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냄새 시인수첩 시인선 10
이병철 지음 / 문학수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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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라키 술은 라키라키 중에서

 

라키 술을 마시고 라키라키 웃으며 소금 언덕을 걸어 올랐다 기온은 34도 체온은 37도 라키는 40도 오후의 빛이 사막 모래로 넘실거렸고 샌들 위에서 발바닥은 호떡처럼 익었다 술은 언젠가 잃어버린 영혼일까 얼굴만 알고 이름은 모르는 소녀가 라키라키 웃었다 몸속을 떠돌던 술과 여기저기 마구 쏘던 태양이 정수리에서 만나 어질어질 헬륨 가스 목소리로 소녀를 불렀다 소녀의 이름은 기분 체온은 0.5도 나는 전생에 기분을 잃어버린 가엾은 라키라키 이제야 충만한 느낌이 드는군 기분이 웃으면 나도 웃었고 웃음은 올리브나무마다 요란한 풍뎅이를 매달아 놓았다 나와 기분이 팔짱 끼고 라키라키하는 동안 양젖 끈적이는 저녁이 왔다 저녁은 30도 기분은 45도 라키보다 뜨거워진 나는 이러다 죽을까 봐 라키라키 차가운 술을 마셨다 (...) 나는 사라지고 기분만 남아 라키라키 소녀가 여자가 되고 할머니 되는 기분 내 영혼은 소녀 소녀의 이름은 기분



 


 

팟캐스트에서 시인을 본 적이 있는데 말씀을 워낙 재밌게 해서 한참 웃으며 들은 기억이 있다. 그 때문에 시집을 샀는데, 알고보니 페친이 가장 존경하는 시인이었다고 한다.


불조심 포스터라는 시를 보니 유익한 세균이 세상에 있다고 하니까 온몸을 마구 때리던 어른 생각난다. 그런데 대장균이었던 걸 아니까 왜 몸 안에 있다고 이야기를 안 했냐며 또 패고... 생각하면 이래서 스승의 은혜라고 찾지 말고 부모라고 모시고 살지 말아야 한다. 얼른 독립해서 얼굴도 보지 않고 살라고 말해주는 건 쉽긴 하다. 그렇지만 그게 답이다.

 

비의 미장센이란 시도 정답이 없는 생을 나타내려는 게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웨이트리스가 배우 오디션을 간다고 이야기를 하거나 택시운전사가 야간 수업을 듣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들이 자기계발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한다고 대체로 칭찬한다. 그러나 그들이 현실에 좌절해 먹고사니즘을 택할 때 사람들은 그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 비난한다. '명징하게 직조'는 그런 반증 중 하나라 생각이 된다. 사실 99%가 딱히 잘 사는 게 아닌 세상에서 명징이 어렵니 네가 공부를 안 하니 싸우는 게 중요하진 않다. 굳이 계급 싸움이라고 찍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본인은 어떤 스탠스를 취하느냐이다. 상대방에 대한 충고(?)는 그 이후가 아닌가 싶다. 솔직히 난 후자다. 모두까기나 무관심이 아닌, 이 정도 입장은 살면서 당연히 취해야 한다.

 

불과 빨강과 뱀 중에서

 

혀끝의 여름, 혀끝의 겨울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해?

나는 모퉁이들로 우글거리는 마을이 될 거야

불붙은 얼음들이 떠다니는 테트리스도 좋고

 

그건 그렇고, 너는 정말 달다

이빨 사이마다 체온계가 꽂혀 있어

우리는 이제 전염병 창궐한 격리병동이야

비린내 나는 해동생선이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흉한 점괘야

 

서로가 도망 못 가게 불과 빨강과 뱀으로

묶어도 묶어도 아름다운 음악처럼 풀어져버리고

계절이 바뀌어도 도깨비 뿔 같은 종유석만 밀어 올리는



 


 

연애시가 꽤 있어서 의외로 간편하다고 할까. 요새 애니메이션도 그렇고 고의가 아닌데 연애물을 많이 보게 되는 듯. 나중에 집안에 썩혀두고 있는 연애소설 좀 집어볼까?

 

해변의 여인 중에서

 

어깨에 멘 카세트 라디오에선

해변의 여인 야이야이야이야이

죽은 여자 곁을 지나며 한 아이가 외쳤다

 

오오 씨발 시체!

 

깜짝 놀란 아이들은

씨발 시체를 뒤로한 채 펄로 달려갔다

반나절 게를 잡다가 여자애들을 잡다가

게 몇 마리와 여자애 몇을 데리고

씨발 시체가 있던 자리를 지나 해변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밤새 고기를 굽고 술을 마셨다

삼겹살 연기 지글거리는 밤하늘에

싸구려 폭죽과 웃음을 번갈아 터뜨리며

여자애들의 오오 씨발 가슴!을 주무르며

해변의 여인 야이야이야이야이

노래를 멈추지 않는 을왕리의 밤이었다



 


 

... 뭐 사실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건 이런 시이긴 하지만. 해변의 여인도 그렇고 감각적인 시를 잘 쓴다. 교훈도 있고. 서평을 보니 앞으로도 쭉 그쪽으로 밀고 나가실 거 같다.

 

흩어지고 돌아온 것이 고작 중에서

 

오랫동안 연인이었던

뼈가 바닷물로 살을 붙여

곁에 눕는다

(...)

너는 두드리면 소리가 나고

손에 쥐면 차갑고 메마르다

감각 대신 기억으로

 

살아 있는 사람

썩지 않는 생일

꿈속까지 파고드는 숫자들



 


 

세월호나 아이들에 대한 얘기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지만 문득 이거 세월호 이야기 아닌가 하는 기묘한 기분이 들어서 올려본다. 이 시 이후에도 이런 작품이 2개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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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 Bible 2019-06-12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4‭-‬5

갈매미르 2019-06-12 22:20   좋아요 0 | URL
요즘 흉흉한 세상이라 더욱더 귀중한 구절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