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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전집
김남조 지음 / 서문당 / 1991년 3월
평점 :
품절
속초집에 들렀다가 할 일이 없어서 책꽃이를 뒤져보았더랜다. 그랬더니 발견된 것은 오오 희귀본. 김남조시선집이라면 재출판되었지만 에세이집은 무려 절판이더라. 남자친구의 말로는 작가의 도장까지 직접 찍혀있는 책이랜다. 왠지 책이 엄청 비싸보이고(???) 무튼 엄마의 허락으로 책을 가져가서 열심히 읽었다. 역시 혈육은 속일 수 없는 듯, 어머니가 20대 시절 책 뒤에 시구로 소감문까지 써 놓은 이 책은 내 마음에도 쏙 들었다. 홍백의 장미와 새파란 장미가시가 만발한 느낌이랄까. 하나하나 화려한 묘사를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간결하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시였다.
특히 본인은 '사랑초서'와 '촛불'이라는 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하나의 감정과 하나의 사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표현하는 듯하다.
온 세상
삶 전쟁
빈집엔
죽어야 할만치 피가 달가운
여자
-사랑초서 中 24-
떫은 사랑일 땐
준 걸 자랑했으나
익은 사랑에선
눈멀어도 못다 갚은
송구함뿐이구나
-사랑초서 中 53-
물 속
천길 만길에
금두레박을 타고 온 이는 없다
찬물 찬물 밑바닥에
추워서
눈먼 여자
찾아준 이는 없다
너밖에는
-촛불 中 9-
특히 '촛불'의 저 구절에는 페이지 끄트머리에 '물 속~찾아준 이는 없다'까지만 적혀있고, 다음 장에 '너밖에는'이라고 적혀있다.
페이지를 딱 넘겨서 그 단어를 봤을 때의 감동이란!
일단 처음 출판된 책이 오랜 세월 속에서 다시 발견되었을 때 보물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한자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귀절들, 그리고 아까 위에 올려놓은 조그마한 센스(?) 등 개정판에선 없는 재미가 새록새록 솟아났다.
이래서 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