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몸짓으로 이 사랑을
마더 데레사 지음, 지은정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삶을 희생과 사랑의 끈으로 엮어 나가면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p. 21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최근에 읽은 책인지라)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여기서 주인공은 에미야 시로라 한다. 고아원이 불에 타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키리츠쿠라는 사람에 의해 도움을 받은 그는, 자신의 목숨은 남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사람도 아닌,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는 거의 결벽증 비슷한 성향이 있다. 어차피 전투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이지만,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지거나 불가피하게 해를 끼쳐야 하지 않는 이상에는 필요 이상으로 설득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아처라는 인물은 그처럼 남을 돕고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이루길 바라지만, 주인공과는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희생될 수밖에 없는 자는 미련없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둘 다 서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똥철학이고, 어차피 세상의 진실은 하나라기보단 다차원적이기 때문이다. 마더 테레사가 그나마 이들의 해답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도와주려 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이 존재하기 때문에 항상 어떤 사람에게든 무시하거나 경시하지 않고 하느님을 섬기듯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라 생각되는 자에게 이런 말을 할 용기가 있는가.

 

 그녀의 말씀 중에서 에이즈 환자가 나오는데, 그는 자신의 고통을 예수님의 고통에 빗대어본다고 했다 한다. 그렇다고 '내 아픔은 예수님의 아픔 정도에 비하면 작은 것이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세히 쓰여져 있지는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자신의 아픔과 예수님의 아픔을 그 자체의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방법을 깨닫지 않았나 생각한다.

 요새들어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 배신을 전민족적으로 받았던 예수님을 생각해본다. 학교나 심지어 조그만 단체에서라도 그 고통을 받는 아이들의 심정은 예수님의 수난과 같을 수 있다. 그 누가 그 아이들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그 경중을 어떻게 따질 수 있단 말인가. 그 안에선 당사자의 예민함, 가정분위기, 심지어 국가의 상황과 정책 등 수천만가지의 변수가 있는데 말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종교가 없으면 내 안에 신적인 존재 혹은 영혼이 있다는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매달리려 하셨을까? 요즘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에게 난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종교를 가장 추천하지만, 버틸 수단을 무엇이든 찾아서 버텨내라. 언젠가 자신이 찬란히 부활할 그 순간을 꿈꾸어라. 하느님은 아마도 부활하자마자 은근히 당당하게 그 순간을 즐기려 자신의 얼굴 위에 덮인 수건을 말끔히 정리했을 것이었다. 난 졸업식날 마이크에 대고 나를 괴롭힌 학급들 앞에서 펑펑 울며 그들을 용서할 것이라 했다.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진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 말을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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