는 것이다.
손이 손을 잡았다면
손이 손안에서 편안해했다면
그리하여 손이 손에게 힘을 주었다면
사랑이 두 사람 사이에서
두 사람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두 손은 서로의 기억을 가지려 한다.
열 개의 손톱이 모두 그이의 얼굴로 보일 때
손금에서 꽃 피고 별 뜨고 강물이 흐를 때
그리하여 그대가 알고 있는 그이의 이야기와
그이가 알고 있는 그대의 이야기가 같아질 때
그때부터 둘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헤어질 수 있는 자격은 그때서야 생기는 것이다.
먼 훗날, 아주 먼 곳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렇다고 후회하지도 않으며
추억할 수 있는 권한은 그때서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츠바사 크로니클 첫부분에서 샤오랑과 사쿠라 사이가 유리로 가로막혀서

서로 마주볼 수는 있지만 닿을 수 없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 이후로 샤오랑이 사라진 사쿠라의 기억을 찾기 위해 먼 여행을 떠나는 데서 의미가 깊어진다.

 

 나같은 경우는 보통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 데에서 스킨쉽이 시작된다. 첫사랑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다. (물론 생길려다가 실패한, 잘 기억도 안 나는 미숙한 사랑은 제외하고. 그런데 이 시를 읽고 생각해보니 꼭 그런 분들과는 손을 맞잡은 적이 없더라.) 그리고 손잡기를 제외하고 사랑의 증거가 나타나는데, 죄다 그 사람에 대한 정보이다. 일단 정리해보면 어린 시절, 싫어하는 음식, 가족 이야기이다. 최소한 마주보고 있거나, 이야기를 들은 마지막에는 상대방의 손을 붙잡아줘야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싫어하는 음식 이야기일 경우는 심각한 이야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다른 좋아하는 걸 먹자고 손을 잡아 다른 곳으로 끌어줄 수 있으니까. 아무튼 전부 다 당장 만나자마자 할 이야기는 아니다. 정상적인 맞선을 본 적이 없지만(...) 아마 그런 곳에서도 당장 싫어하는 음식 이야기를 하기엔 비매너로 취급될까봐 조심스러울 테고, 어린 시절이나 가족 이야기를 상세히 하기엔 좀 꺼려질 것이다. 나는 스킨쉽을 상당히 좋아한다. 손을 잡고 조곤조곤하게 대화하는 것을 나는 매우 좋아한다. 손을 마주잡고 걸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아무리 이야기가 잘 통하더라도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이 시집에 쓰여진 시는 쉬워 보이면서도 어렵다.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연꽃 이야기가 가장 생각할 여지가 많아서 좋았다. 게다가 내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는 시가 왜 그렇게 많은지. '백서'는 세월호와 인혁당을 생각하게 했고, '태양계'는 Y를 생각나게 했고, '허리에게 말 걸기'는 M씨를 생각나게 했고, '생일'은 우리 부모님을 생각나게 했고, '연금술'과 '자작령'은 그 녀석을 생각나게 했고, '봄날 2'는 남생유 님을 생각나게 했다. 통 못 보거나, 지금은 내가 그닥 친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중에서 섞여잇다. 가끔 이들이 그립기도 하지만, 결국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한 시는 지금 여기가 맨 앞이었다. 글을 쓰려면 자기를 중심으로 여겨야 한다는 어떤 시인 분의 말씀이 생각난다. '글을 쓰려면'을 '살아가려면'으로 바꿔도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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