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7 - 1941-1945 밤이 길더니… 먼동이 튼다, 완결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 시리즈 7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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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독일 항복 후 3개월 내에 참전하겠다고 공언한 스탈린은 이미 대규모 병력을 극동으로 이동시켰고 일본의 희망과 달리 1945년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로 응했다. 직후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이 투하되었다. 2개의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사람은 1945년 말까지만 해도 21만 명에 이른다.

 

 

 

이 사진이 팻맨 모에화라고 널리 알려져 있는데 제대로 된 밀덕에게 물어보니 사실 리틀보이라고 한다. 폭탄 모양이 팻맨은 좀 뚱뚱하고 둥글고 리틀보이가 잠수함형이라나. 근데 얘네 이름 정말 왜 이래 ㅋㅋ 첫번째로 떨어뜨렸단 에놀라 게이()도 그렇고 뭔가 이상하다고; 아무튼 원자폭탄 모에화한 건 사실인듯 일본도 정상이 아냐..

 

각종 과거 폭로 사건들을 보다보면 가해자들에게서 일제시대 친일파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그당시엔 이리 될지 몰랐고, 그땐 좋았겠지. 그래도 될 줄 알았겠지.

그리고 현재 밝혀져도 욕은 먹지만 제대로 처벌받는게 드물다는 것도 비슷한 느낌. 그러고보니 공무원시험이나 수능에서 정말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였던 사람들의 작품 많이 나오더라. 모르고 문제를 푼 것도 있고 일부러 구해서 본 작품도 있는데 이제 이 책을 봐버린 이상 구역질나서 다시는 국어시험 문제는 쳐다보지도 못할 거 같다. 거 친일파 인간들의 작품을 시험 문제로 사용할 거면 출제할 때 시험지 옆에 친일파라고 좀 크게 써 넣읍시다. 나같은 사람이 시험지 찢어버리고 시험장 박차고 나갈 수 있게.

 

 

갈홍기 1906~1989

 

종교인, 정치인, 친일 반민족 행위자. (...) 1931년 개릿신학교 졸업 후 노스웨스턴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1934년 시카고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43년 일본 기독교 조선감리교단의 연성국장 및 상임위원으로 임명됐으며 학병 권유 활동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의 감리교 대표를 맡았다. (...) 1951년 한일회담 대표, 1952년 외무부 차관, 1953년 공보처장을 맡았으며, 1956년 대한농구협회장, 1957년 동명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아무래도 이 책을 재미있게 보는 비법은 독립운동가보단 친일파를 찾아보는 것 같다. 근데 이게 정말 재밌음 찾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름 ㅋㅋ 아무래도 친일파에 대해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다보니 그런가.

여기서는 기독교만 소개했지만 책에선 불교도 천주교도 모두 다 친일을 했던 걸로 나온다. 사람들은 사회에 위기에 닥치면 종교가 위안을 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종교가 더 심하다.

 

권혁조 1923~2002

 

해방 후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오부자, 죽자니 청춘 살자니 고생, 월하의 공동묘지 등 다양한 작품을 연출했다.

 

 

 

예전에 전설의 고향을 학생들에게 틀어줬더니 애들이 한바탕 웃으면서 귀신이 너무 웃기다고 했다던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지금도 그러려나? 난 근데 월하의 공동묘지 처음 봤을 때 진짜 무서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많은 유교국가 여성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지만.

 

김준엽 1920~2011

 

학자, 한국광복군. (...)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된 이후, OSS 훈련 정보파괴반을 수료하고 광복군 국내 정진군 강원도반 반장에 임명되어 작전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1949년 고려대 사학과 교수가 됐고, 같이 광복군에서 활동한 장준하가 만든 사상계의 주간을 맡기도 했다.

 

 

 

정진군 공부하면서 책 읽는 중인데 여기서도 정진군이 나오니 기분 묘하다 ㅎㅎ

 

1942년 5월,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가 결정된 것이다. (...) 총력연맹을 중심으로 한 설명회가 각지에서 열렸고, 강연회, 반상회, 소책자, 라디오방송 등을 이용한 선전이 뒤따랐다.

 

 

 

이 이후부터 징병제와 카미카제를 장려했던 사람들의 글과 문학작품이 쭉 이어진다. 좀 역겹지만 나는 재밌었음.

 

노수현 1899~1978

 

화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 (...) 1921년 동아일보사에 입사, 미술부 기자를 담당했고 1923년 조선일보사로 옮겨 네 컷 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를 수차례 연재했다. 1941년 잡지 신시대에 일제의 시국 생활 규범과 총동원 체제에 대한 호응을 내용으로 하는 중편 만화 멍텅구리를 여러 차례 연재했으며, 1942년 황군 위문 부채 그림을 조선총독부에 헌납했고, 18~19세기 일본에서 유행한 남화의 연구, 발표를 목적으로 조선남화연맹을 조직, 제1회 남화연맹전람회에 참여했다. 당시 출품작 수익금은 모두 일본군에 헌납했다.

 

 

 

요즘 일제시대 지어진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고 새롭게 조명도 받았다고 하지만 이 책 보면 그 시대엔 거의 친일파들이 그렸던 것 같은데 ㅠ 시집 이야기이지만 해방 때엔 예술 작품을 불질러서 증거를 말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안타깝다. 애초 왜 그 재주로 친일이 내용인 작품을 썼을까. 광복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님 그림을 그릴 돈이 없어서? 그런데 수익금은 또 왜 죄다 일본군에게 주냐 그것도 아깝다 ㅠㅠ 이건 명성을 위해서인가.

 

여운형은 1929년 상하이의 야구장에서 체포되고 국내로 송환도어 재판에 넘겨졌고 3년 형을 살았다. 출옥 후에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맡아 짧은 시간 안에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버금가는 신문으로 키워냈다. 신문사 사장 생활은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끝이 났다. 이후 그는 수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정세를 살폈고, 단파방송까지 접하며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생각을 주변에 발설했다가 투옥되었다. 쇠약해진 몸을 걱정하는 가족, 주변의 권유에 7개월 만에 전향서를 쓰고 석방되었다.

 

 

 

이 시국에 어째서 야구장에 있냐면.. 몽양은 자기 자신의 신체적 능력을 너무 과신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암살도 그래서 허술하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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