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 2015.4
샘터 편집부 엮음 / 샘터사(잡지)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그해 봄날 나는 수선화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 앉아 있었다. 이후로 삶이 잿빛으로 여겨질 때면, 눈앞에 아득하게 펼쳐졌던 그 흰빛과 노란빛을 떠올리곤 한다. 괴테의 <색채론>을 보면 씨앗이나 뿌리 상태로 겨울을 견뎌낸 봄꽃들이 주로 흰색이나 노란색을 띈다고 한다. 깊은 땅속의 어둠과 추위가 그렇게 환한 등불과도 같은 꽃을 피우게 했을까.- p. 73

 

 


 

내가 샘터를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 담배가 테마이면서 이런 다양한 내용이 올라와서 다방면으로 생각의 폭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정호승의 <수선화에게>라는 시가 생각난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내가 담배를 배우기 시작한 건 일하면서부터였다. 일을 하다보니 역시 사회부적응자인 나로서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 남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여러가지를 나서서 해야 했고, 그 과제 중 하나가 담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모금 피다보니 끊을 수가 없어서 한 땐 중독 상황에까지 나아갔었다. 그러나 내가 담배를 끊게 된 이유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건강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첫사랑과 연애를 하게 되다보니, 끊게 되더라. 그렇다고 그 사람이나 내 건강 상태를 걱정해서 끊은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과 나중에 깨지던 아니면 잘 되던 간에 나에 대한 기억을 고작 담배냄새 따위로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첫사랑과 깨지고, 그 다음 애인이 태국에서 여행을 다녀온 뒤에 향수를 선물로 줬었다. 바람의 검심 추억편을 이야기하면서 토모에의 백매화향을 이야기했었는데, 정말 백매화향 향수를 구해다 준 것이다. 지금은 그 향수도 바닥이 나고, 첫사랑하고도 험하게 싸우다가 헤어지고 향수를 준 그 애인과 숱한 다른 애인들하고도 숱하게 싸우고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또 사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아직도 난 (비록 향은 다르지만) 향수를 쓰고 있고, 아직도 담배를 피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두 번 다시 그 사람들을 만나기 싫은 것도 사실이다.


 난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 글보단 전화가 좋고, 전화보다는 얼굴을 마주하고 같이 있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항상 같이 있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일반화는 변명이지만, 트라우마가 있는 인간은 항상 인간관계의 끝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 그런 사람이 쌓은 인연은 반드시 악연이 되고 악연은 추억으로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프로이트의 카우치를 보면서 엉엉 울거나 하는 건 좋다고 생각하진 않는단 말이지. 프로이트가 카우치에 누워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비듬을 떨어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는가? 프로이트가 카우치에 누워서 코딱지를 파다가 크고 굵은 게 나와서 한 번 뭉친 다음 카우치 바닥 구석진 곳에 묻히지 않았다고 확신하는가? 하지만 기억으로 남는다면 어떨까?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딱 아련하게만 남는다면?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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