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되는 꿈 문예중앙시선 47
신동옥 지음 / 문예중앙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엔젤 탱고 중에서

 

썩어 들끓는 냄새를 가리는

후추와 부추와 식초

덜 익은 몸으로 거미줄을 자아

천장을 끌어내려 앉히는

집거미와 국간장과 실고추의

사특한 이종교배

 

달무리에 뭉친 파란 밥찌끼로

당신이라는 잔반과 향료가 몸을 섞어

서로를 으깨고 비비고

(...)

당신의 불가해한 찬장이 나의 섭생을 훈육할 때

당신의 남자는 물고기처럼 싱싱하고 당신의 조리법은 절망학이다



 


 

처음 시를 접할 땐 음식 만드는 얘기거나 러브 스토리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읽어보니 아니었다.

그런데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시이다. 나도 요리 못해서 그러나. 능력과는 좀 다른 이야기같지만 ㅋ


비트 시리즈는 읽을수록 점점 노래가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PTSD에 대해 이렇게 잘 표현한 문학작품이 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화자가 뭔가 삶에 발버둥치는 거 같아 짠하네. (그리고 결말은 엘빈;;; 최근 문학 경향 적응 안 된다. 진격의 거인도 그렇고 왜 이리 다들 꿈과 희망도 없이 찌드냐.)

 

송천동 중에서

 

고기를 구우며 동네 우편물을 대신 받는 맘씨 좋은 생고깃집 노부부의 사전 검열 바지는 호호백발 스머프 할머니들이 재봉틀을 돌리는 수선집에서 찾아야 한다. 날을 세워 시간강사 밥벌이를 나서야지.

개년 쌍놈

싸우며 가을봄여름을 난 앞집에선 치매를 앓는 쌍놈이 개년의 어깨를 붙잡고 걸음마를 다시 배우는 골목

 

한결같이 노인이고 한결같이 어린아이다.

이들의 고통은 봄이 생일이고 모두 추운 겨울 남쪽 나라에서 태어난 것처럼 골목을 돌본다.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개는 개대로 오소리는 오소리대로 누구도 누구를 절멸할 권리는 없다는 듯

우리를 사로잡는 작은 카스트



 


 

제목과 달리 시의 분위기는 그리 화목하지 않다. 우화를 사용하는 시집들이 흔히 그렇듯 사회를 풍자하는 느낌이 있는데 이게 초반에 특히 강하다.


그러나 다른 시들이 몸을 내던져 사회에 저항할 것을 결심하는 한편, 이 시는 훨씬 더 냉소적이다. 빈집이란 제목의 시에서는 높은 데 사는 사람의 굽이 아래에 사는 사람을 짓밟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화자는 밟지 말라고 하지 않고 굽 낮은 신발을 신어달라고 간청한다. 정당한 것을 주장하는데도 어느 정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소시민의 삶을 상징한달까. 아이임을 이용하는 아이들, 아직도 자신들이 어리다 주장하며 정신연령이 어린 노인의 등장은 개혁할 세상의 난이도를 드높인다. 시 곳곳에 숨어든 냉소는 청년들이 지닐 만한 날카로움을 내포하고 있다. 그 그로테스크함이 마음에 들었다. 

 

연해주 1937 중에서

ㅡ증조부 영전에

 

건배, 크고 아픈 나의 인간 친구여 내 고향은 조선 하고도 남양 내 영혼은 긴 그림자를 끌고 저 얼어붙지 않는 바다를 건너네 얼어붙은 내 핀 이제는 거의 연보랏빛 핏속에 움직이는 세포는 작은 뗏목이라네 건배, 아리랑은 아리랑이라는 뜻이고 안녕은 안녕이라는 뜻이고 노래는 노동에 좋고 술은 잠에 좋다네

 

나는 게으른 십장이 되어 채찍을 견디며 탄광에 들락거리다 연해의 항구에 호박돌을 박아 넣다가 핏속에 숨겨둔 뗏목을 꺼내겠네 훗날 나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은 살아 돌아온 나의 곰방대에 머리통이 깨져가며 ㄱㄴㄷㄹㅁㅂㅅ 배워 시인이 될 테고 어느 가을 속초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배를 타고 이곳에 오겠네



 


 

원래 시인이 자기 가족 이야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나 이 시는 진심으로 자신의 가족과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으므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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