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정원
다카야스 요시로 지음, 임나현 옮김 / 북랩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폐에 대한 잡감 중에서

십수 년 전 아들이 다친 때를 돌이켜보았습니다

아이가 아파하는 만큼 나도 괴로워하다가

소망과 불안감으로 쓰러진 일이 있습니다

다 자란 아들이 어느 날 천연덕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폐를 끼쳤습니다."

어른이 됐다는 증거의 겉치레 말에

"천만에."라고 잘라 대답했지만

사실 털끝만큼도 아들에게는

폐를 입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위선은 없을 것입니다

굳이 '폐'라고 하자면

이것이야말로 무상의 그것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어떻겠습니까

가령 '호의'나 '자애' 아니면 '사랑'

 

사실 이 구절 때문에 이 시집을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구절, 그리고 겸손함과 점잖음까지. 이런 아버지를 둔 아들이 부럽다. 그러나 이 시집의 대부분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 아들 아키오보다는 화자의 어머니 이야기이다.

 

서막 중에서

 

오늘 아침 그렇게도 격노하시던 어머니는

정원에 핀 국화꽃을 이상하리만치 반기시며

온 가족을 불러댑니다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때였습니다

너희도 가끔 여행도 좀 하지 그러느냐고

아주 너그러운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어머니의 노화가 가시화된 요 몇 해

함께 영화 한 편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그걸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우리 집 젊은것들은 외출을 싫어한다며 흐뭇해하십니다

입소문을 일삼는 주변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돈이 남아도니 얼마나 좋으시겠어요."라며 추어올립니다

(...)

어머니는 지금 툇마루의 등나무 의자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 가족을 소중히 지켜 오신 어머니입니다

병원에서 뇌 단층 필름을 보여 줄 때까지 나는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모기의 날갯소리만큼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으로 평생을 보내고 고등학교 교감까지 오른 글쓴이는 평범하게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가족들과 사소하게 투닥거리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 시집의 부재처럼 알츠하이머가 폭풍처럼 어머니를 덮친다.

 

일러스트도 하나 없는 이 시집은 처절하고 절절하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일어났던 사건, 그리고 자신과 가족들의 절망을 글쓴이는 꾸밈없이 시에 담아내고 있다. 잠시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하던데, 정말 이런 일로 힘들었던 분들에게는 트라우마의 트리거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이 시에서 아름다운 것이라곤 단 하나, 어머니가 평상시 가꾸셨지만 지금은 글쓴이와 그의 아내가 어머니를 위해 가꾸어야 하는 정원 뿐이다. 그나마 저자는 어머니가 가꾸던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유기체 중에서

 

예전 어머니에게서 피어오른 증기의 흔들림은

우리의 눈에 자줏빛으로 반짝였습니다

배곯은 어린 제비가 주둥이 열고 아우성치던 그 해 질 녘

어머니의 등에 비치던 노을은 당신의 빛깔이 되었습니다

(...)

의식의 붕괴라는 현상은

단순히 뉴런의 노쇠를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유기 생명체의 숙명입니까

당신이 지금의 당신으로 되기 위한

무엇을 잃은 결과입니까

활기차던 시절의 당신 목소리가

무기질 카세트에서 재생할 때

회의감 속에 옛날이 허무하게 비틀거립니다

서녘 하늘에 물들어 가는 무기질의 저녁놀이

툇마루에 앉은 나와 어머니를 제각기 비춥니다

저녁놀 빛에 물들어 가며

유기체의 유는 바로 유한의 유

그럼 무기질의 무는 무한의 무일까

그런 것을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쎄 말입니다 사람은 좋았던 경험보다 안 좋았던 경험에 매달려 끙끙대기 마련이라. 그런데 시를 모은 날짜는 2002년인 걸 보니 이 시를 지은 날짜는 더 이전인가 보다. 카세트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네.

스타더스트 중에서

 

시계가 세 시를 알리는 스타더스트를 연주한 때입니다

"무슨 벌을 받은 건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시는 걸까요

할 말을 찾지 못해 못 들은 척

나는 시계만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앞길을 초등학생 한 무리가 지나갑니다

새된 목소리는 오르골처럼

금세 삼거리 건너로 멀어져 갔습니다

"아키오가 돌아왔나 보다"

예전의 웃음 띤 그 얼굴로 어머니는 돌아왔습니다

손자 아키오는 지금 대학생입니다

어머니의 시계는 십 년 정도 고장 나 있었습니다

 

스타더스트도 노래 이름이었군요. 모르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