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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짐승의 연애
이응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낙천과 멍청함이 가끔 일치하듯, 어떤 지성은 그 어떤 폭력보다 무자비하다.- p. 62
<달의 뒷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이 고야의 그림을 닮았다면
이번 소설은 에곤 쉴라를 닮았다.
좀 더 에로틱하고 좀 더 제대로 된 형태를 갖췄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랑 이야기만 나오는 건 아니다. 감정이 없는 섹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도를 통달한 살인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뜬금없이 아버지 이야기가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물론 맨 마지막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주인공이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에 처하는 건 다 똑같다. 그러니까 이 책은 대강 사람 살 때 한 번 쯤은 있을 듯한 이야기들을 담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사막여행이라도 갔다가 왔는지 계속 모래와 낙타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하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여행이라던가 무언가를 계기로 하여 많은 심경의 변화를 겪은 듯하다. 그나마 소설집 마지막에 완성도라고 할 만한 형태가 잡혀있는 걸 보면 이것으로 작가의 성장도를 볼 수 있다고 쳐도 되겠지.
성을 다루고 있다지만 무라카미 류처럼 강한 야성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살인자에 관한 이야기 하나만 뺀다면.) 오히려 이야기 하나하나의 남자주인공들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거세당한 야생동물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여성이 강력하게 남성을 짓누르고 있는 형태는 아니다. 어떤 단편소설에서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빌려 그 남성을 감싸주고 있으니까. 소설의 형태는 하나같이 다 어떤 특이한 사물이라던가 사건을 계기로 남성이 숨기고 있는 연약한 감수성을 액면 그대로 꺼내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응준의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책 하나하나가 다른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와중에서는 내가 싫어하는 형태의 소설도 있지만, 그래도 책을 잡는 순간의 기대감은 크다.
김정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