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와 함께 탄 KAL기
2000년 7월 17일, 김포공항을 떠난 비행기 안에서 나는 까뮈를 꺼냈다. 까뮈 연구가인 김화영 교수의 『문학상상력의 연구』, 아름다운 책이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학위논문이 김화영 교수의 특유의 미문 속에서 더 이상 이론서이길 그친다. 나는 이 책을 여섯 번을 읽었다. 바슐라르와 까뮈, 김화영, 이름만 들어도 감성의 현(鉉)을 떨게 하는 대가급 에세이스트들의 유혹적인 문장이 이 책엔 얼마든지 있다. 이 책에서 바슐라르는 말한다. 「자기가 본 것을 미리 꿈꾼 적이 없다면 이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 제대로 보려면 미리 꿈꾸지 않으면 안된다.. 김화영은 바슐라르에 이런 주석을 달고 있다. 「참으로 꿈꾼다는 것은 딴 데 정신이 팔린 상태가 아니라 거기에 충만하게 현존하는 것이며 빛 가득한 하늘의 거대한 꽃을 바라보는 것이며 세계의 광대한 육체를 시선의 살로 껴안는 것이다.」 나는 미국을 내 시선의 살로 껴안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미국을 미리 꿈꾸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미국이 내키지가 않았다. 너도 미국, 나도 미국일 때, 나 하나라도 삐딱할 수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The 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진 셈, 어쨌거나 비행기의 항로를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여행,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정
「티파사, 그곳에서는 세계가 언제나 새롭기만한 빛 속에서 매일같이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까뮈가 그의 수필 「여름」에서 말한 이런 곳을 누군들 마다하랴. 관습의 때를 벗겨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땅, 모든 기존의 룰들이 지배와 구속의 힘을 잃어버리고 존재들이 자신의 독자성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땅. 내가 나로서 비로소 호흡할 수 있는 곳. 작품「이방인」에서 뫼르쏘는 한 사내를 해변에서 쏘아죽이고 돌아오면서 비로소 행복의 의미를 이렇게 음미한다. 「활짝 열린 공기와 풍요한 하늘 속에서, 그는 인간이 해야 할 유일한 임무는 사는 일, 행복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불행의 표정이 마치 영혼의 고상함을 말해주는 척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용케도 까뮈는 행복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임을 역설한다. 까뮈는 칙칙하지 않다. 불행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나의 여행용 가방 속에 까뮈를 대동한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까뮈는 내슝이나 청승을 떨지 않는다. 동기야 어쨌든 여행은 행복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 아니겠는가.
기내에서
좁다. 쪼그리고 있자니 불편하다. 옆에 아리따움에 교양까지 겸비한 아가씨라도 있다면 12시간 넘는 비행거리가 짧게 느껴지겠지만 길어도 이건 너무 길다. 바깥 바람이라도 쐬고 싶지만 나중에 스튜어디스에게 욕먹을 걸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최성도 선생도 잘 견디는데, 까뮈나 축내면서 버티는 거다. 가끔 허리 라인이 나긋나긋 맵시 있는 스튜어디스들이 시각에 삽상한 느낌을 준다. 12시간 이상의 비행시간을 버텨내면서 푸대자루 같은 스튜어디스를 본다는 것도 고문일 것이다. 스튜어디스들이 필요 이상의 미모를 가진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로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여행엔 이런 의외의 깨달음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졸다 깨다 졸다 깨다 보니 샌프란시스코다. 비가 많고 습한, 이 도시는 축축하고 끈끈하다. 자살율이 높은 도시라는 것도 일리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곳은 미국인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란다. 바슐라르는 「물은 우리로 하여금 완전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해준다」라고 했다. 금문교에는 자살을 만류하는 권고문이 쓰여있다. 금문교 아래의 물은 완전히 죽을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좋다. 여행의 첫날이라면 금문교에서의 자살은 일단 보류하는 것이 좋다. 아직은 더 보아야 할 것들이 많다.
이탈리아 어부들의 선박지였다는 Fisherman's Wharf에서 관광선을 타고 금문교 아래를 지나다 보면 멀리 알카트라즈 섬이 보인다. 영화 「The Rock」에서 숀코네리와 니콜라스 케이지가 눈부신 액션을 보여주었던 섬, 알카트라즈는 연방정부의 형무소가 있어 '악마의 섬'으로 불려졌다는 곳이다. 그 이유는 물살이 거세어 탈출이 불가능한 점도 있지만 거기서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죄수를 참을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전설적 갱스터 알 카포네도 그곳에 갇혀 있었다던가.
샌프란시스코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이라 안개로 유명하다. 안개는 보여주면서 동시에 가린다. 안개는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보여준다. 나타나는 듯 하면서 사라지는 것이 안개다. 내 가방 속의 김화영은 『문학상상력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안개는 탈출, 혹은 출발이라는 의미 자체를 말소시킨다. 물의 감옥은 한계가 없는 감금의 공간이다. 안개의 지옥은 천국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밖으로 나간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밖'이란 것을 무화시키는 것이 안개이기 때문이다.」
안개는 알카트라즈보다 더 지독한 감옥이었다. 그 감옥에서 빠져나오려고 무수한 사람들이 금문교 아래로 자기 몸을 던졌는지도 모른다. 윤회의 수레바퀴가 금문교 아래에서 덜커덕 멈출 수만 있었다면 그들의 선택은 현명한 것이었으리라.
1박을 하다. 10팩이면 충분하다는 소주를 첫날 다 마셨다. 그래서인지 이후 내 두개골 속을 샌프란시스코의 안개가 줄곧 따라다녔다. 醉生夢死!!!
고속도로, 프리웨이
줄곧 길이다. 영화 「아이다호」의 풍광이 그대로 펼쳐진 길을 버스는 줄곧 달린다. 끊임없는 화물차들의 질주. 그것은 내가 본 가장 미국적 풍경이었다. 세이지 브러쉬 sage brush라는 풀이 사막에 지천으로 피어있다. 길은 지평선에서 지평선으로 이어진다. 하늘엔 구름 한점 없다. 바로 이곳이 미국의 서부다. 끝없는 평원,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는 아몬드 숲과 포도밭이 미국의 풍요를 말없이 웅변한다. 미국은 무궁한 엽록소의 공장이다. 그 공장에서 생산된 과실들은 이미 세계인의 입 안에 침투한 지 오래다. 선키스트 sun-kissed = sunkist 태양이 입맞춤한 포도와 오렌지가 그것.
한 점의 구름도 볼 수 없었다. 까뮈는 티파사가 태양과 대지가 결혼하는 곳이라고 했지만 캘리포니아 또한 빛의 사원이었다. Mamas(엄마)와 Papas(아빠)는 이미 늙어 Grandmamas와 Grandpapas가 되었겠지만 그들의 노래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늙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아마도 캘리포니아의 투명한 햇살에 바쳐진 송가(頌歌)였으리라. 왕가위의 영화 「중경삼림」에서 왕정문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도 그 무구한 햇살이 아니었을까.
이글스(Eagles)의 <호텔 캘리포니아>도 매력적이다. 12현 기타로 시작되는 도입부부터 마지막 솔로와 앙상블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 땅위의 젊은이들에게 이국적 동경을 불러일으켰던 Eagles의 <호텔 캘리포니아>. 호텔이라는 단어와 캘리포니아라는 단어의 낭만적 어울림, 거
기에 물 흐르듯 이어지는 기타의 선율, 그 선율 속에서 캘리포니아는 구체적 지명이 아니라 꿈 너머 피안의 지명이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요세미티는 미국인의 식성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다. 산에서는 식욕이 돋는 우리네 민족과 미국인들의 식욕은 사뭇 다르다. 미국의 국립공원엔 우리나라의 북한산에서와 같은 카페도 없고 음식점도 없으니 말이다. 좋은 산과 계곡이면 어김없이 도토리묵과, 오리탕, 붕어찜, 사철탕, 송어회집이 즐비한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인들에게 자연은 먹고 마시고 두들기고 피박 쓰고 설사하고 노래하는 곳이다. 계곡마다 고기 굽는 냄새요, 쩍쩍 화투패가 짝맞는 소리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자연을 가만 내버려 둔다. 조금이라도 자연에 손상을 가하면 가차없이 벌금형을 가한다. 참으로 동방예의지국의 한 신민(臣民)이 볼 때 불경스럽기 짝이 없다. 자연은 너그러운 것인데 자연에 조금 손상을 가했다고 벌금형이라니 그건 오히려 자연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를 보라. 강을 죽이든 살리든, 강물에서 물고기의 씨를 말리든 말든 얼마나 관대한가. 환경이야 어떻든 일단 짓고 보는 것이 한국의 골프장이 아닌가. 자연이 조금 상한다고 해서 호들갑을 떨지 않는 그런 관대함과 대범함이 미국인들에는 없다.
콜로라도 강에서는 팔뚝만한 고기들이 논다. 그래도 물고기에 관심이 없는 미국인들은 물고기들을 가만 내버려둔다. 우리네 민족은 그에 비해 얼마나 활달한가. 그물을 치든지, 어항을 놓든지, 아니면 밧데리에 철선을 연결해 냇가의 고기를 싹쓸이까지 하지 않던가. 일찍이 인디언의 영토를 빼앗은 이 인정 없는 민족은 다람쥐에게도 먹이를 주지 않는다. 내 짧은 영어 실력은 요세미티 공원에 있던 푯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저렇게 살게 내 버려둬. 인간의 음식은 야생동물을 망칠 뿐이야. 제발 게네들을 먹이지 말라구.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동양철학자 김용옥은 Let it be로 풀이했던가. 노자도 읽지 않은 저들은 자연을 내버려 둔다........ 프레즈노에서 2박을 하다.
칼리코 기념품점에서 전갈을 산 이유
3일 째, 아침엔 칼리코 은광촌에 들러 기념품 가게에서 전갈을 샀다. 자그마치 15 개를 샀다. 물론 죽은 전갈을 플라스틱으로 코팅을 해놓은 것이다. 동료들에게는 한국에 돌아가 전갈 패밀리에게 하나씩 돌리려고 샀다고 둘러댔지만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황지우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온몸에 번진 적의(敵意)여, 전갈은 독이 올랐을 때, 가장 아름답다.> 젊음이 지어낼 수 있는 노래다. 조금 여유 있는 나이가 되면 헐거운 것, 조금 맥빠진 것도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이가 있다. 발라드류의 감미로움보다 메탈류의 강렬함이 아름답고, 은근하고 우아한 것보다 섬광과도 같이 폭발하는 것이 아름다울 때가 있는 법이다. 자상한 이야기보다, 달콤한 속삭임보다 하나의 외침과 절규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니이체는 진리는 미풍처럼 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이 반드시 진리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한 잔의 독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전갈이 제 몸 속에 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음지의 덕이다. 독poison이다. 패키지투어가 아니라면 그런 독과 만날 수 있는 곳이 사막이다. 그러나 사막의 기념품 가게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불행하게도 박제된 전갈이다. 『문학상상력의 연구』에서 김화영은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것을 메마른 광물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저 무서운 힘의 위협을 받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목마른 공간 속에서 한발한발 인간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삶, 혹은 생명 바로 그것이 그(까뮈)를 매혹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사막의 이미지 속에서 그가 포착하여 찬미하는 것은 다름아닌 향일성의 생명의지인 것이다.」
청마 유치환은 그의 시 「생명의 서」에서 노래하고 있다.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하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희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패키지투어에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그런 여행은 안락하지만 깨달음의 깊이는 없다. 하긴 득도를 하려고 미국에 온 것은 아니다. 더구나 4박 5일로선 어림도 없다. 예수는 광야를 적어도 40일은 방황하지 않았던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라스베가스의 입간판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이 있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Life is short. 돌려 말하면 인생은 짧으니 먹고 마시고 노름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흥청망청 써대란 것이다. 교묘한, 그러나 속내가 분명히 들여다 보이는 뻔한 마케팅 전략이다.
마이크 피기스 감독은 이곳을 배경으로 「리빙 라스베가스」를 제작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할리우드의 극작가 벤은 의사도, 가족도 포기해버린 중증의 알콜중독자다. 그런 그의 앞에 창녀 세라가 나타난다. 그들의 비극적 러브스토리가 라스베가스를 무대로 선택한 것은 썩 훌륭한 배팅이다. 라스베가스에서 어떤 형이상학적 깊이도 찾아선 안 된다. 그곳에 있는 것은 도저한 절망의 깊이요 환락의 깊이다. 나는 그 깊이를 단지 냄새 맡을 수 있을 뿐이다. 라스베가스 어느 곳이라도 호텔 밖은 퍽퍽 찐다. 이 열기를 피하려면 조용히 호텔로 들어가 머시인에 코인을 넣는 수밖에 없다. 대박을 터뜨리고 싶다는 야망도 없는 나는 일찍 잠든다.
잠자리에서 생각하니 호텔의 이름이 사하라다. 사하라, 死하라. 늙지 않는 욕망이여 사하라.
그랜드 캐년
오전에 후버댐을 지났다. 이런 웅장한 스캐일 뒤엔 반드시 숨겨진 희생이 있게 마련, 엄청난 중국인들이 그 댐의 건설에 희생되었단다. 근처의 기념품 가게에 들러 또다시 전갈을 샀다. 전갈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고 동료들은 놀려댄다.
그랜드 캐년, 이런 풍경 앞에선 입을 닫고 가만 있으면 된다. 꼭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저녁엔 라플린이란 곳에 가서 잤다. 조그만 휴양도시고 도박도시다. 콜로라도 강이 흐르는 야경이 볼 만했다. 그래도 한 번 땡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동료들의 충고를 따랐더니 20불을 잃었다. 안 하는 게 따는 거란 생각에 맥주 먹고 잤다. 아침에 주머니에 25센트 짜리 동전이 하나 있길래 넣고 당겼더니 80배가 터졌다. 이런!
인디언의 사막, 백인들의 로스엔젤레스
올드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서부영화는 개척자인 백인은 선하고 인디안들은 괴성을 지르며 포장마차를 습격하기가 일수였다. 포장마차를 구하는 명사수역은 게리 쿠퍼와 존 웨인이 맡고 나섰으며 나팔을 울리며 극적으로 당도하는 기병대는 관객들의 박수를 받아내기에 족했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에 케빈코스트너가 주연을 한 영화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에 와서야 비로소 인디안들은 피와 눈물이 있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제는 적이 안되겠다 싶었던가 보다. 미국의 인디안들은 더 이상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제는 동정의 대상이 된 것이다. 멸종되어 가는 버팔로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는. 시애틀 추장이 1800년대에 미국 정부에 보냈다는 편지는 저간에 인디안의 이미지가 백인들에 의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준다. < 우리는 우리의 핏줄 속을 흐르는 피처럼 나무 속을 흐르는 수액을 잘 안다. 우리는 이 땅의 한 부분이며 땅 또한 우리의 일부다. 향기 나는 꽃은 우리의 자매다. 곰과 사슴과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바위, 수풀의 이슬, 조랑말의 체온, 사람 이 모든 것이 한 가족이다. 시내와 강을 흘러내리는 반짝이는 물은 단순히 물이 아니다. 우리 조상의 피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땅을 팔면, 이 땅이 신성하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호숫물에 비치는 모든 것은 우리 민족 삶 속의 사건과 기억을 말해준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다. 강은 우리의 형제다. 우리의 갈증을 달래주고 우리의 카누를 옮겨주고 우리 아이들을 키운다. 그러니 당신들은 형제를 대하듯 강을 친절히 대해야 한다. > 그러나 인디안 추장이 썼다는 위의 구절 또한 백인들에 의해 윤색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일방적 악의는 일방적 호감 못지 않게 위험하다.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본 것은 백인들에 의해 윤색된 인디안, 백인들의 굴절된 의식을 거친 황인종이었다. 문화적 제국주의, 할리우드는 이미 우리의 대뇌를 단단히 장악하고 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
말만 유니버셜universal 스튜디오지 따지고 보면 영락없는 아메리칸 스튜디오다. 아메리카의 자본과 테크놀로지가 결합해 막강한 판타지를 만들어 내는 곳이 유니버셜 스튜디오다. 입체 영화를 보고나오는 최성도 선생님의 한 마디가 의미심장하다. 볼수록 기가 질리는 민족이군.
가상이 현실의 기가 질리게 하는 곳, 바야흐로 시뮬레이션의 천국이 유니버셜 스튜디오다. 가상인지 뻔히 알면서도 기가 질린다. 터미네이터란 입체영화는 말 그대로 끝내준다.(terminate) 존재하지도 않는 괴물이 눈 앞에 아른거릴 때, 현실은 증발해 버린다. 형이상학이고 인문학이고 스펙터클과 판타지 앞에선 발 붙일 자리가 없다. 괴성을 지르고 환호를 하면 그만이다. 왠지 그리하고 나니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영락없는 관광이다.
다시 기내에서
여행이 아니라 관광이었다. 득도를 하러 간 게 아니라 구경을 간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기엔 일정이 너무 짧았다. 무언가를 배우고 곰삭이기엔 너무 빨리 스쳐 지나왔다. 동료 일행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기에도,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만들기에도 터무니없이 짧았다. 사막의
열렬한 고독 속에 옷자락을 나부끼며 영웅처럼 서있기에도 4박 5일은 너무 짧았다. 하지만 내 나라가 얼마나 힘겨운 땅인가를 알기엔 4박 5일은 충분히 길었다. 비행기에서 두 밤을 세웠으니 일주일이면 가족을 그리워하기에도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요세미티, 후버댐, 라스베가스, 콜로라도, 캘리포니아, 그 이름들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알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워 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