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누스 푸디카 창비시선 410
박연준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꽃, 가장 약한 깃발

                

 

                   

봉오리를 열다 좁히다 망설이는 사이


어둠을 빌미로 놓친 사랑이 몇 개


 


들여다보려다 그만 코가 다치네


향기에 엉켜 눈이 머네


 


손등 하나 볼 언저리에 머물다 시들고


내가 당신ㅡ이라 부르던 사내는,


들은, 죄다 남의 남자가 되었다


 


이렇게 깊은데 당신은 왜 시작하지 않을까


 


종은 계속 울리는데


 


모르고 핀 꽃들은


들개의 축축한 주둥이에 물려


사라지거라



 


 

그러고보니 하안동을 아는가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차라리 옆에 밑바닥을 기어다니던 독산동을 아는지 물어보면 아는 사람은 있더만, 어중간하게 가난해서 그랬는지... 아무튼 친가가 거기에 있어서 옛날 대학 다닐 땐 자주 들르고 했다.


거기서 이불 털다 자살하려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동차에 머리부터 박힌 사람 눈동자도 봤고, 교복 입은 채로 놀이터에서 검은 비닐봉지로 본드를 흡입하는 듯 하다가 경찰서로 끌려간 청소년도 봤다. 옛날엔 눈치가 없어서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이야기했는데, 전전전전남친은 자기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죽고 싶다며 허세를 떵떵 부리더라. 실습 같이 하던 학생들은 믿어주질 않았고. 그나마 나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던게 첫사랑이었다. 비행기 정비사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오토바이에 탄 두 커플이 육교 다리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이야기를 했다. 남자는 헬멧 덕분에 골절만 입은 것 같았지만, 여자는 헬멧을 쓰지도 않았기 때문에 뒤로 날아가 머리부터 떨어졌고 뇌수를 쏟았다 한다. 그걸 평지에서 정면에서 목격한 자신은 사흘간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다나. 그녀는 당시 안양 1번가 부근에 살고 있었다. 살다보니 어느 순간 문득 그런 사건을 목격했다는 건 지지리 가난한 지역에서 살았다는 징표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2016년 6월 17일, 강원도 횡성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17세 소녀를 추모하며 쓴 시다. 소녀는 남학생 세명과 함께 어울리다 새벽 3시쯤 일행 중 한명인 남학생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두시간 뒤 9층 창문에서 떨어졌다. 남학생들은 성관계 사실은 인정하나 성폭행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유달리 이별에 관련된 시가 많다. 사람은 살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이별의 기억이 강렬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내 웃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건 상대방 본인의 기억력 문제. 헤어질 때까지 웃는 얼굴을 보여달라는 건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서랍


 


사랑하는 사람아


얼굴을 내밀어보렴


수면 위로


수면 위로


 


네가


 


떠오른다면


 


나는 가끔 눕고 싶은 등대가 된다



 


 

이 시만 읽으면 되게 감성적이란 느낌이 있는데, 이 전에 가라앉은 방이라고 되게 노골적으로 세월호와 촛불시위에 대해 가차없이 쓴 시가 있어서 지금 너무 무섭다;;


그나저나 관점이 굉장히 특이한데, 시인은 세월호 사건을 애도하지 않을 거라면서 그걸 이슈화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었으나 학생들이 당한 고통에는 매우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구제역에 대한 시도 올려져 있는데, 이렇게 대놓고 채식과 관련된 시를 쓰는 시인도 흔치 않을 듯 싶다.

검은 짐승들 중에서


 


화곡동 살 때


기이한 울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 적이 있다


이 새벽, 장화 홍련이라도 환생한 것일까


창밖을 보니 검은 소복을 입은 여섯명의 여자들이


집 앞에 서서 울고 있었다


얼굴에 싹이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손으로 입을 막고 까마귀떼처럼 곡하던 여자들은


한참을 울더니, 발 없는 유령인 듯 흘러갔다


 


죽은 걸까, 누가


죽음은 왜 자꾸 내 앞에 와 엎드리는가


 


창을 닫는데 손등 위로 검은 깃털이 돋아났다


얼굴과 가슴, 등 뒤와 허벅다리까지


깃털로 뒤덮였다 어깨뼈와 고관절이 가까워지고


팔이 물결처럼 펄럭였다


천장이 높아지고 벽이 멀어지고


나는 일곱번째 까마귀가 되었다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시 하나 올려본다. 하이바네 연맹은 현재 보고 있는 중이다. 최근 보자고 결심하지 않았으면 비슷한 점을 발견하지 못할 뻔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