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Goodbye-camel


 
입적(入寂)


이렇게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라면 좋겠네
자귀나무 잎새들의 그 기나긴 입맞춤이 끝나고 나면
그것으로 타임아웃의 휘슬이 불어지면 좋겠네
일렬종대로 서있는 가로수들이여
어쩌면 生은 라인 밖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니
부디 똥볼을 질러다오
저 함성과 아우성의 그라운드 바깥으로
내겐 어떤 불멸도, 어떤 루즈타임도 필요없으니
한 번의 휘슬 그것이라면 좋겠네
갈팡질팡 떨어진 잎새를 질질 끌고다니는 바람 앞에서
대체 소멸 이후는 무엇인지
화환도 없이, 갈채도 없이 
어떤 루즈타임도 더는 없었으면 좋겠네
음악이 끝나면 또 침묵의 음악
그 꽁꽁 얼어붙은 시간의 심장 속이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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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시간



겨드랑이에 몰랑몰랑한 비둘기알이 만져지지
의사는 그것을 암이라는데
이 에미는 아무래도 그것이 울음주머니만 같다
내 몸을 빠져나오지 못한 설움의 메주덩어리들 말이다

아니에요 어머니의 가장 커다란 울음은 저예요
아이들이 만들어준 구름의 신발을 신고
저는 한줌의 편두통과 눈꼽들을 바람에 던졌어요
오랫동안 내 안에 웅크렸던 까마귀들이 푸드득 내 몸을 빠져나갔어요
바람은 제 숨소리에 귀기울이며
제 숨소리의 설움에 겨워 더 깊은 한숨을 토해내고
살아있다는 것이 옛날처럼 아득하다고
은사시나무는 제 스스로의 율동에 취해 온몸을 떨었어요
지상의 물기를 빨아들이며 소리없이 우는 나뭇가지에 앉아
어머니가 못다 운 까마귀의 울음을
저는 또 얼마동안 바람 속에서 울어야 해요
어머니의 흰젖을 먹고 저는 장차 더 큰 어머니의 하늘이어야 해요

모든 것들이 희미해지고 아득해져서 어머니가 닿게 될 마지막 집의 등불
11월의 단풍잎처럼 환부의 기억들이 잠드는 시간
아무르 아무르 아무런 시작도 없는 곳
모든 울음이 그친 시간 뒤로 한 개의태양이 뜰 거예요
궁둥이가 파란 어머니의 아들이
늑대의 울음을 울며 몽골의 벌판을 달려 올 거예요


 
..........어머니는 혼미함을 헤매시고 나는 또록또록 김수영이 읽힌다.............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美大陸에서 石油가 고갈되는 날에/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새겨둘 말을 너는 都市의 疲勞에서/배울 거다/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의심할거다!/복사씨와 살구씨가/한번은 이렇게/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사랑의 변주곡-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都市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의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四·一九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暴風의 간악한
      信念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信念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人類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美大陸에서 石油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都市의 疲勞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瞑想이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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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11-01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단한 고요함..11월입니다.
강건하시길^^

비로그인 2005-11-0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디오헤드, 김수영, 변방의 초원. 잘 읽고, 듣고 그리고 생각하며 갑니다..

감각의 박물학 2005-11-01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우울하고 무거운 날입니다..어머니....!
 

 

 <지렁이, 소리 없이 땅을 일구는 일꾼>은 지렁이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바로잡아 준다. 지렁이는 토양 속에 있는 유기물과 기생물을 먹이로 하여 생존한다. 썩어가는 작물의 뿌리나 잎사귀, 땅 속에서 죽은 벌레, 그 밖의 여러가지 미생물들을 먹이로 하여 흙과 함께 섭취한다. 지렁이는 특성상 배설을 할 때는 지표면 위에 하기 때문에 땅속을 왔다 갔다 하면서 토양에 작은 통로를 만들어 결국 쟁기질을 하지 않더라도 경운하는 효과를 준다. 지렁이가 낸 통로를 통해 땅 속 깊숙한 곳까지 산소가 공급되고 그곳을 통해 빗물이 공급된다.
또 지렁이는 일년에 1천배 이상 증식하는 등 증식률이 매우 뛰어나 1~2년간만 퇴비를 주면 산성화된 토양이 살아있는 토양으로 변하게 된다. 지렁이가 살고 있는 토양은 비옥하고, 특히 질소량이 증가되는데 그것이 지렁이의 시체가 흙속에서 썩어 분해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지렁이가 땅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셈이다.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과학 칼럼니스트인 칼 짐머의 <기생충 제국>에서 저자는 생태계의 엑스트라 기생충에게 '생태계의 파수꾼'이라는 새 역할을 부여한다. 기생충이 숙주와 경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숙주와 기생충 모두 진화한다는 것. 그 사이 먹이사슬은 정교해지고 지구 생태계는 탄력을 유지한다.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는 빼앗기고 착취하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발전하는 공생의 관계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상생과 보완의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몇몇 기생충은 숙주의 면역체계를 보호한다. 아프리카 빅토리아 호수의 세차원들은 주혈흡충증에 자주 감염되는데 흡충은 흡충과 에이즈에 동시에 감염된 사람들보다 흡충에만 감염된 '깨끗한' 숙주에 더 많이 알을 낳는 것으로 조사됐다. 숙주가 면역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흡충이 나서 도와야 하는 이유다. 한번 주혈흡충에 감염된 사람은 새로 흡충에 감염되기 어렵다는 연구도 있다.

 

 <똥은 참 대단해>에서 똥은 더럽고 불결한 존재라는 인상을 깨끗하게 지운다. 똥이야말로 참으로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농사를 잘 지으려면 거름이 있어야 하고, 거름으로는 똥만큼 좋은 게 없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밥은 줘도 똥은 못 준다"는 말을 하셨던 것이다. 허은미, 김경호 저자들은 지렁이, 달팽이, 코알라 등 동물의 똥이 동물의 몸집과 먹이, 사는 곳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재미있는 글과 그림으로 알려준다. 똥은 쇠똥구리 애벌레나 새끼 코알라에게는 중요한 먹이가 되고 씨앗을 멀리 퍼뜨려 식물을 번식하게 하기도 한다. 또 흙이 되어 과일과 채소, 곡식을 자라게 한다. 허은미는 자기가 눈 똥을 변기에 버리면서 "안녕, 똥아. 또 만나!"하고 인사하는 딸아이를 보면서 이 글을 쓰게 됐다고 한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읽으며 자연친화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면 좋을 책이다. 똥을 더럽다고만 생각하면 우리는 자연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조안 엘리자베스 록의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는 벌레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알려준다. 편협한 생각과 편의주의로 매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곤충은 해충으로만 보이기 쉽다.곤충은 해롭고 나쁜 것이라는 일반적인 교육 개념이 아이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하게 만들고, 성장하면서 그런 것들이 습관화되면 곤충이란 무섭고 해로운 것이라는 개념만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된다. 그렇지만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는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잘못된 편견을 깨뜨리고 곤충이란 이롭고 아름답고 멋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첫 걸음을 내딛게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좋지 못한 시각으로 바라보던 곤충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고 있으며 우리의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일깨워준다.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교사. 출판인회의 이달의 책 선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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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10-28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좋은 책 정보 많이 봤습니다.
오늘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감각의 박물학 2005-10-28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블로그에 있는 이하석의 시는요 제가 대학때 아주 좋아했던 시였습니다.
당신을 읽으면 언제나 나는 무한으로 열리는/내 몸을 느껴요. 도꼬마리 풀섶 청석 위에서/도꼬마리 노란 꽃이 팔월에 피고/그 꽃이 시월 밤 별로 돋아날 때 우린 이 빈터에서/약혼을 했죠. 도꼬마리 풀섶 청석 위에서,/이 도시의 버려진 빈터에서 내 사랑은/수억 년 전부터 이미 이루어졌던 것. -빈 터 中- 이하석

님의 시를 읽고 옛날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앰 아이 블루?
마리온 데인 바우어 외 12인 지음, 조응주 옮김 / 낭기열라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소수자의 고통을 간과하지 않는 똘레랑스
  앰아이블루, 메리언 데이 바우어 외 12인 지음, 낭기열라, 2005
 
 
고등학교 시절, 절약과 근면이라는 단어는 긍정적 느낌을 주었지만 탕진과 유흥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냄새를 풍겼다. 욕망은 불온한 단어였다. 제도가 우리를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의 장에서 절약과 근면은 적극적으로 권장,옹호되었고 탕진과 유흥은 배제되었다. 박정희로 상징되는 개발독재 시절, 탕진은 그대로 죄악이었다. 모든 시스템이 생산을 위해 집중되어야 했다. 자본의 확대재생산 논리 아래에서는 생산을 저해하는 어떤 논리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생산에 방해가 되는 치렁치렁한 머리는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단죄되었고, 미니스커트 또한 생산라인으로 돌려져야 할 남자들의 시선을 독점한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대통령은 간이복을 입고 생산의 현장을 방문하며 성장을 독려했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사회의 삐딱한 시선을 의연하게 물리치기 위해서는 연대를 형성해야 했다. 그룹사운드가 생기고, 청바지에 맥주 마시고 통기타 두드리는 일단의 청년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해도 시원찮은 판에 그들은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생산의 논리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철퇴가 내려질 일은 당연한 일. 수갑을 차고 줄줄이 구속되는 ‘바보들의 행진’을 바라보면서 어른들은 쯧쯧 혀를 찼다. 그러나 혀를 차는 그들이라고 해서 ‘놀이’와 담을 쌓은 것은 아니었다. 산이면 산 계곡이면 계곡 물 좋은 곳마다 화투판이요, 밤마다 나이트는 흥청댔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잡지 <선데이서울>의 논조는 성장주의자의 반대편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생산에 논리에 정면으로 맞서 욕망의 진정성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소문과 Y담과 연예가 소식으로 공적인 생산의 장에서 소외된 욕망을 충동질할 뿐이었다. 성장과 개발에 대한 강박관념은 모든 유희의 정신을 병들게 했다. 당연히 유희로서의 성(性)은 억압의 대상이었다. 교복은 청소년들의 성적 에네르기를 꽁꽁 가두었다. 몇몇 과도한 성적 에너지를 가진 남학생들이 앞단추를 끌렀고, 어떤 여학생들은 자신의 성징(性徵)을 두드러지게 하려고 교복의 허리 사이즈를 잘록하게 리사이징했다. 권위주의자들은 이런 일탈을 철저히 응징했다. 산아제한 정책론자은 말했다. 셋은 부도덕하다 둘이면 족하다. 낙태의 천국 대한민국에서 산부인과는 유례가 없는 호황이었다.
 
억압이 욕망을 잠재울 수는 없는 법, 모든 금기를 뛰어넘으려는 일탈의 에너지로 욕망은 꿈틀거리는 법이다. 욕망의 논리가 숨통을 튼 것은 1990년대. 천리안과 하이텔이라는 PC 통신 공간을 통해 억압된 욕망의 담론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욕망을 말하는 보드리아르와 라깡과 푸코가 읽히기 시작했다.
 
푸코는 말했다."인간은 자신의 성애(性愛)를 새로운 관계 형식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동성애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생성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푸코가 한 위의 발언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모든 새로운 관계가 긍정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관계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관계의 형성이 평화와 안녕의 유대를 해친다면 마땅히 철퇴가 내려져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관계를 막음으로써 고통의 양이 증가한다면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직설의 어법을 택하면 이렇다. 동성애자의 고통을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13편의 단편이 묶인 소설집, 『엠아이블루』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그것이다. 동성애자들의 고통을 간과하지 말라. 그러나 이 책은 주제를 도드라지게 강조하지는 않는다.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따뜻하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청소년들이다. 청소년 시기는 아직 성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시기다. 생산의 논리만을 독려하는 성장주의자들의 논리에 대항하는 자기만의 대항논리도 갖추기 힘든 시기다. 그들은 나의 욕망은 남들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의 욕망은 틀린 것, 옳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죄의식 속에서 불안을 느껴야만 한다. 나의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 순간, 부모와 형제와의 관계가 훼손되고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해야 한다는 이른바 ‘거세공포증’에 그들은 시달려야 한다.(오! 불쌍한 나의 고등학교 선배.)
 
엘라 피트 제랄드(Ella Fitzgerald)의 Am I blue? <앰 아이 블루>라는 제목만 보고 필자는 이 단편이 재즈를 말하는 내용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 단편은 우울(blue)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호모로 불리며 반친구들에게 얻어맞고 진흙탕에 엎어져 있는 빈센트 앞에 '요정(fairy : 속어로 남성 동성애자를 뜻하기도 함) 대부' 멜빈이 나타난다. 빈센트는 본인이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지만,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그렇듯 그는 자신의 욕망을 외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요정대부는 하루동안 '게이더(gaydar: 동성애자가 다른 동성애자를 식별하는 능력을 부여해주는 안경, 이 안경을 쓰면 동성애자들이 파랗게 보인다) ' 를 쓰게 해준다.
 
자 이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통계상으로 전체 인구의 5~10%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면 열에 아홉쯤은 파랗게 보일 것이 분명하다. 엄청난 숫자다. 작가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모두 성적 일탈자로 규정하는 것은 정당한가? 만약 그 안경을 쓰고 도서관에 가면 무슨 일이 생길까. 토마스 만, 마르셀 프루스트, 아르튀르 랭보, 폴 베를렌, 앙드레 지드, 장 콕토,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폴 틸리히, 언어분석철학의 선구자였던 루드비히 폰 비트겐슈타인과 불란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철학자 미셸 푸코, 현대의 저명한 교육사상가 로렌스 콜버그, 세계적인 가수 엘튼 존, 영화배우 제임스 딘, 알렉산더 대왕을 기록한 책들이 파랗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들은 모두 불온한 서적들일까. 요정대부 멜빌은 말한다. “그 안경을 쓰면 그 동안 쭉 게이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왔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잘 지냈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 세상에 게이경찰, 게이농부, 게이교사, 게이군인, 게이부모, 게이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게 될 거야. 우리도 드디어 숨어 살 필요가 없게 되고.”
 
<어쩌면 우리는>이라는 단편에서는 어머니의 만류를 무릅쓰고 자기가 레즈비언임을 밝히는 자신의 손녀를 이해해주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너그럽고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할머니이기 때문일까. 천만에다. 그 할머니는 생전에 유태인이라는 소수자로서 치떨리는 고난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소수자로서의 고통을 손녀에게만은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손녀를 받아들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가족의 논리다. 소수자의 고통을 간과하지 않는 똘레랑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라고 했던 볼테르의 말은 동성애자들을 위해서도 여전히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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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와 함께 탄 KAL기

2000년 7월 17일, 김포공항을 떠난 비행기 안에서 나는 까뮈를 꺼냈다. 까뮈 연구가인 김화영 교수의 『문학상상력의 연구』, 아름다운 책이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학위논문이 김화영 교수의 특유의 미문 속에서 더 이상 이론서이길 그친다. 나는 이 책을 여섯 번을 읽었다. 바슐라르와 까뮈, 김화영, 이름만 들어도 감성의 현(鉉)을 떨게 하는 대가급 에세이스트들의 유혹적인 문장이 이 책엔 얼마든지 있다. 이 책에서 바슐라르는 말한다. 「자기가 본 것을 미리 꿈꾼 적이 없다면 이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 제대로 보려면 미리 꿈꾸지 않으면 안된다.. 김화영은 바슐라르에 이런 주석을 달고 있다. 「참으로 꿈꾼다는 것은 딴 데 정신이 팔린 상태가 아니라 거기에 충만하게 현존하는 것이며 빛 가득한 하늘의 거대한 꽃을 바라보는 것이며 세계의 광대한 육체를 시선의 살로 껴안는 것이다.」 나는 미국을 내 시선의 살로 껴안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미국을 미리 꿈꾸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미국이 내키지가 않았다. 너도 미국, 나도 미국일 때, 나 하나라도 삐딱할 수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The 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진 셈, 어쨌거나 비행기의 항로를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여행,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정

「티파사, 그곳에서는 세계가 언제나 새롭기만한 빛 속에서 매일같이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까뮈가 그의 수필 「여름」에서 말한 이런 곳을 누군들 마다하랴. 관습의 때를 벗겨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땅, 모든 기존의 룰들이 지배와 구속의 힘을 잃어버리고 존재들이 자신의 독자성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땅. 내가 나로서 비로소 호흡할 수 있는 곳. 작품「이방인」에서 뫼르쏘는 한 사내를 해변에서 쏘아죽이고 돌아오면서 비로소 행복의 의미를 이렇게 음미한다. 「활짝 열린 공기와 풍요한 하늘 속에서, 그는 인간이 해야 할 유일한 임무는 사는 일, 행복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불행의 표정이 마치 영혼의 고상함을 말해주는 척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용케도 까뮈는 행복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임을 역설한다. 까뮈는 칙칙하지 않다. 불행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나의 여행용 가방 속에 까뮈를 대동한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까뮈는 내슝이나 청승을 떨지 않는다. 동기야 어쨌든 여행은 행복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 아니겠는가.

기내에서
 
좁다. 쪼그리고 있자니 불편하다. 옆에 아리따움에 교양까지 겸비한 아가씨라도 있다면 12시간 넘는 비행거리가 짧게 느껴지겠지만 길어도 이건 너무 길다. 바깥 바람이라도 쐬고 싶지만 나중에 스튜어디스에게 욕먹을 걸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최성도 선생도 잘 견디는데, 까뮈나 축내면서 버티는 거다. 가끔 허리 라인이 나긋나긋 맵시 있는 스튜어디스들이 시각에 삽상한 느낌을 준다. 12시간 이상의 비행시간을 버텨내면서 푸대자루 같은 스튜어디스를 본다는 것도 고문일 것이다. 스튜어디스들이 필요 이상의 미모를 가진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로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여행엔 이런 의외의 깨달음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졸다 깨다 졸다 깨다 보니 샌프란시스코다. 비가 많고 습한, 이 도시는 축축하고 끈끈하다. 자살율이 높은 도시라는 것도 일리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곳은 미국인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란다. 바슐라르는 「물은 우리로 하여금 완전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해준다」라고 했다. 금문교에는 자살을 만류하는 권고문이 쓰여있다. 금문교 아래의 물은 완전히 죽을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좋다. 여행의 첫날이라면 금문교에서의 자살은 일단 보류하는 것이 좋다. 아직은 더 보아야 할 것들이 많다.

이탈리아 어부들의 선박지였다는 Fisherman's Wharf에서 관광선을 타고 금문교 아래를 지나다 보면 멀리 알카트라즈 섬이 보인다. 영화 「The Rock」에서 숀코네리와 니콜라스 케이지가 눈부신 액션을 보여주었던 섬, 알카트라즈는 연방정부의 형무소가 있어 '악마의 섬'으로 불려졌다는 곳이다. 그 이유는 물살이 거세어 탈출이 불가능한 점도 있지만 거기서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죄수를 참을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전설적 갱스터 알 카포네도 그곳에 갇혀 있었다던가.
 
샌프란시스코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이라 안개로 유명하다. 안개는 보여주면서 동시에 가린다. 안개는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보여준다. 나타나는 듯 하면서 사라지는 것이 안개다. 내 가방 속의 김화영은 『문학상상력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안개는 탈출, 혹은 출발이라는 의미 자체를 말소시킨다. 물의 감옥은 한계가 없는 감금의 공간이다. 안개의 지옥은 천국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밖으로 나간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밖'이란 것을 무화시키는 것이 안개이기 때문이다.」

안개는 알카트라즈보다 더 지독한 감옥이었다. 그 감옥에서 빠져나오려고 무수한 사람들이 금문교 아래로 자기 몸을 던졌는지도 모른다. 윤회의 수레바퀴가 금문교 아래에서 덜커덕 멈출 수만 있었다면 그들의 선택은 현명한 것이었으리라.

1박을 하다. 10팩이면 충분하다는 소주를 첫날 다 마셨다. 그래서인지 이후 내 두개골 속을 샌프란시스코의 안개가 줄곧 따라다녔다. 醉生夢死!!!

고속도로, 프리웨이

줄곧 길이다. 영화 「아이다호」의 풍광이 그대로 펼쳐진 길을 버스는 줄곧 달린다. 끊임없는 화물차들의 질주. 그것은 내가 본 가장 미국적 풍경이었다. 세이지 브러쉬 sage brush라는 풀이 사막에 지천으로 피어있다. 길은 지평선에서 지평선으로 이어진다. 하늘엔 구름 한점 없다. 바로 이곳이 미국의 서부다. 끝없는 평원,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는 아몬드 숲과 포도밭이 미국의 풍요를 말없이 웅변한다. 미국은 무궁한 엽록소의 공장이다. 그 공장에서 생산된 과실들은 이미 세계인의 입 안에 침투한 지 오래다. 선키스트 sun-kissed = sunkist 태양이 입맞춤한 포도와 오렌지가 그것.

한 점의 구름도 볼 수 없었다. 까뮈는 티파사가 태양과 대지가 결혼하는 곳이라고 했지만 캘리포니아 또한 빛의 사원이었다. Mamas(엄마)와 Papas(아빠)는 이미 늙어 Grandmamas와 Grandpapas가 되었겠지만 그들의 노래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늙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아마도 캘리포니아의 투명한 햇살에 바쳐진 송가(頌歌)였으리라. 왕가위의 영화 「중경삼림」에서 왕정문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도 그 무구한 햇살이 아니었을까.

이글스(Eagles)의 <호텔 캘리포니아>도 매력적이다. 12현 기타로 시작되는 도입부부터 마지막 솔로와 앙상블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 땅위의 젊은이들에게 이국적 동경을 불러일으켰던 Eagles의 <호텔 캘리포니아>. 호텔이라는 단어와 캘리포니아라는 단어의 낭만적 어울림, 거
기에 물 흐르듯 이어지는 기타의 선율, 그 선율 속에서 캘리포니아는 구체적 지명이 아니라 꿈 너머 피안의 지명이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요세미티는 미국인의 식성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다. 산에서는 식욕이 돋는 우리네 민족과 미국인들의 식욕은 사뭇 다르다. 미국의 국립공원엔 우리나라의 북한산에서와 같은 카페도 없고 음식점도 없으니 말이다. 좋은 산과 계곡이면 어김없이 도토리묵과, 오리탕, 붕어찜, 사철탕, 송어회집이 즐비한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인들에게 자연은 먹고 마시고 두들기고 피박 쓰고 설사하고 노래하는 곳이다. 계곡마다 고기 굽는 냄새요, 쩍쩍 화투패가 짝맞는 소리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자연을 가만 내버려 둔다. 조금이라도 자연에 손상을 가하면 가차없이 벌금형을 가한다. 참으로 동방예의지국의 한 신민(臣民)이 볼 때 불경스럽기 짝이 없다. 자연은 너그러운 것인데 자연에 조금 손상을 가했다고 벌금형이라니 그건 오히려 자연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를 보라. 강을 죽이든 살리든, 강물에서 물고기의 씨를 말리든 말든 얼마나 관대한가. 환경이야 어떻든 일단 짓고 보는 것이 한국의 골프장이 아닌가. 자연이 조금 상한다고 해서 호들갑을 떨지 않는 그런 관대함과 대범함이 미국인들에는 없다.

콜로라도 강에서는 팔뚝만한 고기들이 논다. 그래도 물고기에 관심이 없는 미국인들은 물고기들을 가만 내버려둔다. 우리네 민족은 그에 비해 얼마나 활달한가. 그물을 치든지, 어항을 놓든지, 아니면 밧데리에 철선을 연결해 냇가의 고기를 싹쓸이까지 하지 않던가. 일찍이 인디언의 영토를 빼앗은 이 인정 없는 민족은 다람쥐에게도 먹이를 주지 않는다. 내 짧은 영어 실력은 요세미티 공원에 있던 푯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저렇게 살게 내 버려둬. 인간의 음식은 야생동물을 망칠 뿐이야. 제발 게네들을 먹이지 말라구.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동양철학자 김용옥은 Let it be로 풀이했던가. 노자도 읽지 않은 저들은 자연을 내버려 둔다........ 프레즈노에서 2박을 하다.

칼리코 기념품점에서 전갈을 산 이유

3일 째, 아침엔 칼리코 은광촌에 들러 기념품 가게에서 전갈을 샀다. 자그마치 15 개를 샀다. 물론 죽은 전갈을 플라스틱으로 코팅을 해놓은 것이다. 동료들에게는 한국에 돌아가 전갈 패밀리에게 하나씩 돌리려고 샀다고 둘러댔지만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황지우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온몸에 번진 적의(敵意)여, 전갈은 독이 올랐을 때, 가장 아름답다.> 젊음이 지어낼 수 있는 노래다. 조금 여유 있는 나이가 되면 헐거운 것, 조금 맥빠진 것도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이가 있다. 발라드류의 감미로움보다 메탈류의 강렬함이 아름답고, 은근하고 우아한 것보다 섬광과도 같이 폭발하는 것이 아름다울 때가 있는 법이다. 자상한 이야기보다, 달콤한 속삭임보다 하나의 외침과 절규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니이체는 진리는 미풍처럼 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이 반드시 진리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한 잔의 독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전갈이 제 몸 속에 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음지의 덕이다. 독poison이다. 패키지투어가 아니라면 그런 독과 만날 수 있는 곳이 사막이다. 그러나 사막의 기념품 가게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불행하게도 박제된 전갈이다. 『문학상상력의 연구』에서 김화영은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것을 메마른 광물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저 무서운 힘의 위협을 받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목마른 공간 속에서 한발한발 인간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삶, 혹은 생명 바로 그것이 그(까뮈)를 매혹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사막의 이미지 속에서 그가 포착하여 찬미하는 것은 다름아닌 향일성의 생명의지인 것이다.」

청마 유치환은 그의 시 「생명의 서」에서 노래하고 있다.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하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희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패키지투어에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그런 여행은 안락하지만 깨달음의 깊이는 없다. 하긴 득도를 하려고 미국에 온 것은 아니다. 더구나 4박 5일로선 어림도 없다. 예수는 광야를 적어도 40일은 방황하지 않았던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라스베가스의 입간판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이 있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Life is short. 돌려 말하면 인생은 짧으니 먹고 마시고 노름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흥청망청 써대란 것이다. 교묘한, 그러나 속내가 분명히 들여다 보이는 뻔한 마케팅 전략이다.

마이크 피기스 감독은 이곳을 배경으로 「리빙 라스베가스」를 제작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할리우드의 극작가 벤은 의사도, 가족도 포기해버린 중증의 알콜중독자다. 그런 그의 앞에 창녀 세라가 나타난다. 그들의 비극적 러브스토리가 라스베가스를 무대로 선택한 것은 썩 훌륭한 배팅이다. 라스베가스에서 어떤 형이상학적 깊이도 찾아선 안 된다. 그곳에 있는 것은 도저한 절망의 깊이요 환락의 깊이다. 나는 그 깊이를 단지 냄새 맡을 수 있을 뿐이다. 라스베가스 어느 곳이라도 호텔 밖은 퍽퍽 찐다. 이 열기를 피하려면 조용히 호텔로 들어가 머시인에 코인을 넣는 수밖에 없다. 대박을 터뜨리고 싶다는 야망도 없는 나는 일찍 잠든다.
잠자리에서 생각하니 호텔의 이름이 사하라다. 사하라, 死하라. 늙지 않는 욕망이여 사하라.

그랜드 캐년
 
오전에 후버댐을 지났다. 이런 웅장한 스캐일 뒤엔 반드시 숨겨진 희생이 있게 마련, 엄청난 중국인들이 그 댐의 건설에 희생되었단다. 근처의 기념품 가게에 들러 또다시 전갈을 샀다. 전갈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고 동료들은 놀려댄다.
 
그랜드 캐년, 이런 풍경 앞에선 입을 닫고 가만 있으면 된다. 꼭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저녁엔 라플린이란 곳에 가서 잤다. 조그만 휴양도시고 도박도시다. 콜로라도 강이 흐르는 야경이 볼 만했다. 그래도 한 번 땡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동료들의 충고를 따랐더니 20불을 잃었다. 안 하는 게 따는 거란 생각에 맥주 먹고 잤다. 아침에 주머니에 25센트 짜리 동전이 하나 있길래 넣고 당겼더니 80배가 터졌다. 이런!

인디언의 사막, 백인들의 로스엔젤레스
 
올드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서부영화는 개척자인 백인은 선하고 인디안들은 괴성을 지르며 포장마차를 습격하기가 일수였다. 포장마차를 구하는 명사수역은 게리 쿠퍼와 존 웨인이 맡고 나섰으며 나팔을 울리며 극적으로 당도하는 기병대는 관객들의 박수를 받아내기에 족했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에 케빈코스트너가 주연을 한 영화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에 와서야 비로소 인디안들은 피와 눈물이 있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제는 적이 안되겠다 싶었던가 보다. 미국의 인디안들은 더 이상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제는 동정의 대상이 된 것이다. 멸종되어 가는 버팔로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는. 시애틀 추장이 1800년대에 미국 정부에 보냈다는 편지는 저간에 인디안의 이미지가 백인들에 의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준다. < 우리는 우리의 핏줄 속을 흐르는 피처럼 나무 속을 흐르는 수액을 잘 안다. 우리는 이 땅의 한 부분이며 땅 또한 우리의 일부다. 향기 나는 꽃은 우리의 자매다. 곰과 사슴과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바위, 수풀의 이슬, 조랑말의 체온, 사람 이 모든 것이 한 가족이다. 시내와 강을 흘러내리는 반짝이는 물은 단순히 물이 아니다. 우리 조상의 피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땅을 팔면, 이 땅이 신성하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호숫물에 비치는 모든 것은 우리 민족 삶 속의 사건과 기억을 말해준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다. 강은 우리의 형제다. 우리의 갈증을 달래주고 우리의 카누를 옮겨주고 우리 아이들을 키운다. 그러니 당신들은 형제를 대하듯 강을 친절히 대해야 한다. > 그러나 인디안 추장이 썼다는 위의 구절 또한 백인들에 의해 윤색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일방적 악의는 일방적 호감 못지 않게 위험하다.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본 것은 백인들에 의해 윤색된 인디안, 백인들의 굴절된 의식을 거친 황인종이었다. 문화적 제국주의, 할리우드는 이미 우리의 대뇌를 단단히 장악하고 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

말만 유니버셜universal 스튜디오지 따지고 보면 영락없는 아메리칸 스튜디오다. 아메리카의 자본과 테크놀로지가 결합해 막강한 판타지를 만들어 내는 곳이 유니버셜 스튜디오다. 입체 영화를 보고나오는 최성도 선생님의 한 마디가 의미심장하다. 볼수록 기가 질리는 민족이군.
가상이 현실의 기가 질리게 하는 곳, 바야흐로 시뮬레이션의 천국이 유니버셜 스튜디오다. 가상인지 뻔히 알면서도 기가 질린다. 터미네이터란 입체영화는 말 그대로 끝내준다.(terminate) 존재하지도 않는 괴물이 눈 앞에 아른거릴 때, 현실은 증발해 버린다. 형이상학이고 인문학이고 스펙터클과 판타지 앞에선 발 붙일 자리가 없다. 괴성을 지르고 환호를 하면 그만이다. 왠지 그리하고 나니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영락없는 관광이다. 

다시 기내에서

여행이 아니라 관광이었다. 득도를 하러 간 게 아니라 구경을 간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기엔 일정이 너무 짧았다. 무언가를 배우고 곰삭이기엔 너무 빨리 스쳐 지나왔다. 동료 일행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기에도,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만들기에도 터무니없이 짧았다. 사막의
열렬한 고독 속에 옷자락을 나부끼며 영웅처럼 서있기에도 4박 5일은 너무 짧았다. 하지만 내 나라가 얼마나 힘겨운 땅인가를 알기엔 4박 5일은 충분히 길었다. 비행기에서 두 밤을 세웠으니 일주일이면 가족을 그리워하기에도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요세미티, 후버댐, 라스베가스, 콜로라도, 캘리포니아, 그 이름들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알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워 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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