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고
이생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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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찬 선생님 중에서

ㅡ통화 내용

 

황금찬 선생님은 강원도 횡성에 계시다

서울 계실 때는 한 달이 멀다 하고 전화 주셨는데

반년이 지나도 전화가 없다

수소문 끝에 전화 걸었다

(...)

'반갑습니다. 박희진 시인도 잘 있나요?'

 

ㅡ그분은 떠난 지 2년이 됩니다

(...)

'다들 가네요. 올해엔 누가 갈려나'

하고는 흐느끼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인투커피에서 회초리를 낭송하다가 자주 우셨다

 

 

아무래도 회초리는 어머니가 드시니 대충 시의 내용이 뭔지 다들 아실 것이다.

 

시집은 대체로 내용이 쉽다. 시인도 대놓고 쉽게 시를 쓰며 그 방법밖에 모른다고 하신다. 굉장히 솔직하게 자신의 삶에 대해 시에 탈탈 다 털어놓는 분이신듯. 테마를 나누지도 않으시는 것 같다. 이 시 다음엔 황금찬 선생님이 몇 세이신지에 대한 부가설명이 나오는 시가 있고, 어떤 시에선 하루란 단어가 나오는데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시 제목이 하루고 이런 식이다. 일본에선 100세가 되어서 시를 쓰신 분이 계신데, 약간 그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좀 더 표지를 가볍게 하고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를 써도 될 것을 딱딱한 커버에 시퍼런 커버를 왜 택했는지 궁금하다. 무연고는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텐데. 일본처럼 일러스트 안 쓰면 애국자가 되기라도 하나 ㅡㅡ 혹시 저자 분께서 커버를 택하셨다면 연륜이 연륜이다 보니 죄송한 일이지만. 그렇지만 책 읽는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로 시를 어렵게 생각한단 편견도 있는데.. 이렇게 만들어버리면 좀.

 

 

우선 중에서

 

우선 일어나면 바깥 날씨부터 확인한다

그건 핸드폰 몫이다

ㅡ8도 9분

꽤 춥다

카톡은 온 것이 없고

문자도 없다

그리고 실내 온도를 올린다

세탁기가 얼까 봐 파이프에 타월을 더 감아준다

그리고 내게도 두꺼운 옷을 입혀주고 더운 물을 마신다

입속에 물이 들어가니 마른 골짜기에 첫물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음악은 이연실의 소낙비(밥 딜런의 노래)를 늘 준비해놓고 있다

죽음의 준비는 미비하다

 

 

 

 

다만 시인이 짧은 시를 선호하는지, 한 문장 한 문장이 오래 생각해 볼 만한 테마들로 이루어져 있다. 속이 알차다고 해야 할까.

시인은 90세를 앞둔 분이시다. 그래서 노인이 되었을 때 하는 일이라거나 노인이 된 후 벌어진 사건에 관한 걸 시의 토대로 하고 있다. 어르신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시가 아닐까 한다.

하루

 

80대 후반의 하루는 소중하다

그 소중한 하루를 내 몸 푸는 것부터 시작한다

일어나자 실내를 걷고

걷다가 의자 앞에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물을 마신다

그러면 4시 30분에 신문이 배달된다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본다

그중에 문화 특히 글쓰기에 마음이 끌리면 줄 치며 읽는다

신간 서적이 소개되면 다시 인터넷에 들어가 그 책의 골격을 살피고

교보문고나 영풍문고로 간다

그 책을 만져보는 것이 성적 스킨십이다

그리운 사람의 손을 만지듯

하지만 이것은 발의 덕이다

나의 스킨십은 99% 발에 의존한다

 

 

이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 막 추석이 지났는데 하루하루 점점 추워지는 게 피부로 와닿네요. 한동안 안 생겼던 염증이 몸에 돋아서 새벽부터 좀 쎈 약을 먹었습니다. 나이 들어서 미끄러지면 사망할 수도 있다던데 저도 요새 겁나네요(응?) 모두들 다리 잘 간수하시길.

늙는다는 거 중에서

 

KBS1 아침마당에서

박상철 교수의 강의 '슈퍼 노인을 꿈꾸다'를 들었다

은근히 구미가 당긴다

'쥐를 실험한 결과 젊은 세포만 죽고

늙은 세포는 죽지 않더라'

그는 이 말에 힘주어 말한다

늙으면 죽어야 하는데

늙어도 죽지 않더라

노화는 살자는 변화다

나이에 상관없이 사는 거

그냥 끝까지 살아버리면 된다

살아버리면 된다

 

 

일단 이 시인은 은근히 자학적인 말투를 쓰면서도 현세에서 사는 게 제일 좋다는 주의이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생생한 힘을 나눠주고 있다. 그나저나 저 이야기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 저기서 끊기네 ㅎㅎ

 

하루 한 편의 시

 

살아서 완성이란 없는 법인데

시 한 편 써놓고 완성했다고 큰소리치니

날아갈 것 같다

 

오늘도 하루 한 편의 시가 완성되어

블로그www.islandpoet.com에 올렸다.

시 쓰며 산다는 거

자랑해도 자랑해도 부족하다

 

'아무리 고독해봐라'

하고

큰소리쳤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생 시절까지 쭉 왕따를 겪었었기에 동창회는 가지도 못하고, 독서모임은 자꾸 내가 싫어하는 자기계발 책만 읽자고 해서 갑분싸시켜버린 후 나와버리고, 일터에서 친구 사귀지 말자고 결심한지 오래된 나로서는 페북에서의 관계가 그나마 가장 오래된 관계가 아닐까 싶다. 심지어 블로그는 오는 사람도 별로 없어 하트만 달아주는 것으로도 매우 반갑고, 자신의 블로그를 홍보하는 댓글이라도 달아주는 사람은 더욱 반갑다 ㅋ 육지에서든 섬에서든 고독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블로그랑 SNS가 남아있다는 가정하에 아무래도 평생 취미로 남지 않을까 싶다. 책 읽고 리뷰쓰는 게. 늙으면 돈 별로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더라. 책은 도서관에서 읽고, 리뷰쓰는 데엔 다달이 핸드폰 비용만 내도 충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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