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 아이 블루?
마리온 데인 바우어 외 12인 지음, 조응주 옮김 / 낭기열라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소수자의 고통을 간과하지 않는 똘레랑스
  앰아이블루, 메리언 데이 바우어 외 12인 지음, 낭기열라, 2005
 
 
고등학교 시절, 절약과 근면이라는 단어는 긍정적 느낌을 주었지만 탕진과 유흥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냄새를 풍겼다. 욕망은 불온한 단어였다. 제도가 우리를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의 장에서 절약과 근면은 적극적으로 권장,옹호되었고 탕진과 유흥은 배제되었다. 박정희로 상징되는 개발독재 시절, 탕진은 그대로 죄악이었다. 모든 시스템이 생산을 위해 집중되어야 했다. 자본의 확대재생산 논리 아래에서는 생산을 저해하는 어떤 논리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생산에 방해가 되는 치렁치렁한 머리는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단죄되었고, 미니스커트 또한 생산라인으로 돌려져야 할 남자들의 시선을 독점한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대통령은 간이복을 입고 생산의 현장을 방문하며 성장을 독려했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사회의 삐딱한 시선을 의연하게 물리치기 위해서는 연대를 형성해야 했다. 그룹사운드가 생기고, 청바지에 맥주 마시고 통기타 두드리는 일단의 청년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해도 시원찮은 판에 그들은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생산의 논리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철퇴가 내려질 일은 당연한 일. 수갑을 차고 줄줄이 구속되는 ‘바보들의 행진’을 바라보면서 어른들은 쯧쯧 혀를 찼다. 그러나 혀를 차는 그들이라고 해서 ‘놀이’와 담을 쌓은 것은 아니었다. 산이면 산 계곡이면 계곡 물 좋은 곳마다 화투판이요, 밤마다 나이트는 흥청댔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잡지 <선데이서울>의 논조는 성장주의자의 반대편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생산에 논리에 정면으로 맞서 욕망의 진정성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소문과 Y담과 연예가 소식으로 공적인 생산의 장에서 소외된 욕망을 충동질할 뿐이었다. 성장과 개발에 대한 강박관념은 모든 유희의 정신을 병들게 했다. 당연히 유희로서의 성(性)은 억압의 대상이었다. 교복은 청소년들의 성적 에네르기를 꽁꽁 가두었다. 몇몇 과도한 성적 에너지를 가진 남학생들이 앞단추를 끌렀고, 어떤 여학생들은 자신의 성징(性徵)을 두드러지게 하려고 교복의 허리 사이즈를 잘록하게 리사이징했다. 권위주의자들은 이런 일탈을 철저히 응징했다. 산아제한 정책론자은 말했다. 셋은 부도덕하다 둘이면 족하다. 낙태의 천국 대한민국에서 산부인과는 유례가 없는 호황이었다.
 
억압이 욕망을 잠재울 수는 없는 법, 모든 금기를 뛰어넘으려는 일탈의 에너지로 욕망은 꿈틀거리는 법이다. 욕망의 논리가 숨통을 튼 것은 1990년대. 천리안과 하이텔이라는 PC 통신 공간을 통해 억압된 욕망의 담론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욕망을 말하는 보드리아르와 라깡과 푸코가 읽히기 시작했다.
 
푸코는 말했다."인간은 자신의 성애(性愛)를 새로운 관계 형식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동성애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생성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푸코가 한 위의 발언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모든 새로운 관계가 긍정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관계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관계의 형성이 평화와 안녕의 유대를 해친다면 마땅히 철퇴가 내려져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관계를 막음으로써 고통의 양이 증가한다면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직설의 어법을 택하면 이렇다. 동성애자의 고통을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13편의 단편이 묶인 소설집, 『엠아이블루』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그것이다. 동성애자들의 고통을 간과하지 말라. 그러나 이 책은 주제를 도드라지게 강조하지는 않는다.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따뜻하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청소년들이다. 청소년 시기는 아직 성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시기다. 생산의 논리만을 독려하는 성장주의자들의 논리에 대항하는 자기만의 대항논리도 갖추기 힘든 시기다. 그들은 나의 욕망은 남들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의 욕망은 틀린 것, 옳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죄의식 속에서 불안을 느껴야만 한다. 나의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 순간, 부모와 형제와의 관계가 훼손되고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해야 한다는 이른바 ‘거세공포증’에 그들은 시달려야 한다.(오! 불쌍한 나의 고등학교 선배.)
 
엘라 피트 제랄드(Ella Fitzgerald)의 Am I blue? <앰 아이 블루>라는 제목만 보고 필자는 이 단편이 재즈를 말하는 내용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 단편은 우울(blue)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호모로 불리며 반친구들에게 얻어맞고 진흙탕에 엎어져 있는 빈센트 앞에 '요정(fairy : 속어로 남성 동성애자를 뜻하기도 함) 대부' 멜빈이 나타난다. 빈센트는 본인이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지만,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그렇듯 그는 자신의 욕망을 외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요정대부는 하루동안 '게이더(gaydar: 동성애자가 다른 동성애자를 식별하는 능력을 부여해주는 안경, 이 안경을 쓰면 동성애자들이 파랗게 보인다) ' 를 쓰게 해준다.
 
자 이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통계상으로 전체 인구의 5~10%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면 열에 아홉쯤은 파랗게 보일 것이 분명하다. 엄청난 숫자다. 작가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모두 성적 일탈자로 규정하는 것은 정당한가? 만약 그 안경을 쓰고 도서관에 가면 무슨 일이 생길까. 토마스 만, 마르셀 프루스트, 아르튀르 랭보, 폴 베를렌, 앙드레 지드, 장 콕토,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폴 틸리히, 언어분석철학의 선구자였던 루드비히 폰 비트겐슈타인과 불란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철학자 미셸 푸코, 현대의 저명한 교육사상가 로렌스 콜버그, 세계적인 가수 엘튼 존, 영화배우 제임스 딘, 알렉산더 대왕을 기록한 책들이 파랗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들은 모두 불온한 서적들일까. 요정대부 멜빌은 말한다. “그 안경을 쓰면 그 동안 쭉 게이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왔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잘 지냈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 세상에 게이경찰, 게이농부, 게이교사, 게이군인, 게이부모, 게이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게 될 거야. 우리도 드디어 숨어 살 필요가 없게 되고.”
 
<어쩌면 우리는>이라는 단편에서는 어머니의 만류를 무릅쓰고 자기가 레즈비언임을 밝히는 자신의 손녀를 이해해주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너그럽고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할머니이기 때문일까. 천만에다. 그 할머니는 생전에 유태인이라는 소수자로서 치떨리는 고난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소수자로서의 고통을 손녀에게만은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손녀를 받아들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가족의 논리다. 소수자의 고통을 간과하지 않는 똘레랑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라고 했던 볼테르의 말은 동성애자들을 위해서도 여전히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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