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여성들 - 늑대를 타고 달리는
막달레나의 집 엮음 / 삼인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가끔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쉼터의 여성이 놀러 오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여성은 "돈이 없이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라는 말을 남겼다. (...) 연구자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는 세상과 연구 대상 사이에 소통 구조를 만드는 것이며, 소통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는 바로 '이해'에 있다고 생각한다. (...) 우리가 흔히 쉽게 이름 붙이는 '매춘 여성'도 더 이상 사창가에만 머물지 않으며, 한 정체성으로만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여경 체력을 강화시키자는 여론이 화제다. 아니 성범죄 당한 여성 얘기 좀 들어달라는데 왜 체력 강화가 필요해 시험도 남경보다 졸라 어려우면서. 타협할 게 따로 있다 이것들아 ㅋㅋㅋ


공시계 내에선 여경이 어렵기로 유명하다. 공시는 무조건 점수보다 커트라인을 고려해야 하는데, 시험을 보겠다고 하는 모두가 굉장한 인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체력검정 테스트를 똑같이 해야한다 운운하는 것들은 사실 지금 경찰 필기의 기형적인 문제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공무원 시험 문제는 전반적으로 다 이상해서 아무리 항의해도 다들 무시하는데 여경은 심하게 이상해서 여경만 재시험까지 보는 케이스가 꽤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성매매를 하는 여성뿐만 아니라 쉼터에서 일하는 여성과 여경까지 조명한 게 마음에 든다. 경찰이 되어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불안에 떨면서 수능보다 어렵다는 공시에 매달리는 많은 여경 후보들 힘내시길 바란다.

 

또한 이 책은 이런 장점이 있다. 남성들은 여성이 한국에서 차별을 받는다는 주장을 할 때 '펙트 체크'를 하겠다며 주로 통계를 들먹인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여성의 입장을 이해해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성이 되어보고 싶어 여성의 옷을 입어보는 일부 남성들을 비웃는데, 그게 오히려 증거가 된다. 그들은 '너네가 1인시위 피켓들고 난리친다고 세상이 변하냐?'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도 그들도 결국 인간이다. 그 사람이 살아간 환경에 들어가보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사람을 이해한다 이야기할 수 없다. 여성도 마찬가지다. 남성은 여성의 입장을 잘 모르는 게 아니라, 여성의 환경을 겪고 싶지 않으며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는 오히려 여성이 차별을 받고 있으며,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다는 증거가 된다. 이처럼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이 일반 여성에 비해 어떤 차별을 받고 있는지 간접 체험이라도 하기 위해선 이 책이 필요할 것이다.

 

솔직히 조사방법에 대한 평가는 반반이다. 여성들끼리 섹시한 옷을 입고 성산업 종사자로 위장했다는데, 일단 여대생은 뭘 해도 여대생 티가 나고 대학원생은 특히 그렇다. 본문에서도 남장을 하고 다녀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를 한다. 글쓴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지만, 장려할만한 조사방법은 아닌 것 같다. 사실 그게 질적 조사의 치명적인 단점이긴 하지만.

그래도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았다고, 그들이 서툰 탓에 외국에서도 실행하지 못한 조사방법이 개발되었다. 또한 조사 진행자 중 남자가 없다보니 걸즈 토크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측면이 있어, 오히려 남자들에게는 이야기할 수 없는 성산업 종사자들의 내밀한 삶을 추격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수많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남자에게 목매는 여자를 비난하는 게 문제 있음을 이 책은 확실히 지적하고 있다. 남성들이 보이는 거짓된 친절함은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옥죄는 도구이다. 헌팅에 비유하자면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냥꾼'을 비난해야지 그 덫에 걸린 '사냥감'을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근데 그런 경우를 왕왕 본다. 재혼한 여성이 재이혼한다고 비난당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 하필 늑대야? 세상에 타고 다닐 게 얼마나 많은데?" 평소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꽁꽁 숨기며 살고 있는 나는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소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을 보면서, 여성의 때묻지 않은 야성과 자유를 상징하는 이 제목을 왠지 좀 못 마땅해 하며 궁시렁거렸다. 시와 소설에서 은유로 등장하는 늑대나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보다는 델마와 루이스에서처럼 잘 빠진 '오픈 카'를 타고 달리는 여성에 대한 동일시가 내겐 훨씬 익숙한 것이고 제법 그럴싸해 보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난 뒤에 나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이 비유가 그 동안의 내 작업을 설명하는 데 꽤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성들이 그 위험스런 늑대의 등에서 어서 빨리 내리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 책은 제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성 산업에 뛰어든 여성들을 성 노동자라 부르며 그들의 생을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쓴 사람 자체가 워낙 말을 재미있게 하는지라 성매매를 전면 금지하는 데 찬성하던 반대하던간에 낄낄거리며 가볍게 볼 수 있다. 매매춘에 관해서 합법화를 주장하고 있으니 이전에 내가 다룬 매매춘에 반대하는 책과 같이 봤으면 한다. 그러나 재미있는 썰을 풀고 있을 뿐 매매춘을 합법화시키자 주장하는 논리적 이유가 부족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확실히 용감한 여성들이긴 한데 그들이 '용감'하게 보이는 이유가 뭔가? 성매매 직업 자체가 위험하기 때문이 아닌가? 특히 한남들의 여성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이상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분들이 조금이라도 그들의 폭력을 거부하는 기색이 보인다면 어떻게 될지, 매스컴에도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거론되지 않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리고 용감하지 않아도 안전한 세상(상황)에서 살고 싶은 건 내가 너무 욕심이 많은 탓일까ㅠ?

당시 법적 용어에 따르자면, 나의 친구를 '윤락녀'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의 역사에서 어느 한 부분을 함께했던 나로서는 "스스로 타락해서 몸을 망친 여자,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자"라 부를 수 없었다. (...) 이미 그러한 실패들을 증명하듯 그는 훈장처럼 빛나는 몇 개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는 이유로 취직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자영업을 꿈꾸며 이동 도서관, 만화 가게 등을 시도하였다. 그러다 다시 예진이는 보도방이나 티켓 다방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 "왜 예진이와 그 친구들은 제 팔뚝을 긋고 자해를 할까, 왜 그렇게 술을 마시고 약을 먹나, 왜 남자에게 목을 매나......"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는 있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니, 느껴지지가 않았다. 저 멀리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귀를 스쳐 가듯이 말이다.



 


 

대학원을 다니며 성매매 연구자로 활동하던 저자는 동창 결혼식 때 예진이란 친구를 우연히 만난다. 학창시절 친구였던 그들은 예진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예진이 친엄마와 살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만남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예진이 술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성매매를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던 화자는 혼란을 느껴 예진에게 화를 냈고 둘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그러나 살아갈 수록 예진이 살아가는,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 글쓴이는 답사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점점 성매매 합법화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게 된다.


나는 당시 부모 잘 만나 세끼 식사 잘 먹고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공원가서 놀고 그랬지만 1999년도가 새삼 지옥같은 시기였다는 걸 체감한다. 어릴 적 정말 친해서 반지까지 교환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다 쓰러져가는 집에 할머니와 둘만 살고 있었고 이가 몽땅 다 썩어서 앞니까지 다 바스라져가는데 치과 갈 돈이 없었다고. 그 친구 때문에 세상이 힘들다는 걸 겨우 알 수 있었음. 그런 사람들 살리기 위해 온 국민이 금모으기 했지만 그 돈은 다 대기업 손에 들어가고 20~30대들은 현장실습하다 죽어가고 비정규직이 되어 언제 짤릴지 모르는 공포 속에 사실 생계를 꾸리기엔 턱없이 모자란 최저임금으로 살아가고 있지. 방송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 지어주는 것도 아니고 방 구해주면서 자기네들끼리 선한 일을 한다고 박수치고 있고. 자살하려는 사람들 조롱하고 최저생계비 수급자를 페북에서 공개처형하는 전ㅋ문ㅋ가ㅋ까지 있던데 솔직히 너 그때 잘 살아서 아무 것도 모르지? 나는 일단 화자가 성매매 종사하는 친구 만났다길래 책을 봤다. 친구를 만들면 확실히 내 기존 환경과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데 도움이 되는 효과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옷을 입고 화장을 할 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창녀'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긴장한다. 이러한 경계 속에서 오랜 동안 살아온 내가 금기시되어 왔던 경계 밖의 여성으로 변장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비하적인 존재, 낙인찍히는 존재가 됨을 의미하였다. (...) 우리의 웃음 속에는 분명 비하적인 코드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준어'라는 서울 중심적인 기준이 지역 사투리, 북한 말이나 연변 총각 말투를 비하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취급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여성은 꾸며도 꾸미지 않아도 욕을 먹는다.


예를 들어 어머니의 명품 옷을 입고 직장에 가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때가 있었다. 친한 사람들에게 뭐가 그리 웃기냐 물어보면 돈도 없는 20대 여성이 왜 명품 옷을 입고 다니느냐는 것이다. 젊을 땐 티셔츠와 청바지만 입고 다녀도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심히 불쾌했다. 그 옷 입으려고 10키로 뺀 건데 어째서 20대 여성은 돈이 없다 생각하는지(정말로 돈이 없었지만.). 그런데 립스틱이라도 바르는 걸 깜빡하는 날이면 직장에 다니는 여성으로서의 '기본 자세'가 부족하다고 비난을 받았다. 고객에게 필요한 서비스는 친절한 안내가 아닌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내가 어째서 회사의 꽃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30대가 되었으니 이제는 아줌마로 취급될 텐데, 게다가 미혼이라 빨리 내보낼 궁리만 가득일 것이다. 결국 '여성'은 언제나 욕을 먹는 존재인 것이다.

 

어머니가 내가 겪은 일들을 심각한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고 "그런 경험을 해냈다"며 소리 없이 위로해 준 덕분으로 나는 명랑 만화에서처럼 다시 일어났고, 다시 유치발랄해졌으며, 인터뷰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굉장한 위로가 되는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책에 자주 그런 역할로 나오더라. 개인적으론 상당히 부럽다.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어떤 경험이 너무나 억압적이었다거나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다는 이야기는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냉장고 광고처럼 거짓일 수도 있고 참일 수도 있다. (...) 그리고 다차원적인 해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연구 대상자의 상황뿐 아니라 연구자에 대한 분석도 있어야 한다. 그것을 해석하는 연구자 또한 자신의 가족 관계, 대인 관계, 경제 상태 등의 경험과 심지어는 자신의 연애 상태, 자신이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이나 연속극 등에서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 케이스는 연구자 리더가 좀 들이대는 타입이라 부담스러워서 거짓말을 섞었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는ㄷ(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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