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바이러스 - 그 해악과 파괴의 역사
헤르만 크노플라허 지음, 박미화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는 아직도 남자라면 번듯한 차 하나 구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자동차 면허 하나 못 땄다고 부모가 구박하고 친구들에게 '민폐끼치는 놈' 취급당한다. 심지어 어떤 은행에서는 차 대출 프로그램까지 챙겨놓았다. 대놓고 남자들에게 차 하나 구입하라고 압박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내가 여자란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여러 이유들 중에 하나이다. 내가 워낙 기계를 다루지 못하기도 하지만, 차 안에만 들어서면 인격이 변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기 때문이다. 관절병원에서는 교통사고 환자들이 매일마다 보험업자 혹은 가해자와 싸운다. 그리고 보험업자나 가해자나 한결같이 자동차 중심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았다. 여기서 '그들'이란,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 탄 인간'을 말한다. 본인도 그들로 인해 피해를 겪은 적이 있다.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을 때, 본인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가 그냥 지나가버린 적이 많다. 하도 화가 나서 버스회사에 전화해서 따졌는데, 대답이 가관이다. 다음부터는 밖에 서 있으라는 것이다. 요즘엔 공공버스 하나 잡아타려면 차가 씽씽 달리는 차도 옆 내 발밑도 못 미치는 갓길에 서 있어야 한다! 이 책을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그 회사 직원은 인간으로서 말한 게 아니었다. 그의 내부에 있는 버스가 그한테 그렇게 말하도록 조종했다. 
 처음에 그리스신화에 대해서 말했을 땐 정체를 의심했지만 알고보니 이 분은 오스트리아 빈 공과대학 교통계획과 교수였다. 환경운동가가 아닌 교통전문가가 자동차를 근본적으로 헐뜯는 글을 쓴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나니 내 생각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보행자교통도 자전거교통도 얼마든지 교통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처음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합리적이고 통계적인 이론, 계급차별정책과 환경문제 등 그의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자동차의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는 그 헌신적이고 집요한 노력은 보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교통사고의 문제가 교통시스템이라는 말도 새롭게 들렸다. 한가지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면, 독일에서 히틀러가 처음으로 도로를 확대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독재자로 불리는 박정희도 새마을운동의 일부로 도로를 확대했었다. 이 부분은 역사가나 연장자 분들이 더 잘 아실테니 이 쯤에서 생략하려 한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시길. 교통관련학문에 종사하시는 만큼 자동차의 역사와 발전(이라고 쓰고 퇴보라고 읽는다.)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환경운동가와 차이가 큰 견해는 바로 밑의 글에서 드러난다.

 흔히 차체가 가벼운 전기자동차는 에너지를 덜 소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전기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 데는 일반 자동차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사용된다. - p236

 전에 봤던 '지구의 미래'라는 책에서도 전기자동차를 극찬했으며, 실제로 우리나라의 환경운동가들마저 전기자동차 대량보급을 생각한다. 그는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알고있는 만큼, 바이러스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자동차가 있어야 한다는 편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책에선 심리적 실험도 등장하는데, 저자가 직접 실행하고 사진까지 찍었다고 하며 상당히 재미도 있다. 꼭 진지하게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사실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웃기고 재미있는 실험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책 들 중에서 자동차 모는 보통 남자의 극단적인 심리를 주제로 한 공포소설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이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난 내 이상형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자동차 몰 줄 모르는 남자가 좋다. 본인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천성 걷기를 좋아하는 보행자이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바이러스'에 얽히긴 싫다. 자전거를 몰 줄 안다면 좋지만 몰 줄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다. 자동차 몰기 좋아하는 사람보단 그래도 괜찮다. 특히 자동차를 좋아하는 남자라면 상황은 더 골치아프다. 그들은 도로가 조금이라도 가파르고 울퉁불퉁하면 쓸모없어지는 자동차에 자신의 모든 수입을 털어넣는다. 게다가 피규어까지 즐긴다면 상황은 더 재밌어진다! 스포츠카를 탄 남자를 좋아하는 여성에게는 많은 희생이 따름을 본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저자는 말보단 행동에 옮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인은 일단 우리나라에서 운전자에 대한 사회적 관점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이 길어진 김에 이 책에 그렇게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은 이유를 밝히려한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헤르만 크노플라허의 견해는 100점 만점이다. 그러나 저자의 실수인지 아니면 오역인지 알 수 없는 대목이 있다.

 게놈은 계획과 지속성을 위한 것이고 두뇌는 개별화와 즉홍성을 위한 것이다.- p180
 

 이렇게 말해놓고서 '게놈이 지배하는 법칙의 심각성'이라는 소제목에서는 단순무식한 게놈의 성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솔직히 우리나라 출판사에 본인은 나름대로 관대한 편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빈을 '서울'이라고 번역한 대목에서는 화가 난다. 대한민국의 수도가 아니라는 주석조차도 없다. 번역도 매끄럽지 못하고 길게 늘어지는 면이 있다. 이렇게 좋은 책을 번역때문에 망쳐놓다니. 새삼 번역가의 선별, 그리고 책에 대한 번역가의 지식과 매끄러운 정리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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