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밤의 랩소디 - 해외동포 이민생활 산문집
아침편지 문학동호회 엮음 / 사랑닷컴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운 씨의 아버지는 학생 때인 1950년대 초반 부모를 따라 다시 강을 넘어와 경흥에 자리 잡았고, 결혼한 고모들은 훈춘에 살았는데 1962년 '조중 국경조약'이 체결되면서 이들 형제는 자연스럽게 북한 국적과 중국 국적으로 갈라지게 됐다. 그것이 나중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지 당시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때는 북한의 경제력이 좀 더 나을 때라 중국 사람이 된 이들은 북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 건너편 훈춘에선 개가 쌀밥을 물고 다녔지만, 이쪽 강변 사람들은 무리로 굶어죽었다.


이전에 헤밍웨이의 심경을 알아보자는 취지에서 독서모임에서 단체로 서울경마공원을 간 적이 있다. 도박을 매우 싫어하는 나는 거의 반강제로 끌려가게 된 셈인데.. 얼마나 싫었냐면 거기 가서도 마권을 구매하지 않았다.

헤밍웨이에 대해서 뭘 느꼈는지는 둘째치고,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선택적인 분노조절장애 이야기이다. 경마하는 인간들(옛날옛적엔 마쟁이라 부르지만 지금은 말딸이라 부르고.. 뭐 아저씨든 할아버지든 청년이든 거기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이 내가 학생알바인줄 알고 욕을 오지게 박아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이리저리 밀치고 언성이 높아지더니 결국 자기네들끼리 주먹질을 했다. 그들의 충혈된 흰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또 하나는 마트에서 일했을 때이다. 정규직 파견직 구분없이 일했지만, 정규직들은 파견직보다 월급을 더 받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걸핏하면 파견직들에게 정규직으로 취직하라고 권했다. 그러던 어느날, 정규직들의 근로시간이 줄어들었다. 이건 사실상 정규직더러 근로를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뒤늦게 투잡을 하라고 회사에서 권유했지만 어디서 사람을 구해야 투잡을 하지.. 어이가 없던 건 파견직의 월급도 같이 줄었단 것이다. 본사에 전화하니 매출 탓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마트 정규직들의 눈치를 봤던 것 같다. 그 때부터 파견직들을 보는 정규직들의 눈이 싸늘했고.. 여러가지 이유로 많은 정규직과 파견직이 퇴사했다. 나름 그 시골에서 굉장한 광경이 벌어졌다. 여자들은 크게 울면서 어떻게 가족을 먹여살리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중에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모 회사가 아예 정리해고를 한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이제 노조가 시위하고 대한민국이 들썩일 것이냐? 난 아니라고 본다. 기껏해야 책임자에게 하소연하다 끝나겠지.

이 두 에피소드의 공통점은, 그들이 삶의 부조리함에 대해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살면서 침묵하는 법, 모르는 척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침묵이라고 해서 편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저항은 더더욱 괴롭다.

한 번 용기를 내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서나 그렇다. 삶은 그 다음이 있다. 그럼에도 저항할 땐 굉장히 극단에 몰려있는 경우다. 시장길 한복판에서 사람이 굶어죽어 아무렇게나 나뒹굴 때, 안전하다고 느껴진 성당 등의 공간에서 남자 등이 여자아이를 화장실로 끌고 가 겁탈하거나 혹은 군인이 민간인을 사람이 아닌 개처럼 부릴 때, 우리는 위기를 느낀다.

탈북민들은 북한의 입장에선 당에 대한 배신자나 다름이 없다. 탈북민을 싫어하는 한국 민간인 중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과격하다.', '너무 북한을 싫어하는 것 아니냐.' 쓴 웃음이 지어졌다. 도로에 돈이 떨어져있는지 찾아볼 때, 직업도 구해지지 않고 먹을 것도 다 떨어져 이전에 전화했던 그 남자에게라도 몸을 팔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 우리는 악밖에 남지 않는다. 예술적으로 시위할 때가 아니라고 도련님들아. 바다에 살든 대도시에 살든 일주일 굶으면 누구든 그렇게 된다. 꼴사나운 모습이지만, 그 모습이 모여 권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개나소나 우울증 걸렸다고 주장하지 말라던 어느 심리학자의 처절한 일갈이 생각난다. 어떤 것이 선하고 악한지 구분하기 어려운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이다. 이 사상의 최대 약점은 특정 집단이 매우 강력하게 한쪽 사상을 형성해낼 때, 외부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운빨이다. 그걸 쉽게 입밖으로 낼 수 없는 이유는, 그걸 쉽게 입밖으로 내는 부류가 이 정도까지도 생각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비겁하게 도망친 자신의 전날에 대해 스스로 거론하기 부끄럽거나.

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도 열심히 일하면 OO할 수 있어요!"같은 같잖은 개소리에 절대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적당히 서로를 속여나가면서 건강하게 살아남읍시다, 제군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