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Etienne Balibar: conjectures and conjunctures, Radical Philosophy 97(September/October 1999)
옮긴이 김정한 multitude@naver.com


에티엔 발리바르 인터뷰: 추측과 정세


에티엔 발리바르는 1960년대 초반 알튀세르를 중심으로 하는 탁월한 학생 집단의 일원이었으며, 알튀세르와 함께 {자본을 읽자 Reading Capital}(1965, 1968; 영역 1970; 국역, {자본론을 읽는다}, 두레 1991)를 저술했다. 그 후 그는 프랑스의 주요 좌파 철학자로 자리잡았다. 저서로 {역사유물론 5연구 Cinq tudes du mat rialisme historique}(1974; 국역, {역사유물론 연구}, 푸른산 1989),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On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1976; 영역 1977; 국역, {민주주의와 독재}, 연구사, 1988), 최근에 영어로 옮겨진 {스피노자와 정치 Spinoza and Politics}(1985; 영역 1998; 부분 국역, {알튀세르의 현재성}, 공감 1996), {인종, 민족, 계급: 모호한 동일성들 Race, Nation, Class: Ambiguous Identities}(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공저, 1988; 영역 1991; 부분 국역,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 세계체계론의 시각}, 공감 1998), {맑스의 철학 The Philosophy of Marx}(1993; 영역 1995; 국역,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문화과학 1995), 그리고 {대중, 계급, 사상: 맑스 전후의 정치와 철학 연구 Masses, Classes, Ideas: 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1994)가 있다. 유럽 정치의 보편주의와 차이를 주제로 한 새로운 논문 선집인 {정치와 그밖의 장면 Politics and the Other Scene}은 곧 Verso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2002년 5월 예정].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당신은 철학과 정치의 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관계라는 것을 밝혀내고자 합니다. 이것은 당신 자신의 지적 궤적으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맞아요. 그 두가지는 고등사범학교의 알튀세르를 중심으로 하는 모임 속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었지만, 그 전에도 이미 얼마간 예기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1942년에 태어났고, 그래서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주 어렸습니다. 당시는 청년 지식인들----영어권의 의미에서 중간계급 middle class이 아니라 프랑스적 의미에서 중위계급 class moyen에 속하는 교육받은 사람들, 다시 말해서 가족이 공무원이거나 교사였던 사람들----이 식민 전쟁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식과 현실 참여를 형성해갔던 시기였습니다. 나의 부모는 중등학교 교사였고, 좌파였습니다. 아버지는 수학자였습니다. 그는 알제리의 프랑스 군대가 자행한 고문에 반대하는 항의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공산주의자였던 한 프랑스 수학자가 알제리 사람들을 돕다가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국립중고등학교를 마친 후, 사범학교 시험을 준비하는 특수반에 들어가기 위해, 1958년에 파리에 왔습니다. 그렇게 나는 가족을 떠났습니다. 파리에서, 나는 즉시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고 일종의 반제국주의적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1962년 전쟁이 종결되던 시기에, 나는 사범학교 학생이었는데, 당시 그곳은 정치적으로 매우 활동적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학생 연맹의 회원이었고 지속적으로 시위와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정치집단이나 정당에 속해 있었습니다.
좌파는 내가 속했던 공산주의 계열----당시 아주 강력했습니다----그리고 좌파 사회주의, 즉 PSU----사회당에서 갈라져 나온 소수 정당이었습니다----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모두 식민 전쟁에 반대했고, 사회주의 정당도 선거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함께 움직였습니다. 예를 들어, 나보다 몇 살 많았던 바디우와 테리는 그 집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격렬하게 싸웠지만, 중심 방향에서는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내가 좀더 성숙했다면, 아마 공산당 청년조직에 참가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텐데, 1956년에 헝가리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 대다수는 공산당이----온갖 오류와 실수, 의심스러운 측면에도 불구하고----가장 강력하고 훨씬 힘있는 좌파 조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산당에 참가했습니다. 나는 1960년에 공산주의 학생연맹에 들어갔고 1961년에 당에 가입했습니다. 애초부터 그것은 내부의 토론과 논쟁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나는 당이,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당을 둘러싼 조직체계가 청년 지식인이 순수하게 지적인 환경 속에 감금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랬습니다. 이런 요소는 이후 아주 영향력 있는 몇 년 동안 수많은 친구들과 동지들을 마오주의로 몰아갔는데, 그 사상은 이를테면 상징적으로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언제나 노동계급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크게 상심하게 되는데, 파리 같은 곳에서 당은 부르주아적인 노동의 분할을 조심스럽게 재생산했고, 지식인들, 특히 이런저런 식으로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노동계급으로부터 고립시켰기 때문입니다.
철학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약간 뒤늦게 다가왔습니다. 사범학교에서 시험은 다학문적인 것이었는데, 이 말은 아주 완벽한 인문학 교육을 제공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지금도 그로부터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문학과 고대 언어, 특히 독일어, 그리고 다른 주제들과 다를 바 없이 약간의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역사는 아주 중요했고 나는 또한 수학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애초에, 나는 고대 역사와 고고학 사이에서 망설였는데, 그 분야는 나와 같은 청년 인문학자들에게는 극히 이름이 높고 매력적이었습니다. 나는 문학과 고대 역사 과정을 따라가기 시작했지만, 그것들이 지독히 지루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나는 철학적 정세가 너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르트르는 때맞침 {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of Dialectical Reason}을 출간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몇 년 후에 사망했지만요).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우리는 그를 항상 철학자로 간주했는데, 아주 탁월한 논문들을 출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나를 강력히 끌어당겼습니다. 나는 생각했어요, 왜 안돼? 왜 나는 안돼? 하고. 당시 사범학교의 학장이, 강의도 했습니다만, 헤겔을 프랑스에 소개했던 장 이폴리트였다는 사실을 덧붙여야겠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 나 자신의 철학 교육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 사람은 이폴리트, 알튀세르, 사르트르였습니다. 사르트르의 강의는 분과를 바꾸기로 결심한 직후 처음 들었지요. 얼마 후에, 소르본에 조르주 캉길렘이 있었는데, 나보다 약간 나이가 많지만 나의 친구인 피에르 마슈레는 나를 그의 세미나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이폴리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 당시 나는 헤겔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나는 그게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곧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순수이성 비판}과 {변증법적 이성 비판}, 칸트와 사르트르를 동시에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성공하지 못했는데, 우리는 정치적 기선을 잡는데 시간을 모두 허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지적인 열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나는 선택했다고 확신했지만, 오래 동안 의문이 남았습니다. 나는 내가 진짜 철학자라고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의미에서라면 아무도 철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당신은 당신의 정체성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은 마치 그런 것처럼 행위한다"고 항상 말하곤 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철학자임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은 마치 그런 것처럼 행위한다, 왜냐하면 당신의 학생들은 당신에게 그런 형상을 표상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엄격한 언어의 꿈

당신은 자신의 인문학적 배경을 이야기했지만, 초기 알튀세르 시기는 강력한 반인간주의적 과학 개념에 대한 탐구가 지배적입니다. 과학에 대한 생각은 우선적으로 공산주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했던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부터, 이를테면 캉킬렘으로부터 유래했던 것입니까?

두가지가 결합된 것이지요. '과학'이란 단어 자체가 상징적인 무게, 일종의 신비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그런 모든 측면들을 함께 결합시키는 꿈을 꾸도록 했습니다. 정치----노동계급 정치----의 과학적 기초라는 관념은 맑스주의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았지만, 우리 연구의 인문학적 측면 또한 아주 유효했습니다. 알튀세르를 중심으로 하는 거의 대부분의 청년 철학자들----랑시에르와 뒤뢰(우리 모임에서 극히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결코 아무 것도 출간하지 않았습니다), 마슈레, 바디우, 나 자신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인문학자였고, 좀더 엄격한 언어와 사유 방식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논리학이나 수학 같은 학문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나 자신도 당시 수학과 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알랭 바디우를 존경하는 한가지 이유는 아마 그가 수학의 중요한 지류----기초 부문----에서 완벽하게 현대적인 연구를 수행했던 우리 모임의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그런 점에는 확실히 상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가 다른 누구보다 더 박식한 것은 아니지요.
이것은 이른바 분석적 방법을 채택하는 '앵글로-색슨' 쪽 철학자들과 소통하기가 아주 어려운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그것은 철학에서 과학적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단지 인문주의적이고 문학적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아닙니다. 두가지 상이한 과학 모델, 두가지 상이한 과학적 이상 사이의 갈등이지요. 그들이 아주 강경하게 경합하는 이유, 그런 오인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느슨하게 말하자면, 나는 분석 맑스주의자----내 친구인 게리 코헨 같은----를 포함하는 분석 철학자들에게 우리가 염두에 둔 이른바 과학적 모델이란 것은 순수한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그들이 염두에 두는 '과학적' 모델은 중세 스콜라적인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공리적 이론 모델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논증을 제시하는 증명 모델을 갖고 있지요. 이것은 과학에 대한 통념이 자신의 고유한 위치 외부에 적용될 수 있는 적대적인 방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분과에서 완벽한 훈련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캉길렘의 모범을 정확히 따라가지는 못했을지라도, 당신이 외부의 시각에서 본다면, 당신이 그 분과 자체에서 훈련받지 않았다면 진지한 과학 철학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신념을 갖고 그를 따라갔습니다. 결국, 그것은 역설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나 자신의 경우, 1960년대와 70년대, 결정론 같은 인식론적 문제를 연구하려 하고 과학적 방법을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했을 때, 나는 여전히 그 개념의 정확한 의미에서 나의 과학적 훈련을 향상시키겠다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에----그리고 맑스주의에서의, 보다 일반적으로는 정치에서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의 암묵적인 포기와 아마도 동시적이었을텐데----나는 그것이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과학적 패러다임을 포기했다고 말할 때, 이것은 내가 정치 또는 철학이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결과에 있어서 과학적이라고 하는 관념을 폐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과학이나 과학적 이성을 지성의 소외 형태로 보는 자들의 진영에 참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내가 과학적 사유를 경멸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루카치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의해 대표되는, 포스트맑스주의나 포스트헤겔적 전통에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그것은 이른바 포스트모던적인 태도의 구성에 기여해왔고,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관념이 인간성을 위한 방향을 오도하거나 무시한다고 제시하곤 합니다.

당신이 인식론적 패러다임을 포기한 시기는 언제입니까?

두가지 단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알튀세르와 그의 소규모 학생 모임과 공유하는 것인데, 1968년 바로 그 전후의 시기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알튀세르와 무관했고, 훨씬 나중에 다가온 것으로, 198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이른바 자기비판이었으며, 맑스주의 철학은 과학적 모델로부터, 일종의 '과학의 과학' 또는 모든 과학에 대한 과학적 비판으로서 발전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정치적 갈등의 모델로부터, 이른바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서 발전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알튀세르는 철학에 뭔가 고유하게 다성적이거나 애매한 것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항상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과학적 이상과 정치적 이상을 결합시키기 때문이지요. 많은 점에서 이것은 플라톤적인 철학관입니다. 나는 이제 알튀세르가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놀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수한 순간에 그 우위성은 전도되었습니다. 철학이 과학이 되려고 하는 정치적 담론이라는 생각을 유지하는 대신에, 그것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철학은 궁극적으로 그 정치적 기능을 통해 형성되고 결정되는 이론적----과학적이라는 의미에서----담론이라는 관념으로요. 이것이 첫 번째 물결이었습니다.
나에게, 두 번째 물결은 내가 스피노자에 대해 저술하기 시작할 때, 또한 정체성들----내가 모호한 보편성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계를 맺는 새로운 정치적 쟁점에 관하여 사유하기 시작할 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순수하거나 이상적인 과학적 철학 모델만이 아니라,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협소하거나 편향적인 강조까지도 포기하도록 강제했습니다. 내가 계급투쟁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이론은 계급투쟁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론과 실천의 관계가 더 복잡하고, 아마도 비틀려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때문에, 나는 '해석학'이나 심지어 단순히 '비판적 담론'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철학에는 아포리아적인 요소가 존재합니다. 철학은 추측----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추측과 정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적 공리 모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공산당을 떠난 이후, 1980년대에 일어난 당신 작업의 변화를 독해하는 한 방법은 일정한 포스트 68년의 정치적 경향----크게 말하자면 자유론적 libertarian 경향----의 이론적 회복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경향은 PCF의 관점에서 비판받아왔지만, 지금은 좀더 이단적인 맑스주의 내에서 고유한 이론적 생명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계급투쟁을 대중 갈등의 정세적 특정화로 재배치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좌파 급진주의의 형태로 해석하곤 하는, 정치적 조직화의 정당 형태와 맞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적 갈등의 일원적이고 이원적인 패턴들에 대해 다수성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해석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합니까?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알튀세르를 중심으로 하는 모임은 맑스주의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축하려 했고, 단선적 인과성(맑스주의적 전통에서 단선적 목적론과 구별되지 못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중층결정,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자율성 등의 관념들을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맑스주의는 계속해서 계급투쟁을 최종심급으로 본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정통적이었고, 당신이 언급하는 자유론적 경향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68년을 이해했던 방식을 봅시다. 프랑스에서, 적어도 68년은 문화 내부에 판돈이 걸린 특정한 정치적 쟁점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제공했습니다. 그런 관념은 아주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라면 그로부터 몇가지 상이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자유론적 관점이라고 부른 것을 채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상부구조에 대한 맑스주의적 통념의 발전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이것이 우리가 했던 일입니다. 이것이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하려고 했던 일이었고 내가 계급투쟁 개념을 확장시킴으로써 하려고 한 일입니다. 그것은 일반적 모델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다원주의를 끌어당기는 중심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어리석은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착취 같은 개념을 포기하지 않고, 따라서 사회적 조화나 합의와 관련하여 사회적 갈등이 부차적이라는 관념을 수용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으로서 계급투쟁 모델을 상대화시키기가 극히 어렵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나는 그에 다소간 동의합니다.
두 번째로, 페미니즘 같은 다른 정치적 쟁점을 돌아볼 경우, 나는 젠더 갈등 및 사회 역사에 대한 가부장제의 중요성을 이론화하는 것이 계급투쟁 모델에 아주 많이 빚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런 적대성은 계급투쟁 자체와는 다르지만 그만큼 보편적이고 결정적이라고, 따라서 특히 이론적으로 그와 갈등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푸코와 비교해봅시다. 그는 계급투쟁 모델을 분명히 상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대안적인 모델을 진보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것은 갈등성 agonism 모델입니다. 적대성이 아니라 갈등성----사회 집단들보다 오히려 역사적 행위자들에 집중하는 경쟁하는 세력들과 실천들의 불안정한 관계----이지요. 그러나 그에는 한계도 존재하는데, 아주 분명히, 계급투쟁의 경우와 젠더 억압의 경우 모두에 말입니다. 그 모델은 세력관계를 단번에 확립된 것으로 보는 결정론적 시각에 대립하고, 또한 언제나 저항이 존재한다는 것----그 모델의 주요 관념----그리고 이 저항이 그 자체로 균형이 생산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헤겔적이거나 맑스적이라기보다, 마키아벨리적입니다. 그러나 오랜 기성의 지배는 이런 방식을 묘사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갈등적 모델로 환원될 수 없는 합리적 착취의 구조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마오주의와 국제주의

아마도 우리는 마오주의의 문제를 경유하여 자유론 libertarianism의 문제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오주의는 다른 어떤 유럽 나라보다 프랑스에서 훨씬 더 중요했던 것처럼 보입니다----마오주의의 장점의 측면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운동으로서, 정치적 분열을 창출하는 그 상징적 힘으로서 말입니다. 이 두가지 모두 사람들을 공산당으로부터 좀더 노동자적인 좌파 행동주의의 형태로 이동하도록 만들었고, 동시에 1970년대 동안 냉전 자유주의로 전향하는 조건을 창출하는 데 결정적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마오주의는 두가지 아주 상이한 정치적 극단을 가리킵니다. 프랑스에서 마오주의가 그렇게 영향력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프랑스뿐만이 아닙니다. 마오주의는 기존의 강력한 제도 공산당이 존재하는 모든 유럽 나라들에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마오주의는 1960년대와 70년대 프랑스에서 강력했지만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페인의 경우는 독재가 붕괴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더 복잡하지만 말입니다. 공산당 자체가 강력했던 곳에서, 마오주의는 매력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학생, 그리고 필경 노동자에게도----물론 프랑스의 주요 마오주의 조직은 학생 조직이었지만----호소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본래의 순수성을 지닌 공산주의 모델의 급진적 판본인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상적인 공산당을 재창출하려는 마지막 시도였지요. 그로부터 마오주의는 사회적 민족국가 내부의 공산당에 내재된 일종의 수치스러움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했는데, 그곳에서 노동계급 조직은 혁명적 담론을 갖고 있지만 노동계급을 복지국가의 구조 내부로 통합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복지국가 내부의 사회적 세력균형의 일부이지요. 프랑스 공산당의 전형적인 모순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마오주의는 전통 부르주아 문화의 규범적 형태에 반역하는 청년 지식인 운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세대론, 부모가 레지스탕스였거나 1945년 이후 주요 계급투쟁에 참여했거나, 아니면 공산당에 소속했다가 그것을 포기했거나 내던져버린 그런 세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국제주의적 수준에서 중국이 공산주의 운동의 영속적인 위기의 해법을 표상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마오주의 모델에 매혹되었습니다. 나 자신도 이상적인 중국 모델, 문화혁명에 강력히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것은 우리가 중국에 투영시켰던 것이었고, 그 실재 역사는 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되돌아보면, 우리는 아주 편파적이었고 대부분 중국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한 잘못된 정보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른바 문화혁명이 두가지 측면, 우리나라에서는 실질적으로 결코 통합할 수 없을 것 같은 측면들, 즉 부르주아 규범에 대한 자유론적 반역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운동을 결합시키고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이것은 문화혁명과 홍위병에 대한 이상적인 그림으로 축약될 수 있었습니다. 포스트-니체적인 문화 반역과 맑스적인 계급투쟁의 통일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수상쩍고 억압적인 조직 형태를 야기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로베르 린하르 같은 사람 덕분에(그는 개인적으로 아주 비싼 대가를 치뤘습니다) 테러리즘으로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일체의 반대를 진압한다는 측면에서 공산당보다 더 나쁜 극단적인 실천이었습니다. 혹독한 모순이었지요.

그 과정에서 反베트남 운동은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갖고 있었습니까? 수많은 학생들을 마오주의로 귀의시켰던 베트남 전쟁과 관련하여 공산당의 급진주의의 결여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까?

아마 당신 말이 맞을 겁니다, 그래요. 그것은 당시 가장 끔찍한 실수 중의 하나였습니다. 프랑스에서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의 급진적인 청년 공산주의자들은 대부분 소비에트 연방이 국제적인 수준에서 보수세력으로 행위하고 있다고 (올바르게)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내 친구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최근 소비에트 연방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중대한 일부인 국제적 국가체계를 안정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전세계에 걸친 학생과 청년 노동자의 68 운동을 세계경제의 국가체계----당연히 사회주의 국가들과 공산당을 포함하는----에 대항한 반란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보지 않을지라도 … 내가 기계적으로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정합적인 또는 체계적인 방식으로, 당시 사회주의 체계는 실제로 안정을 유지하는 보수적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런 이유로 대개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에 밀접히----정치적이고 재정적으로----의존해있던 서구 공산당도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공산당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혁명운동을 후원하고 있음을 정기적으로 선언하면서 이데올로기적 면책을 얼마간 얻어내야 했습니다.
세계의 모든 혁명 그룹들의 거대한 지지자라는 중국에 관한 이상적인 그림은 우리가 베트남 동지들과 토론하던 1970년대 초에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학생을 비롯해서 프랑스에 수천 명이 있었으며,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중국의 사건이 극히 중요했습니다. 중국이 피노체트 쿠데타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들을 완전히 대립적인 두가지 방향으로 몰아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나는 전통 공산주의에 헌신하다 친중국적 열광으로, 또한 거기에서 전혀 다른 것, 냉소주의, 종교, 냉전 자유주의 등으로 전환해갔던 내 세대 사람들을 예를 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지독히 파괴적인 효과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지독히 파괴적인 효과였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맑스나 맑스주의에 앞서 존재했던 하나의 사상이었고, 운동으로서 그리고 정합적 이론으로서 맑스주의의 종언 이후에도 아마 존재할 것입니다. 따라서 포스트-맑스적 공산주의 post-Marxian communism 같은 것이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포스트-맑스적 공산주의는 맑스적 공산주의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아야만 합니다. 이미 상속받고 있는 핵심 요소 중의 하나는 국제주의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국제주의는 맑스적 사회주의----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의 이야기 속의 가장 역설적인 쟁점인데,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이상으로서 염원되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완전히 부정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탈맑스주의자들 ex-Marxists은 경계선----국가 경계선, 문화적 경계선----을 가로지를 수 있는 능력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대표하고 또한 일종의 진보세력의 초민족적 공동체를 지향하며 작업하는 유일한 자들이 아닙니다. 프랑스 마오주의의 전통은 국제주의에 아주 깊이 헌신하고 있습니다.


철학과 이데올로기

{맑스의 철학}의 후반부 쪽에 가면 "교의 doctrine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인상적인 글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에 대해 두가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런 정식화가 일정한 정치적 역사, 즉 교의라는 통념에 기반한 정치적 기획에 대한 반작용을 어느 정도까지 표상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관념에 조응하는 철학의 개념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맑스를 '끝없는 시작'의 철학자로 보는 당신의 관념으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그 책은 {맑스의 철학}으로 출간되었습니다만, 가능하면 맑스의 '철학들' 같은 제목을 채택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맑스의 철학이란 관념은 단일한 교의 내지 통일적 철학이라는 겉포장 밑에 있는 아포리아적 방법으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맑스주의 전통에 의해 창출되었고 어쩌면 맑스 자신의 꿈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완성될 수 있는 통일적인 것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맑스의 운명이라는 특정한 사례와 관련되는 것인지, 아니면 좀더 일반적인 경우인지는 살펴봐야 합니다. 맑스주의의 통일성을 재구축하려는 시도들 중의 하나에 깊이 휘말려왔지만, 나는 이제 그것이 아포리아일 뿐만 아니라, 왜 상상했던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알튀세르가 아팠기 때문에, 아니면 그가 정치적 헌신을 이론적 활동과 결합시키고자 했던 정세가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극히 유리한 대신 결국 아주 힘겨웠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는 맑스에게 이론이란 없다, 맑스에게 철학이란 없다가 아니라, 그런 철학은 상이하고 대개 모순적인 기원들 및 개념들의 잠재적인 결합이며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철학과 관련한 맑스의 한계 입장 boundary position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여하튼 그것은 당신이 모든 철학에 대해 보유했던 입장은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 그 자체와는 무관하다는 것인가요?

좀더 완전하게 정교화시켜야 하는데, 왜냐하면 어느 쪽의 의미에서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말해서 단지 맑스라는 특정한 경우에만 적용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좀더 폭넓게 적용하려는 시도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진정한 철학자들----위대하든 변변찮든----은 교의의 체계를 건설하지 않는다는 관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진정한 철학자에게는 본래적으로 아포리아적인 요소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 철학의 역사상 그렇게 수많은 결정적인 책들이 완성되지 않는지, 완성될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철학자들이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 그들이 체계를 건설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철학자들이 체계를 획득하길 꿈꾸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철학자들의 위대함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데 실패하는 방식에 놓여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수많은 이들이 웃을 테고, 내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내 자신이 겪은 맑스의 경험이 내 정신을 비틀어놓았다고 말할 겁니다. 내 친구의 한 명인 알렉산드르 마트롱은 프랑스에서 가장 탁월한 스피노자 전문가인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매년 새로운 아포리아를 발견하고자 한다. 스피노자의 대중 개념은 아포리아적이다, 민주주의 개념은 아포리아적이다, 이런 식으로. 그건 미친 짓이다." 나는 어떤 철학적 교의의 잠재적인 통일성과 정합성을 생산하고 발현시키려는 목적을 갖는 입장에 대해 응수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누구든 그와 같은 아포리아적 철학관의 원천에 관해 상이한 설명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글쓰기, 텍스트성과 사유의 관계에 관련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좀더 폭넓게 역사, 어쩌면 정세라는 통념에 관련되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오래됐지만 유용한 용어법을 고수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철학의 관계에 연결됩니다. 그것은 위대한 철학자란 결코 단순하고 일관되게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진영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을 맺습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며, 뒷받침할 증거도 존재합니다. 또한 우선적으로 주관적이거나 심리적인 요소와도 무관합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자신의 진영에서, 주류에서 요구하는 것과 정확히 대립하는 담론을 제공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정도는 놀라운 것입니다. 감옥에 가면서까지 군주정이나 전제정을 주장하는 플라톤뿐만이 아닙니다. 아테네의 현존하는 민주주의 개념을 귀족정과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을 뛰어넘는 새로운 토대로 대체시키려 하는 아리스토텔레스만이 아닙니다. 최선의 토대는 왕의 신권이 아니라 일종의 급진적인 민주주의적 토대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영국 군주정을 납득시키려는 홉스만도 아니지요.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위대한 철학의 사후 효과입니다. 좌익 헤겔주의와 우익 헤겔주의가 존재하는 것처럼, 똑같이 좌익 맑스주의와 우익 맑스주의가 존재합니다. 모든 위대한 철학의 바로 그 핵심에는 이데올로기적 헌신과 객관적 논증의 논리 사이의 모순이 놓여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철학자는 이데올로기가 봉쇄하는 쟁점을 다시 열어놓습니다. 이것은 철학자의 정치적 입장이 때때로 극단적으로 수상쩍은 이유입니다----예를 들어, 플라톤과 하이데거를 보십시오. 당신은 결코 논증의 의미를, 그것이 이바지한다고 생각되는 이데올로기적 목적으로 환원하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정세라는 통념과 관련되는 것이겠지요? 당신의 작업을 관통해서 흘러가는 연속성의 실마리는 정세라는 통념인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아포리아가 사고의 정세적 성격과 사유의 본성 사이의 모순으로부터 도출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신이 이데올로기에 관한 논점을 이런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철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모순은 언제나 정세적이라는 것이지요?

동의합니다만, 나는 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바를 입증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 추측, 추정, 주관적 정당화는 철학에 관하여 글을 쓰거나 내 작업에서 철학적 통념을 사용하는 특정한 방식에 후험적인 a posteriori 것입니다. 루만의 개념으로, 이데올로기들은 복잡성-환원 기계들 complexity-reducing machines이고, 대부분의 이데올로기적 대안들의 이분법적 성격은 그런 측면에서 지독히 강력합니다. 그것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지배합니다. 그것은 온갖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 그리고 실험적 지식에 대한 몰두 때문에, 사회과학은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로 존재한다는 가장 강력한 지표들 중의 하나입니다. 당신은 예를 들어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아니면 행태주의와 의식의 해석학 같은 것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지속적으로 재촉 받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실천과 이론이 뒤섞이고 서로에 대해 작동하는 정세는 결코 이런 의미의 이데올로기적 대안들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철학의 관심은 정확히 이런 방향 속에 놓여 있습니다. 대개 철학자들은 어느 한 측면을 선택합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예를 들어 전체주의자이기보다는 개인주의자이다, 혹은 실재론자이기보다는 명목론자이다, 이런 식이지요. 그러나 이런 입장을 일관된 태도로 정교화시키려 할 때, 그들은 대개 자신들의 초기 입장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모든 철학자는 초기 철학과 그것을 파괴하는 후기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정세 속에서 그 모순을 극단까지 밀고 갑니다. 그들은 정세 속의 잠재적인 혹은 본래적인 모순에 극단적인 정식을 제시하는데,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담론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밖의 담론들은 복잡성을 환원시킬 필요성에 의해 전체적으로 제어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상대물은 문학 장르처럼, 철학이란 열린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글쓰기 내지 이론적 활동이 철학적인 것인지 아닌지 사전에 결정하는 질문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철학적 담론의 보편성에 어떤 효과를 발휘합니까?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철학 비판은 그것이 소외된, 추상적인 정신 노동의 관념적인 보편성임을 드러냅니다. 보편들에 대한 작업에서 당신은 보편의 종류들을 구별합니다. 실재 real, 가상 fictive, 상징 symbolic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당신은 이런 구별을 특정하게 철학적인 보편성에 관한 질문과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두가지 상이한 입장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철학이란 실재적 보편성의 영역을 열망한다----철학자들은 실재적 보편을 추구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당신의 실천과 좀더 부합하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철학이란 경쟁하는 보편들의 다수성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즉시 단성성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하는데,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보편의 다수성에 대한 담론을 갖고 있다면, 당신이 다수성에 대한 단성적 담론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띄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강한 반론이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곤 했던 입장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할 것 같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앞서 언급했던 의미에서 회의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포리아적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철학이 그런 다수성 내지 모호성을 극복하는, 보편성의 단성적 요소를 표현한다고 보는 순수하게 합리적인 철학관을 갖고 있는 사람을 납득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소간 동일한 출발점에서, 동일한 영향을 받은 우리 중의 일부는 이제 이런 점에 대한 이론적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곳이 바로, 예를 들어 바디우와 내가 전혀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이며, 비록 우리 모두 라캉에게 암시적이고 초기 비트겐슈타인에게 명시적인, 메타언어적 수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 같은 것을 받아들일지라도 그렇습니다. 나는 그에 관해 절대적으로 일관적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철학이란 담론이며, 혹은 더 적절하게, 담론의 특정한 실천으로서, 보편성의 관념이 지닌 다성성을 탐사하는 것입니다. 철학 그 자체는 보편적인 것의 모호성 속에 휩싸여 있습니다. 물론, 당신은 한 측면 내지 다른 측면이 지배적이 되는 철학들을 발견합니다. 또한 주로 우주론인 철학들이 존재합니다. 실재적인 것, 실재적인 것의 통일성과 다수성, 과정과 연계의 효과적인 측면과 잠재적인 측면 등의 문제에 몰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바디우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나도----수많은 들뢰즈주의자들은 반대할테지만----들뢰즈에게 나타나는 그런 요소를 파헤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재적인 것의 다수성이야말로 들뢰즈 철학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무한히 변별화하는 차이의 존재론이 결국 경험적으로 역사에 무관심하다는 의미에서, 당신은 들뢰즈 같은 이들이 전통적 철학자에 너무 가깝다고 보십니까? 해묵은 나쁜 의미에서 그의 '철학'이 존재하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비판적 전통에 의해 승인되는 것보다는 그 용어의 고전적 의미에서 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해체적이거나 포스트모던한 철학적 실천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것은 사태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외피, 말하자면 겉옷이기 때문입니다. 들뢰즈가 다시 사고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개체성과 삶 내지 과정의 전-개체적 형태 사이의 관계를 다시 사고하고자 합니다. 나는 이와 관련하여 {천 개의 고원 A Thousand Plateaux}을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물론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요. 그것은 아마도 상상적 철학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철학에는 상상적 요소가 존재합니다. 들뢰즈는 근본적으로 은유적인 요소를 도입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와 헤겔에 이르는, 합리주의적인 인간주의 전통이 확립시켰던 은유들의 게임, 바로 인간 개체 그 자체는 상이한 계 界에 속한다는 관념----의식 때문이든 정치적 동물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기 때문이든----을 완전히 포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근본적으로 논파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파괴를 선호합니까?

그것은 형이상학과 사회적 실천의 관계를 당신이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들뢰즈는 개인이 사회적 삶 속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는 규칙들, 또한 다른 사람의 사유와 욕구와 욕망이 그 또는 그녀의 정체성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는----물론 이 반대도 마찬가지지만----규칙들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극히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초개인적 과정들, 프로이트가 말하곤 했던 원초적 과정들입니다. 외디푸스적 보호에서 풀려남으로써, 그 과정들이 전면에 부각됩니다. 그것들은 내가 '대중들 the masses'이라고 부르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그러나 당신이 스스로 의식적 개체성과 책임성의 안전과 보호를 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상황은 극히 드물고 또한 극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질문에 답변하자면, 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에 있어서, 아니면 심지어 지적인 삶에 있어서, 일관적인 들뢰즈주의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법적, 심리적, 정치적 전통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과 같은 개인의 외관상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많은 것이 상상적인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맑스에 대한 당신 책의 독특한 특색은 당신이 '이데올로기'부터 '물신성'에 이르는 맑스의 작업 내부의 발전을 상상적인 것에 관한 그의 개념의 전화에 입각해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비실재적'이라는 상상적인 것에 관한 인식론적 통념에서 사회적인 것 자체를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상상적인 것에 관한 생각으로 이동하는 것 말이죠. 이 후자의 개념이 전적으로 가장 초기의 것 이면에 남겨진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비판적 관점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솟아납니다. 비실재적인 것으로서의 상상적인 것에서 구성적인 것으로서의 상상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게슈탈트 전환 Gestalt switch이 존재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전자가 후자의 내부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요?

나의 입장은 두 번째인데, 만일 당신이 그것을 전통적 양상의 단순한 전도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단지 실재적인 것의 잘못된 표상이라는 상상적인 것의 그림에 도전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또한 실재적인 것의 부산물이라는 상상적인 것의 관념을 거부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만일 현대 프랑스 철학이 그 입장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강점을 갖고 있다면, 그와 같은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이분법을 극복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이분법, 사실과 규범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데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변증법적 전통을 향한 프랑스 철학의 동시적인 근접성과 거리감을 설명해줍니다. 헤겔적이고 맑스적인 변증법은 이미 대부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 종류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시도였지요. 헤겔이 일생에 걸쳐 사실과 규범의 대립(오늘날에도 수많은 합리주의자들이 여전히 진지한 사고 방식의 절대적 기초라고 여기는 것)에 대항하여 투쟁했던 것처럼, 맑스는 물신성에 대한 놀라운 장에서, 실재와 상상의 이분법에 도전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것은 여전히 흥미를 자극합니다. 물론, 극복의 변증법적 방식은 세 번째, 대립적 측면들을 해소시키는 합 synthesis의 개념이란 관념에 물들어 있으며, 이런 점은 현대 프랑스 철학이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포리아적 요소로 되돌아갑니다. 그것은 불가역적 사건들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상상적인 것의 실재적인 것으로의 변화, 실재적인 것의 상상적인 것으로의 변화이며, 이것이 결정적인 것으로 대두합니다.


스피노자와 대중 정치

독일에는, 칸트적 이율배반론 antinomianism의 다양한 형태로 되돌아가서 변증법적 논리의 비판에 대응하려는 경향이 존재해왔습니다. 당신이 속해 있는 전통에 반하여, 스피노자로의 전환과 연관되어 있던 훨씬 강력한----좀더 형이상학적으로 건설적이라는 의미에서----대응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갈등----이율배반 없는 갈등----을 이론화하는 좀더 형이상학적으로 만족스러운 방식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로 인해 또한 그것을 정치적으로 절대화합니다. 이에 관한 당신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프랑스 전통----또한 내가 개인적으로 일정한 유보조건을 달고 귀기울이고 있는 방향----은 스피노자의 교훈과 니체의 교훈을 결합시켜왔으며, 이것은 스피노자 자신에게 일종의 비극적 요소를 도입하기 위한 것으로, 수많은 전통적인 스피노자 독해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스피노자의 증후적 독해이며, 이런 측면에서는 우리들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출판된 {새로운 스피노자 New Spinoza}라는 선집은 이 영역에서 작업하는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분기와 수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수대중 the multitude이라는 범주를 봅시다. 나는 들뢰즈-네그리의 해석과 기본적인 요소들을 공유하는 스피노자의 다수대중 개념에 관한 해석을 발전시켜서 스피노자에서의 대중들에 대한 에세이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결국엔 거의 정확히 정반대의 결과를 생산했습니다.
들뢰즈는 다수대중이라는 생기론적 개념을 정치 영역으로, 또한 개체성들을 다수대중과 접속시키는 하나의 상상으로 이동시키는데, 이것은 완전히 낙관적인 효과들을 생산합니다. 그것은 상상적인 것에 관한 아주 자연주의적인 시각이며, 그 속에서 삶과 사랑의 힘은 불가피하게 갈등, 적대와 파괴의 요소들을 극복합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적 전통----{문명화와 그 불만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의 일정 부분 그리고 모호성이 구성되는 기본적인 상상적 과정에 관한 해석과 전적으로 대립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에서, 나는 스피노자에서의 상상적인 것에 관한 교의가 그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합리적인 정치적 구성은 끊임없이 모호성 속에 붙들려 있는 다수대중의 역량 power을 발전시키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유한성이란 요소가 존재합니다. 스피노자적 관점에서, 정치란 집단적 욕망이 전개될 수 있는 모순적 방향들과 관계 맺는 상상적인 것 속의 합리적인 구성입니다. 그런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만 그 효과를 통제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면 그 내부로부터 통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대중들의 정치를 그 내부로부터 '문명화 civilizing'하는 것입니다. 맑스주의는 대중들의 혁명적 운동의 문명화를 그 내부로부터 실행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찾아냈던 유일한 해법은 권위주의적인 것이었는데, 그것은 모든 진정한 혁명적 추동력을 파괴하곤 했습니다.

여기서 규범적인 차원이란 무엇입니까?

규범적인 요소가 존재하지만, 바라건대, 그것은 내재적인 것입니다. 규범적이지만, 억압적이지는 않습니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은, 나를 들뢰즈의 일부 정식들과 좀더 가까워지도록 하는 (하지만 네그리가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가상 fiction'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의 반대쪽에는 가상이란 요소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정치를 과학이 아니라, 예술 근처로 데려갑니다. 상상적인 것의 모호성을 조절하는 삶의 형태의 창안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진보운동이 역사 속에서 직면해왔던 아포리아는 보수적인 구조들----국가일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는----이 규범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법으로 그런 모호성을 조절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라는 것입니다. 기존 질서에 대한 모든 도전은 집단적 운동을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위태로운 구역으로 이끌어가는데, 그곳에서 당신은 의식적 개체성과 책임성의 안전과 보호를 망각합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유럽이 러시아 혁명과 파시즘의 발전 이후, 홉스봄이 '제2의 30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시기로 내던져진 구역입니다.

그런 내재적인 '문명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들과 제도들은 무엇입니까? 실제로, 그런 스피노자적 시각에서, 제도들이 현실적으로 다수대중에 대해 내재적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회적 교환의 초민족적 형태가 점차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교환을 통치하는 기본적 메커니즘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비권위주의적으로 대규모의 정치적 주체들을 구성할 개연성은 전보다 약해진 것 같습니다. 추정컨대, 이것은 네그리 같은 이들이 다수성의 철학적 존재론을 다수성의 자유론적 정치로 직접 해석하는 한 근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의 정치적 입장이 아닙니다. 계급 정치를 대중투쟁의 정세적 특정화로 보는 당신의 생각이 여기에서 어떻게 하나의 대안으로 작동하는 것입니까?

기초적인 언급은 생략하겠습니다. 내가 지칭하는 실재적 보편의 합당한 후보는 시장, 세계 시장일 것입니다.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로서 계급의 중요성에 관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질문을 야기합니다. 계급은 주로 시장 구조 내지 국가 구조로부터 도출되는 단일체인가? 답변하기는 전혀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상호작용하는 두가지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계급은 그 두 구조가 결합하여 경쟁하는 접면에서 형성됩니다. 19세기에, 계급투쟁에 입각한 사회적 실재성의 묘사는 국가가 계급투쟁의 기초적 결정요인을 포괄한다고 주장할 수 없는 형식적 조직이라는 사실로부터 자신의 설명력과 설득력을 이끌어냈으며, 오히려 계급투쟁은 사람----상품의 순환만이 아니라 노동력으로서의 남성과 여성의 순환----을 포함하는 시장의 확대에 입각해 설명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종말로 치닫고 있는 지금 시기에, 만일 계급이 정치적 영역에서 작용하는 실재적 세력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면, 계급은 우선적으로 국가 내부에 있는 세력으로서, 혹은 국가와 협상하는, 중앙집중적인 국가 자체에 대한 일종의 상대자 counterpart로서 간주되어야 합니다. 결국, 계급은 민족국가 구조에 기능적이었습니다. 계급의 정치적 주체성을 근거짓는 것은 공통 이해의 관념, 또는 사회의 일정한 응집적 대표체라는 관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 시간의 연속성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이는 연속적 과정이라는 역사에 관한 표상과 유례없는 혹은 대격변을 일으키는 사건에 관한 예견의 결합인데, 그 속에서 정치적 주체는 역사의 진로를 역전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정치적 주체들은 필연적으로 일국적 공간보다 더 큰 공간 속에 있고 동시에 과거의 계급보다 작거나 적은 포괄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낡은 의미의 연속성의 견지에서 표상될 수 없는 시-공간 속에 존재합니다. 아마도 정치적 주체들은 제도들보다 연약하지만, 억압하기가 더 어려울텐데, 자신들을 영속적으로 재구성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계적 수준에서, 영속적인 방식으로, 좀더 세계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위상을 갖는 방향 속에서 제도로서의 경계를 압박할 여지가 있는 개인들과 집단들의 통일 같은 것을 건설할 가능성에 대해 극히 회의적입니다. 반면에, 나는 문제가 회피될 수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 자체로 더 풍부하게 토론할만한 가치가 있는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면, 이른바 공동체주의적이거나 초-공동체주의적인 주민들의 상이한 지위는 유럽의 통합이 가속화되는 만큼 더욱더 긴급한 문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아주 강렬하고 위험한 상황을 야기할 것입니다. 나는 사회적 항의가 그런 측면에서 진보적이고 건강해져야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동시에,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운동을 통제하는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경계로서의 제도를 특징짓는, 내가 민주주의들의 비민주적 측면이라고 부르는 것을 억제하려는 목적을 가진 민주화 운동을 기대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담자 피터 오스본 Peter Osborne
1998년 12월,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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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10-04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리바르가 젊은시절 어땠는지를 알 수 있어서 정말 유익했던 인터뷰ㅎㅎ역시 공부만 했군요 그양반 ㅎ

바라 2009-10-05 23:4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는 얼마 전에야 발견한 글인데 역시 대담글이라 읽기 좋네요. 매우 유익한 것 같습니다ㅎ

2009-10-13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