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을 지나
허갑원 지음 / 마을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마흔다섯의 문둥이 아줌마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갈망했던

모든 것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큰 바다처럼

가끔 나의 창자만 움직일 뿐이다

 

삶을 노래하기엔

이미 모든 것이 지나가버린 것일까

아니면 나의 육체가

구멍 막힌 통피리가 된 탓일까

 

몸은 배출되지 않은 노폐물로 퉁퉁 붓고

샛바람이 들어오던

오묘한 성감대도 철문을 내린다

 

하수구 펑 한 통을 통째로 붓고

세 시간 있다 녹차 한 바가지로

쇳농을 벗긴 뒤

검고 쓴 보약을 들이킨다

 

마흔다섯의 아줌마

영락 없는 신부전증

동태처럼 얼렸다.


 


 

여태 사랑에 대한 시가 나오다 이 시에서만 분위기가 바뀐다. 뭐지 이 시를 쓸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지 ㄷㄷㄷ;;;


메인 시는 잘 봤다. 근데 공산주의자 목에 칼을 대도 싫다는 거 보면 나랑 안 맞는 남자네 ㅋㅋㅋ 여행 중인 여성 두 명은 왜 그리 스토커처럼 따라다녀 ㅋㅋㅋ 안녕.

 

네가 싫어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다는 혐오는 잠시만의 감정일 뿐이다. 그것은 폭력을 낳을 뿐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며 메시지도 의미도 없다. 오직 사랑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전쟁과 증오밖에 모르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연민을.

생명은 죽음과 엄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삶은 곧 죽음이라 일컫는 까닭은 살면서도 항상 눈앞에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죽은 자는 산 자와 생이별하게 되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가 겪은 인생의 고난, 그리고 그를 이겨낸 강점을 우리가 사랑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삶이 곧 죽음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서도 다시 만나지 못할 관계가 '생이별'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관계가 살다보면 변화하여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다시 이어지리라 보통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다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대부분 잘난척하기 바빠서라 생각한다.

첫째로, 상대방의 감정은 전혀 공감하지 않고 원리원칙만을 내세운다. 대부분 슈퍼맨 타입으로, 자신이 모든 것을 조언하여 해결해준다 생각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이야기하는 상대방에겐 아무 실질적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속상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길 원했을 뿐이다.

두번째로, 상대방의 이야기에서 허점을 찾아내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정치적으로는 유용한 점이 있으나, 개인 상담에서는 최악이다.

결국 일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우선 경청이다. 결국 이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돈을 뿌리며 심리상담을 요청한다. 그리고 현재 대부분은 교육을 받은 자들이라 더이상 쎈언니 쎈오빠는 필요없다. 상대방의 마음을 파악해 맞장구를 쳐주는 것도 비위상 못하겠다면, 한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마음의 위안을 얻을 것이다. 당장 입을 나불대고 싶은 고통(?)은 접어두고 말이다.

 

그런데 칠흙은 칠흑의 오타인가 아님 의도하고 단어를 쓴 건가... 시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실례인 것인가 ㅠㅠ 그런 구절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숲을 마신다던지. 하마터면 술을 마신 걸로 읽을 뻔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설악에 앉아

 

넘치는 햇살 사이로

가을은 다가오고

고추잠자리 성급히 춤추고 있는

설악의 한 마당

 

삶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환희의 극한까지 호흡하고픈

하나의 열망

그것으로 여기에 왔네

 

농부들이 피땀 흘려 가꾸듯

뙤약볕 속에 쌓아올린

안식의 쉼터

 

그 평화의 소리 듣기 위해

여기 왔네.


그러고보니 벚꽃 필 때 설악산 갔었는데 마침 산 정상에는 오랜만에 눈이 얹혀져 있었는데 매우 좋은 풍경이었다. 봄이 짧아지는 만큼 최근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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