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시인동네가 주목하는 올해의 시인들 101
시인동네 편집부 엮음 / 시인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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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피리

 

길상호

 

오므라든 손

빈집처럼 체온이 사라졌던 손

 

악보에서 떨어진 새를 주워

그는 손에 넣고 키웠다

 

반대편 손 잔손금까지 긁어모아

새를 위해 촘촘히 깔아주었다

 

밥물을 받아먹고

똥을 싸고

잠을 자면서

새는 끊긴 그의 손금을 이어가며

하루를 연주했다

 

오므라든 손 안에서

손금 가지들이 울창하게

다시 숲을 이뤘다

 

 

참으로 오랜만에 읽는 서정시이다. 오래 못 보다가 만나는 것들이 이렇게 반갑다.

 

인상적인 시인들을 꼽아놓고 나서 살펴보니 대다수가 이미 시집을 읽은 적이 있는 시인이었다(...) 특히 2013 현대시라는 책에서 접한 분들이 많던데, 그 시들이 정말 인상적이긴 했나보다. 특히 성동혁 시인은 2년 사이 정말 성장한 티가 나는 분이었다. 다 읽고 나서도 왠지 모를 여운이 남는달까. 딱히 작은 성기란 구문 때문만이 아닙니..

파리의 자살가게 중에서

 

김상미

 

죽고 싶은데 파리까지 가야 하나요?

이곳엔 왜 자살가게가 하나도 없나요?

죽지 못해 산다는 건 너무 가혹해요

성미 급한 사람들은 오래 전에 벌써 다 죽었는데

찬송가 493장을 펼치고도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보이지 않아

비탄의 금잔화 한 다발을 사들고 오늘도 꾸역꾸역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그들에게 파리행 티켓은 너무 비싸고 아득해요

죽음이 간절해질수록 삶은 더욱 쓸쓸해지고

죽음의 형식 또한 마지막 잎새처럼 갈수록 초라해져요

이곳에도 자살가겔 만들어줘요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내 가슴이 울고 있어요  

 

 

 

 

나도 이 시의 발상에 찬성하는데, 병원에서 누워 있다가 죽는 건 싫고, 그렇다고 해서 해외여행도 가기 싫어하는데 굳이 파리까지 이동하는 건 사양하기 때문이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이지만, 그걸 시로 옮길 수 있다는 게 창의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저 가게에서 자살하면 고통은 없는 것일까.

 

귀향 중에서

 

서효인

 

우리는 처음에는 비계를 떼어 내고 살코기만 먹다가 나중에는 족발을 뼈째 들고 발라먹었다. 서울 사람들이 무식하다고 손가락질 했다. 족발 같이 짜증난다고 했다. 족발 같이 끈질기다 했다. 개업식에서 어른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외삼촌의 아들은 말을 못했다. 불편한 침묵을 깨려 외숙모가 아들의 등짝을 쳤다. 등짝을 치고 놀라 울었다. 무식하게 울었다. 사투리를 들키면 장사에 좋을 게 없다 하였다. 돌아가는 차편에 외삼촌은 랩으로 꽁꽁 싼 족발을 건넸다. 그날부터 우리에게서 풍기기 시작한 불편한 냄새가 몇 번의 올림픽이 지나갈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외삼촌은 고향에 내려와 다른 장사를 한다. 외삼촌의 아들은 이제 말도 하고 감탄도 잘하는 청년이 되었건만, 족발은 겁나게 싫어한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서울에 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교양인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기는 듯하다. 진짜 친구는 서울이 아닌 다른 '시골'에 초대할 때 진가가 드러난다. 나는 대체로 그 인간이 사투리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기분 나쁘게 실실거리기 시작하면 그 이후부터 친구 관계를 접는다. 대체로 그것은 같이 술 마시기보다 훨씬 더 뛰어난 친구 가리는 방법이라 본다. 요즘에는 심지어 인천 사람이나 경기도 사람들도 자신이 무슨 서울 촌놈인 마냥 행동하던데 ㅋ 그럴 거면 놀러오지 마 시바.

이 잗다란 나라에서 어떻게든 서울에 입성하려고 아둥바둥하고 잘난 지역 못난 지역 가르는 것도 어찌보면 참 웃기는 대목.

화장실 카니발 중에서

 

석지연

 

거울 앞 치장하는 여인들은 천박함을 자처하지

비밀을 까발리고 서로를 저주해야 그들은 진실해진다

새로 단장한 헤어스타일인 양 음모를 뽐내는 발푸르기스의 마녀들

빗자루 같은 속눈썹을 붙이고 마취제를 얼굴에 찔러 넣어

뼛속까지 가면이 되는 거야 인생은 상스럽다 못해 거룩해지는 것

면사포 쓴 신부여, 그대는 수백 번의 섹스 끝에 첫 경험을 성공적으로 연기할 것이다

 

어릿광대들의 행렬에 폭소가 터지는 무대야

배를 움켜잡고 상상임신을 흉내 내는 무언극에

아랫도리 단추가 튕겨 나가도록 배꼽이 빠질 것 같지

바지가 줄줄 흘러내릴 거야 그러니 본 공연에 앞서 착석해주시길

오줌통에 맥주를 가득 채워 넣고 마실 것! 마실 것! 마실 것!

 

나는 한쪽 벽에 갈겨써진 연설문을 발견한다

이 순간 왕좌를 차지한 내가 외치지 장기매매합니다!

광대들의 광장, 대관과 탈관이 뒤엉키는 카니발이야 카오스야  

 

 

뭔가 관능적이면서도 고어가 연상되는 독특한 시였다. 술과 관련된 시는 많았지만 특히 이 시가 좋았다. 강소주 예찬하는 시도 있던데, 강소주 마시고 목욕하겠다고 화장실 들어가다가 뒤로 고꾸라져 한 방에 가신 분 봤습니다 여러분 이런 거 좀 자제여;

그런데 난 아직도 소주와는 친하지 않음. 언젠가 막걸리처럼 급친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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