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 교수의 글 일부를 가져옴. <<철학>> 102집(2010년 2월)에 실렸던 글로
전반부는 2008년 세계철학대회에서 열렸던 한국철학 세션에 대한 보고로 이루어져있고
후반부는 함석헌과 유영모 철학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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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세기 한국의 강단철학이 끊어버리고 이어가지 못했던 한국의 철학적 역사를 보이지 않게 이어간 사람들이 바로 유영모와 함석헌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한국의 철학사를 실학과 최한기 그리고 동학을 거쳐 유영모와 함석헌 그리고 우리 세대로 이어지는 연속성 속에서 서술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김흥호가 지적했듯이 유영모에게 자기인식의 실마리가 되어 준 것이 한국의 말글이었다면, 함석헌에게 그것은 한국의 역사였다. 그들은 이처럼 서로 다른 길을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현대 한국인의 철학적 자기인식의 기초를 놓았다. 철학이 방법론적으로 다른 무엇보다 자기 언어로 자기의 현실을 반성하는 데 존립하는 것이라면 스승이 한국어 속에서, 제자가 한국사 속에서 참된 자기를 찾으려 한 것은 너무도 고전적인 철학적 자기인식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의 철학적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통시적으로 보자면 동양의 철학적 전통과 서양의 철학적 전통을 서로 매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대현교수가 정확하게 인식했듯이, 유영모와 함석헌은 전통적인 동양학문의 방법론을 계승한 철학자들이었다. 오늘날 우리 세대와 달리 그들은 서양학문의 세례를 받기 전에 조선의 전통적 학문의 기초를 먼저 닦았던 사람들이다. 다석은 노자의 도덕경을 처음으로 우리말로 번역했으며, 함석헌 역시 노자와 장자 그리고 맹자 등, 동양고전에 대한 강의를 늙도록 꾸준히 계속했다. 그들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세대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동아시아적 교양에 바탕하여 서양학문과 종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서양 철학 및 종교와 동양의 철학 및 종교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열과 대립을 자기 속에서 치열하게 따라체험한 뒤에, 끝내 양자의 대립을 넘어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개방했다. 그 지평은 이전의 범주로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어서, 철학인 동시에 종교이며, 종교인 동시에 정치적 실천이다. 그들의 사유 속에서 동양과 서양의 대립이 지양될 뿐만 아니라 이성과 믿음 그리고 이론과 실천의 대립이 지양된다. 그들의 정신이 한국의 제도권 철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통 신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외면 받았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계에서 보기에 너무도 종교적인 그들의 사상은 신학자들이 보기엔 너무도 철학적이었기 때문에 어느 쪽에서도 진지하게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다른 것이 만나 부딪히는 장소가 바로 오늘날 한국의 정신적 삶의 현장이니, 그들의 철학은 바로 그 타자적 만남에서 비롯된 “정신의 임신”을 통해 태어난 새로운 세계관인 것이다.
씨철학이 만남의 철학이라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지니고 있는 첫째가는 세계철학적 의미이다. 오늘날 세계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서양철학의 전일적 지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 곧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일이다. 현실의 파탄의 근원에는 철학과 종교의 파탄이 뿌리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 시대에 이르러 서양적 세계관에 기초한 세계가 더 이상 이대로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현실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20세기에 이르러 서양정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타자적 정신은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런 타자가 있기는 있는가, 오기는 올 것인가? 마치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Godot)처럼 타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오지 않고 인류는 반신반의하며 새로운 정신을 고대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20세기에 들어 가장 먼저 철학적 서양중심주의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의 목소리는 다양한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 담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비록 그것이 언제나 학문으로서 철학의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서양과 구별되는 타자적 자기인식으로서 제출된 것인 한에서 우리는 탈식민주의 담론에 대해 철학적 의미를 인정하는데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철학이란 다른 무엇보다 자기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식민주의가 서양의 자기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제3세계 인민의 의식을 성찰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문제를 제기한 것은 커다란 공적이었으나 그것이 서양철학의 자기중심주의를 허무는 데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서구권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서양철학적 방법론을 통해 서양사람들을 주된 독자로 삼아 제시된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탈식민주의 이론은 뒤로 오면 올수록 현대 유럽철학의 다양한 변주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서양철학에 포섭되어 버려 더 이상 타자의 목소리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오늘날 새로이 등장한 상호문화철학(Interkulturelle Philosophie) 운동은 탈식민주의의 이런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여기서도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지만, 포르네-베탕쿠르(R. Fornet-Betancourt)가 대표하는 진보적 상호문화철학운동은 탈식민주의처럼 서양철학에 속절없이 포섭되어버리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한편으로는 유럽과 북미지역의 철학을 특수한 맥락(Kontext) 속에서 생성된 철학으로 상대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저 지역 이외의 철학적 전통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동등한 가치(Gleichgewicht)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쉼 없이 해 왔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얼마나 철학에서의 서양중심주의를 실질적으로 불식시킬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남는 의문이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 상호문화철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서구의 학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서양 철학이 처음부터 상호문화적이었다고 주장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상호문화철학운동 역시 서양철학의 한 흐름으로 포섭되어버릴 위험은 언제나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씨철학의 세계철학적 의의는 그것이 탈식민주의담론이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며, 상호문화철학이 애써 찾고 있는 바로 그 타자적 목소리를 들려주고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개방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씨철학은 서양철학과는 다른 또 하나의 자기동일적 사유체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타자성의 지평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기서 타자성이란 서로 무관심한 타자성이 아니라 만남 속에 있는 타자성이다. 씨철학이 개방한 이 사유의 지평 속에서 지금까지 인류가 개방해온 모든 세계들이 서로 만난다. 거기에선 노자와 간디가, 예수와 부처가,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맹자와 마르크스가 이웃이다. 이 지평에 들어서기 위해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편협한 당파성을 버리지 않고서는 누구도 이 정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아집을 버리고 타자와 만나는 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존재방식인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은 그 철저한 일관성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정신의 만남을 방해해왔다. 대개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나 비슷하게 볼 수 있는 정신의 아집은 언제나 체계적인 세계관에 뿌리박고 있었던 것이다. 씨철학의 비길 데 없는 공헌은 바로 그런 이론의 아집을 해체한 데 있다. 이것이 세계철학사적 의미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구구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절박하게 요청되는 태도변경이다. 하지만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라 해서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서양철학자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전통 내에서 자기를 극복하려 할 뿐, 타자적 정신과 만나려 하지 않는다. 물론 가끔 가상한 시도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지젝(S. Žižek)이 그다지 전문적이라 할 수 없는 지식에 기대어 “불교와 폭력 사이의 보다 깊은 유사성”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가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상이 얼마나 일면적이며 또 초보적인지를 금세 알아차리게 된다. 한국의 강단 철학자들이 독일과 프랑스와 영미 철학의 섬세한 차이를 구별하듯이 서양의 철학자들이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와 중국불교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겠는가? 그런 것을 생각하면 유영모와 함석헌의 정신세계에서 동서양의 정신들이 깊은 상호 이해 속에서 서로 만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독보적인 일인지 알 수 있다.
동서양의 정신이 만나는 것은 20세기 한국 정신사의 고유한 성격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는 온갖 철학과 이념 그리고 세계종교가 공존하면서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그것은 씨철학에 의해 반성되고 발효되기 전에는 한갓 무관심한 공존이거나, 정신의 분열상일 뿐이다. 이 분열상이 가장 참혹한 방식으로 현실화된 결과가 바로 6·25였다. 그리고 여전히 이 나라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의 적대적 분열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일상이기도 하다. 씨철학은 그 적대적 분열과 투쟁을 만남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는 자기를 내적 분열에서 구해내어 온전한 주체로서 정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며, 세계인류를 위해서는 만남 속에서 열리는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 지평은 자기동일적 사유의 지평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의 지평이라는 점에서 다른 지평이다. 그런데 씨철학이 이처럼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20세기 한국의 지성사가 그 자체로서 만남 속에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즉자적 만남이라면 중국이나 일본이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중국에는 마오쩌뚱(毛澤東)이 있고 일본에는 니시다(西田)가 있지만 유영모와 함석헌은 한국에만 있다. 마오와 니시다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서양을 추종한 결과를 보여주며 동시에 서양을 나름대로 극복하려 한 결과를 보여준다. 니시다의 철학은 일본적 사유에서만 가능할 것이며 마오의 혁명론 역시 중국의 전통으로부터 생성된 철학일 것이다. 하지만 니시다도 마오도 세계철학사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 새로운 보편의 지평을 개방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까닭은 니시다도 마오도 자기를 포기한 철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쩔 수도 없는 역사의 반향으로서, 현대 일본은 물론 중국 역시 현대사 속에서 전면적인 자기상실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모두 지켜야할 자기가 늘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든 중국혁명을 통해서든 다만 그 자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근대적으로 쇄신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중국과 일본은 역사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를 지킨 결과 하나의 자기로 남았을 뿐,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열리는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정립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마오나 니시다가 열지 못했던 새로운 정신의 지평을 유영모나 함석헌은 어떻게 열 수 있었는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사상의 새로움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주장의 새로움인가 아니면 새로운 사고방식인가? 우리가 이런 물음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씨철학의 새로움에 대한 주장은 한갓 허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씨철학의 새로움이 단순히 주의주장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새로움이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지평을 연 것이라 주장하려면, 우리는 과연 현재 보편적인 사유의 지평으로서 군림하는 서양적 철학 및 학문의 지평에 대해 씨철학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서양적 사유의 보편성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 요소로 특징지어진다. 한편에서 그것은 대상세계 전체를 동일한 지평으로 불러들인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존재라는 이름으로 개방되는 대상의 지평이다. 원칙적으로 보자면 존재의 지평에 단절이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즉 모든 것이 어떤 의미로든 있는 것이란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일양한 보편자이다. 그리고 존재의 지평 외에 우리가 다른 대상의 지평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무제약적 보편이다. 다른 한편 서양철학은 그 존재를 생각하는 방식에서 두드러진 보편성을 보여준다. 서양철학의 보편성은 그들의 생각이 그 내용에서 모두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표현 방식에서 생각이 보편적으로 개방되어 있고 전달될 수 있다는 데 존립한다. 생각의 제한 없는 접근가능성과 왜곡 없는 전달가능성이야말로 서양철학이 실질적 진리에 앞서 요구하는 진리의 형식적 기준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서양철학에 참여할 때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한편에서는 무제약적으로 개방된 보편적 존재의 지평에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누구에게도 차단되지 않은 보편적 생각의 지평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하이데거가 「철학-그것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이란 오직 그리스적인 유럽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 것도 그다지 틀렸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철학이 전체로서 전체를 사유하는 데 존립하는 정신의 활동이라면 세상 어디에서도 그리스에서처럼 순수한 방식으로 그 이상이 실현된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철학이 이처럼 순수히 보편적인 학문으로서 정립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곳에서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자유인들의 공동체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자기의 주인으로서 세계 속에서 자기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자기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서양적 자유의 이념 속에선 지배의 이념이 공속한다. 서양 철학은 그런 자유인의 공동체에서 탄생한 철학이다. 그들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먼저 세계를 통일된 전체로 파악하려 했으며, 그 세계에 대한 인식을 누구도 독점할 수 없도록 모든 인식에 형식적인 개방성과 명증성을 요구했다. 그리스 철학에 의해 기초가 놓인 서양 철학의 보편성은 바로 그런 정치적 자유의 열매였던 것이다.
하지만 서양 철학과 서양 학문이 그렇게 대상의 무제약성과 주체의 무차별성에 기반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면, 과연 어떤 의미에서 서양철학이 보여주는 보편성과 다른 보편성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인류의 역사에 한번 세워지면 다시 허물 수 없는 영속성을 지니는 정신적 성과가 있다면, 그리스적 자유와 보편성의 이념 역시 그런 성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양 철학에 의해 열린 보편적 사유의 지평을 폐기하고 그 외부로 나갈 수는 없다. 우리는 오직 다른 지평을 그 위에 겹치게 하거나 그 지평을 확장시킴으로서 그 지평을 더 넓게 하고 더 깊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다시 우리는 서양적 사유의 외부에서 전체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한다. 비유컨대 서양철학의 지평을 잡아당겨 더 넓히고 더 깊게 하기 위해서는 서양 철학의 지평 외부에 어떤 입각점을 지녀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이미 우리는 서양적 사유의 지평에 사로잡혀 있는데 어떻게 그 보편적 사유의 지평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아니, 이런 형식적 모순을 논하기 전에, 그런 외부가 있기나 한가?
만약 우리가 학문이나 철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우리는 끝끝내 서양적 보편의 지평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도 있음의 지평을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떤 생각도 보편적으로 전달가능성의 원리를 거부하면서 보편적 인정을 요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의학은 비서양학문의 이런 곤경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서양적 개념을 통해 번역되는 한에서만 보편적인 승인을 얻는다. 그렇지 않을 때, 한의학은 그 모든 실질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 과학이 아닌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서양)과학의 개념으로 번역되면 (서양)과학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아니면 과학이 아닌 것이 된다. (서양)과학이 아닌 다른 과학으로서의 한의학의 자리는 없다. 사정은 철학 경우에도 비슷하다. 비서양 철학이 서양철학적 개념으로 번역되면 서양철학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반대로 번역될 수 없다면, 그것은 보편적 전달가능성이 없으므로 아예 철학으로 인정받기 어려워진다. 이런 곤경은 만약 우리가 단순히 학문과 이론으로 서양 철학 외부에서 보편성의 다른 지평을 추구하려 한다면 벗어나기 어려운 곤경이다.
외부는 도리어 안에 있다. 서양적 보편성의 지평 내부에서 그 지평을 초월하는 타자적 입각점을 확보하는 것은 오직 정치의 지평에서만 열린다. 왜냐하면 서양철학과 서양 학문 일반의 보편성의 근거가 바로 그 정치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은 대상의 보편성을 말하고 주체의 보편성을 추구한다. 적어도 명목상으로 보자면 그 보편성은 무제약적인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자면 그들이 추구한 보편성은 제약된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철학의 주체는 자유인들이며, 서양철학의 세계는 자유인들의 눈에 비친 세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서양철학을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인―상호문화철학적 의미에서의―‘맥락’(Kontext)이다. 우리 모두가 그 자유인들이 개방한 세계 내에 이미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서양 철학의 보편적 지평 내에 있다. 하지만 그리스의 폴리스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자유인들이 아니었듯이 서양철학이 개방한 세계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운 주체는 아니다. 도리어 프란츠 파농이 말했듯이 그 세계 내에서 대다수는 “자기의 땅에서 유배된 자들” 곧 자기의 땅에서 노예로 전락한 자들이다. 즉 대다수의 인류는 같은 하나의 세계 내에서 타자이며, 내부의 외부자들이다. 하지만 자유인의 땅에서 노예로 사는 자들이야말로 자유인들이 개방한 보편적 지평 내에 거주하면서도 그 지평을 초월할 수 있는 타자적 관점을 지닌 사람들인 것이다.
20세기는 자유인의 세계에서 인류의 노예화가 극단에까지 진행된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가 철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한 유영모와 함석헌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 까닭은 노예상태는 다만 벗어나야 할 부정적 상태로만 인식되었던 까닭에, 바로 거기에 기존의 보편성의 한계를 폭로하고 전복시킬 수 있는 새로운 보편성의 씨앗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오도 니시다도 우리의 박종홍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남들과 같은 권력의 주체가 되기 위해 발버둥 쳤으니, 그것은 낡은 보편의 모방과 반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영모와 함석헌은 바로 그런 권력의지를 포기하고 억압받는 씨의 고통 속에 머물렀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의 남다른 점이다. 허다한 식민지 엘리트들이 지배적 주류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민중적 삶을 등진 것과 달리 그들은 도리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민중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전체와 하나 되려 했다. 그들에게 철학은 지배를 위해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곧 관조가 아니었다. 함석헌에겐 도리어 참된 “앎은 앓음”이다. 노예상태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수난에 참여하고, 그 보편적인 수난의 뜻을 묻는 것이야말로 씨철학의 길이었다. 플라톤의 비유를 거꾸로 돌려 말하자면, 빛을 찾아 동굴을 벗어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정신의 낮아짐이야말로 씨철학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영모는 빛이 아니라 어둠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다.
이를 통해 유영모와 함석헌은 지배적 세계 내에서 지배적 주체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세계를 드러낸다. 칸트가 말했듯이 철학이 추구하는 세계는 이념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념인가? 칸트는 그것이 오직 생각 속에서 열리는 전체인 까닭에 이념이라 불렀다. 하지만 씨철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칸트의 세계론은 수정되어야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우리들 각자는 하나의 세계이다. 철학이란 이념 속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개방하는 정신의 노동, 곧 세계화에 존립한다. 그러나 세계화의 길은 하나가 아니다. 서양철학이 개방하는 세계는 지배자의 권력의지가 개방하는 세계이다. 하지만 씨철학이 개방하는 세계는 오직 고통 받는 인간의 눈에만 보이는 세계, 능동적 관조 아래 열리는 사물적 세계가 아니라 오로지 고난의 수동성에 참여함으로써 열리는 만남의 세계이다. 외따로 떨어진 섬들처럼 낱낱의 사사로운 세계들이 하나의 보편적 세계로 이어지는 것은 너와 나의 만남을 통해 일어나는 사건이다. 세계는 만남 속에서 열리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 너와 나는 만나는가? 그것은 오직 우리가 서로의 고통에 참여할 때이다. 지배하는 정신이 개방하는 관조의 세계에서 보이는 모든 것은 인식하는 주체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물적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더 깊은 고통의 심연으로 내려가 보편적인 고통을 통해 타자와 만날 때, 그 세계는 언제나 사물화되지 않는 주체들의 공동체이다. 왜냐하면 사물은 고통을 모르나, 오직 살아 있는 주체만이 고통 받기 때문이다. 아니 거꾸로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즉, 고통의 주체만이 주체일 수 있다. 고통을 모르는 순수한 능동성 속에 있는 관조의 주체는 사실은 주체일 수도 없다. 주체성이란 고통이 있는 곳에만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씨철학은 서양철학이 개방하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화의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사물들의 세계가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 인격적 주체들의 만남의 세계이다. 그 만남의 세계는 오직 고통의 만남을 통해서만 열리는 것이니, 이 새로운 세계의 전망은 20세기 한국역사에 켜켜이 쌓인 고통의 뜻을 유영모와 함석헌이 정직하게 물었을 때 잉태되었다. 그 새로운 세계의 씨앗에 물을 주고 북돋우는 것은 이제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