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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촉감
김한조 지음 / 새만화책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용서를 구할 대상을 상실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
(....)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용서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p. 125
다른 건 없고, 왠만한 만화책들은 다 포장을 꽁꽁 싸매서 파는 교보문고에서 유일하게 공개된 책이라서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술술 읽어버린 책이다. 그림도 상당히 안정적이고 내용상에서도 은은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읽는 속도감은 상당히 빨랐다. 옆에서 다른 책을 읽던 남친이 깜짝 놀라서 '벌써 다 읽었어?'라고 할 만큼의 책이었다.
옴니버스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언뜻 보면 전혀 관련없을 듯한 삶의 이야기가 하나로 묶여진 책이다.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아나고 이야기와 낙태한 적이 있는 여자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생각해보니 둘 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야기이다. 그런데 정작 읽을 때엔 별로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아서 굉장히 미묘하다. 만화는 전체적으로 철저하게 남성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 페미니스트를 보는 느낌이 이러할까. 그냥 사람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도, 깊은 의미가 있다.
나도 결혼할 때 어망에 갖힌 아나고처럼 '멍한 피해자'의 느낌이 들까?
아나고를 죽일 때 머리에 못을 꽃고 껍질을 벗긴다는데,
상당히 강렬한 성적 느낌이 들었다.
아나고와 여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위의 만화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고, 삶을 살면서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에필로그에 최종적으로 두 만화가 나오는데, 그 것에선 인생에 대한 작가 나름대로의 해답을 주고 있다.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낙태한 아이에게 죄책감을 지니고 시달리고 있지만, 죽은 아이에겐 절대 속죄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괴로움을 안으로 품는다. 목사의 딸인 그녀는 신에게 모든 죄를 전가하고 싶은 유혹을 품은 듯하지만, 결국 포기한다. 이유인 즉슨 신은 그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용서를 빌어봤자 자신만 편해지기 때문이란다. 용서할 대상에 대해서 상당히 철저하게 규정하는 사람이라 해야 하나. 화자의 모습을 빌은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사람을 몸과 마음으로 사랑함으로서 그 과거는 기억이 되니,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 중 하나에게 용서를 빌면 되지 않겠냐고. 그녀는 생각보다 상당히 단단한 사람이고, 결국 정신과에 다니면서 약을 먹고 자신의 기억을 밖으로 털어놓기 시작한다. 흠, 나는 어떤 방법이든 간에 자신에게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쨌던 살아가면 언젠가 용서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쉽게 끊기지 않으니까.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프랑스판도 나왔다는데, 생각보다 정말 대단한 만화가이신 듯하다. (원래 프랑스인들이 이런 글을 좋아하긴 하지만.)
'소년의 밤'이라는 만화도 있다는데, 한 번 질러서 볼까 생각중이다.
김정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