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5일, 길바닥 여행 - 내가 그은 선 하나 그 길을 쓰다
박수 지음, 류정아 그림 / 푸르름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나만의 곡을 쓰기 위해 뮤지션을 꿈 꿔 왔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난 시간 무수히 많은 곡을 연주했는데 왜 난 아무 곡도 쓸 수 없는 거지? 도와줄 거라 믿었던 성실함은 꼬여버린 기타줄이 되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방황으로 인해 대학생활은 의미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래

놓자.

 

기타를 다시 잡기 위해 잠시 손에서 내려놓자는 결론을 내렸다.

잠시 쉬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 밑에 일렉기타와 스피커를 연결하는 줄에 묶여있는 사람이 그려져있다; 좋아하는 일을 못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던 듯하다. 두루 해봤는데 예체능은 성실하다고 다 되는 게 아니더라. 오히려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이 글쓴이가 쓴 글에는 몇몇 문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빈곤해도 여행은 해라'인데, 그게 미담이 되는 건 썩 좋은 문제가 아니다. 자기가 돈아끼고 고생하면서 여행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OK이다. 다만 남의 선의에 기대서 민폐끼치며 여행을 왜 한단 말인가. 자기 짐 팔고, 현지에서 단기로 일하고 대가를 받는 정도라면 모르겠는데 구걸(버스킹 포함)과 대책없는 히치하이킹 등은 은근 민폐이다.

자기 힘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가다가 중간에 누가 선의로 태워주거나 밥을 얻어먹거나 교류하는 것이야 좋은데 다른 수단 없이 남에게 전적으로 기대는 상황을 만들거나, 도움은 반 강요하듯한 상황을 만들고 본인 혼자 자뻑에 차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남성으로서 생각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다. 이혼을 쉽게 생각하라 하는데, 과연 여자가 이혼이 쉬울까? 애 키워야 할 수도 있고 취직도 어려울텐데 뭔 소리야. 먹고 살아야 여행이든 뭐든 할 수 있지.

 

근데 솔직히, 난 이 사람의 여행 얘기보단 돈 쓰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애 안 낳고 결혼도 안 할 거면 굳이 돈 모으려고 아등바등할 필요도 없으니 그냥 하루 벌은 거 하루 다 쓰면서 좀 근근이 살아도 되잖음?

나이가 들어서 직업 구할 게 걱정되면 돈을 모으느라 골병 생기지 말고 투표 좀 잘하시고요. 크게 다친 건 본 적 없지만 정신병원에서 다 날리는 분들 많이 봄.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사람들 의식이 점점 선진국화되는 건 좋은 현상이라 본다. 코로나19가 발생하고 나서는 오후 10시에 가게가 무조건 문을 닫게 되니 아예 유럽처럼 이 현상을 장기화하자는 이론도 나타나기 시작했고. OECD가 그렇게 좋으면 우리도 좀 선진국 사람들처럼 살아보자. 등수 따지는 단계에서 좀 벗어나자고.

 

 

이별의 술잔을 기울일 겨를도 없이 더 쓴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여윳돈에 은행 대출까지 더해 투자를 했는데 사기를 당했다. 징역 몇 년으로 그 큰 돈을 퉁친 걸 용납해 준 이 세상이 너무 야속했다.

 

스물아홉.

빚 4000만 원.

 

이별의 아픔과 함께 빚쟁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누군가 들을까 봐 라디오 볼륨을 최대로 높인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목놓아 울었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내가 눈이 안 좋아서 라디오를 듣는 것도 있지만, 우울할 때 라디오 들으면 그나마 괜찮더라. 유튜버들 보다보면 나보다 잘생긴 것들은 그것들 대로 짜증이 나고, 나보다 못생긴 것들을 봐도 '이들같은 애들도 유튜버로 성공했는데 나는 뭐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등 뒤로 20kg, 앞에는 8kg, 옆에는 기타까지 합이 30kg.

중국 천진행 배를 기다리던 내 여행의 첫 모습이다.

58kg인 내 몸무게의 절반이 넘는 짐들에 매달리고 나서야 드는 생각,

 

전쟁 나가니?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베어그릴스 시리즈를 시청했다.

주인공이 세계 오지를 탐험하면서 야생에서 생존하는 법을 몸소 보여주는 리얼 다큐였다. 이 시리즈를 여러 번 보면서 세계 일주를 향한 마음의 준비를 굳게 다잡았다.

당시 'REAL-explorer'라 여행자 명함에 새겨 넣은 것만 봐도 세계 여행을 향한 마음가짐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베어그릴스가 사람 여럿 망쳤네.. 주작도 일부 있다더니.

 

그곳에 있던 낡은 가구와 그림, 집안 곳곳에 있던 아기자기한 공예품들은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의 작품이었다. 젊었을 적부터 취미로 만들어 온 수백 점의 작품들이 집 안 구석구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젊은 날의 추억이 묻어 있던 식탁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 시절 이야기를 듣는다. 세월의 빈 공간을 본인의 것으로 채우며 살아오신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 같다.

 

할아버지 주연의 영화 한 편이 끝나자 마가렛 할머니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방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세 평 남짓 되는 할머니의 작업실이다.

최근에는 시력이 좋지 않아 예전만큼 작업하기가 어렵다고 하셨지만 방에는 여전히 작업의 온기가 느껴진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면서 후원 활동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카드 한 장 한 장에는 후원 아동을 향한 마음이 고이 담겨 있었다.

 

 

금손들 부럽 ㅠ

 

나는 장난감을 조립할 때 시작부터 끝까지 설명서대로 따라하는 아이였다. 항상 상자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 완성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 당시 설명서는 나에게 가이드를 넘어선 정답지였다.

 

여행 초반 가이드북은 장난감 조립설명서 같은 존재였다.

적혀 있는 모든 것을 해야 그 여행이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 할수록 가이드북을 따라 여행하는 것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왠지 모를 공허함만 남을 뿐 이었다.

가이드북에 없는 곳을 여행할 때면, 아는 곳이 없는데도 마음은 편했다.

 

 

요새는 같은 작품인데도 TVA판과 극장판이 나누어져서 나오기도 하니, 가끔 애니보는 순서에 대해서 물어보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러나 애니 보는 순서는 대체로 사람마다 다르다. 제작연도 순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작중 내 시간과 연관짓기도 하고, 혹은 사건의 인과관계를 맞추어서 보는 사람도 있다. 나처럼 극장판은 취향이 아니라서 왠만하면 아예 안 보는 사람도 있겠지.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굳이 애니메이션 보는 순서를 정해주지 않는 건, 시청자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려는 배려이다.

 

설상가상으로 다음날 도착할 때부터 떠나기 전까지 옐로우나이프의 하늘에는 구름만 가득했다. 4일 내내 오로라는커녕 밤인지 낮인지 시계를 확인해야 알 수 있을 정도로 햇빛 한 줄기조차 들지 않았다. 자연 현상은 신의 영역이기에 나는 매일같이 인터넷으로 기상상태를 확인하고 커튼을 들춰서 하늘을 쳐다보는 일밖엔 할 수 없었다.

 

 

결국 집엔 못 가고 며칠 거기서 일을 한 후 오로라를 봤다는데 난 그렇게까지 여행을 해야하는지 이해가 안 감; 역시 난 여행 안 좋아하는 듯(...)

 

잠시 머문 곳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건 단지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공유했던 누군가가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내게 터키는 더 이상 역사적 유물이 묻혀 있는 오스만 제국의 땅이 아니라 히치하이킹과 카우치서핑을 하면서 만든 인연의 끈들이 곳곳에 놓여있는 추억의 땅이다.

내 친구 에르뚜르가 있는 곳이다.

 

그곳엔 나의 친구가 있다.

그곳엔 '당신'이 있다.

 

 

솔직하게 자기 과거 얘기를 꺼낼 수 있어서 친해질 수 있다고. 그런데 이것도 결국 무임승차처럼 다시는 못 볼 사람들이니 저지를 수 있는 일 중 하나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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