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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마르틴 부버 지음, 김천배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7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고도의 산업사회에서 현대인들은 과학기술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몇 세기 전의 사람들에 비해 결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물질 중심 문화는 물질 추구에 대한 강박증을 초래하고 있으며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현대인들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있다.
마르틴 부버는『나와 너』에서 현대사회의 이러한 비극적 상황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데서 오는 것으로 보고, 인간회복을 위해서는 ‘나와 너’의 참된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버에 의하면 인간이 세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두 가지의 주요한 태도는 ‘나-그것’의 관계로 표현되는 사물세계와 ‘나-너’의 관계로 표현되는 인격적 만남의 세계이다. 따라서 어떤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인간 삶의 양상도 달라진다.
‘나-그것’의 세계는 경험과 인식과 이용의 대상이 되는 세계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사람들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다. ‘나’와 ‘너’와의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직 ‘나’와 도구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뿐이다. 그 만남은 차갑고 냉담한 만남이다. 그 만남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114 다이얼을 돌려보라. 친절한 목소리가 당신을 반길 것이다. 전화번호 안내가 끝나면 전화기 속의 목소리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 아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인사일 뿐이다. 바로 이런 관계가 이른바 ‘도구적 관계’이다. 마르틴 부버의 표현을 빌면 ‘나-그것’의 관계다.
경제적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본가는 노동자를 인격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생산의 한 요소로 생각한다. 생산현장에서 노동자의 성격과 취향과 개인적 처지를 하나하나 고려하는 것은 오히려 생산의 능률을 떨어뜨리는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가급적이면 노동자를 추상화된 단위로 차갑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런 ‘냉담함’이 ‘나-그것’의 관계를 이루는 정서다.
사물을 대할 때 이런 냉담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세계를 경험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내’가 ‘그것’을 대상으로 소유하고 이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의 세계는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어떤 것’일 뿐, 경험하는 주체와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인격적 존재를 대할 때 이런 냉담함은 문제가 된다. 나는 나의 욕망대로 사물은 소유할 수 있지만, 나의 욕망대로 타인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 또한 욕망의 소유자이고, 타인 또한 스스로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행복추구권은 나와 타인, 모두에게 동일한 권리이다. 나만의 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사물을 부리듯 사람을 부릴 수는 없다. 사람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하면 자유의 유무다. 자유는 외부에 얽매이지 않음이다. 외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에게서 말미암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스스로에게서 말미암을 수 있는 능력은 사고력, 즉 판단력과 이성에서 온다. 정신지체자, 알콜중독자, 약물중독자처럼 이성적 사유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 사물을 대하듯 부린다면 인권침해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칸트는 “자기와 남의 인격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대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서 대우하라는 말이다. 마치 도구처럼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사용자는 피고용인을 자신의 이익을 달성해줄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매춘이 버젓이 이루어지는 현실을 보면,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인격이 목적으로 대우받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적어도 매춘에 있어서는 타인을 ‘내’ 욕망을 실현시켜줄 도구로서의 ‘그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맺는 타인과의 관계를 ‘나-그것’의 관계로 경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파출부, 운전사, 배달부와 ‘나’와의 관계는 내 인격을 모두 드러내놓고 맺는 ‘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일정 부분만 드러내놓고 맺는 ‘나-그것’의 관계다. 이러한 ‘나-그것’의 관계가 도구적 관계다.
이 관계는 차가운 관계다. 정서적 교류가 없고, 공감이 없기 때문이다. 아서 밀러의 희곡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이 겪는 소외감도 바로 이런 차가운 관계에서 비롯된다. 세일즈맨은 차가운 관계의 상징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하지만 그들과 진정한 정서적 교류를 하지는 않는다. 나의 쓸쓸함을 토로할 수도 없고, 나의 기쁨을 나누어 가질 수도 없다. 항상 고객들에게 친절한 표정을 지어야만 한다. 바로 그것이 이른바 ‘감정노동’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는 감정노동이 얼마나 피로한 노동인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마르틴 부버가 말하는 진정한 관계는 ‘나-너’의 관계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않고 목적으로 대우하는 관계요, 사람을 사물이나 도구로 대하지 않고 인격으로 대하는 관계이며, 사람을 부분이나 요소로 생각하지 않고, 그의 모든 면을 고려하는 관계다. 이런 관계에서는 사람은 더 이상 생산의 한 요소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한낱 이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과연 대한민국의 모든 병원들이 환자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운영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병원의 경영난을 생각해서 의사는 환자에게 고가의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해볼 수도 있다. 굳이 그 의약품이 아니더라도 그보다 저렴한 대체 의약품이 있는 경우에도 고가의 의약품을 권할 수도 있다. 이것이 이른바 ‘과잉진료’다. 의사로서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신발 장사는 필요한 만큼의 신발이 있는 사람에게 새 신발을 권하고, 옷 장사는 입을 수 있는 만큼의 옷이 있는 사람에게 새 옷을 권하듯 모든 영업 행위자들은 소비자에게 필요 이상의 ‘과잉’을 권유하는 법이다. 의사는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자선사업가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 죄악이 아닌 이상 영리를 목적으로 과잉을 권하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라고. 그러나 과잉진료에서 환자는 병원의 영업이익을 실현시켜줄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과잉은 도처에 넘쳐난다. 비단 병원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환자는 수단이 될 수 없다. 마르틴 부버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너’의 관계에서 ‘나’와 ‘너’는 서로 전존재를 기울여 전인격적으로 관계한다. 이러한 관계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적인 관계다.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고받음’의 관계다. 모자지간을 생각해보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머니 또한 아들로부터 정서적 만족을 얻는다. 아들 또한 어머니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연인의 관계가 바로 상호적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있음으로 해서 ‘너’의 기쁨이 있고, ‘너’가 있음으로 해서 ‘나’의 기쁨이 있다. ‘너’는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유일무이한 ‘너’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아들이 정신적으로 미숙하다고 해서 교체를 원하는 부모가 있겠는가. 사람은 사물이나 도구와 달리 ‘대체불가능’한 그 무엇이다.
‘나-그것’의 관계에서의 ‘나’와, ‘나-너’관계에서의 ‘나’는 서로 다르다. ‘나-그것’의 ‘나’는 내 욕망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이지만, ‘나-너’의 관계에서의 ‘나’는 내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아울러 생각하는 인격적 존재다.
이처럼 부버는 관계의 개념으로 인간의 위치 및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참다운 인간존재는 고립된 실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형성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부버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관계를 통해 그의 실존을 형성해 나가는 창조자로 파악된다. 즉 그는 그의 철학적 인간학의 기본사상을 ‘인간실존의 기본적인 사실은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함께 있다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나-그것’의 관계에서 대화는 없다. 대화는 오히려 능률과 효율을 저해한다. ‘나-그것’의 관계에서의 미덕은 오직 효율성과 생산성일 뿐이다. 상업적 거래에서 상대편의 사정을 고려해서는 오히려 거래를 그르칠 수가 있다. 거래하는 상품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말해야겠지만 거래당사자에 얽힌 사적인 정보는 불필요하다. 당연히 이런 거래에서 대화는 불필요하다. 우리들은 이렇게 대화적 관계를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부버에 의하면 현대인은 ‘나와 너’의 대화적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의 비대화적 관계에 매몰되어 살아가고 있다. 고객과 세일즈맨의 관계가 바로 비대화적 관계다. 수많은 정보들이 교환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없다.
세일즈맨은 수많은 사람을 만나겠지만 그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라고 할 수 없다. 부버는 삶은 곧 ‘만남’이라고 보며 삶 자체를 만남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부버는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만남은 피상적인 것이며, 진정한 만남은 ‘나-너’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동의보감의 허준은 그의 스승인 유의태를 만나 뛰어난 명의로 거듭난다. 눈과 귀가 먼 헬렌 켈러는 설리반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났음을 상기해보라. 진정한 만남은 이렇게 존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부버가 지적하는 ‘나-그것’의 관계, 타인을 도구로서 대하는 관계는 우리 주위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미 사회에서 인간은 그의 인간성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도구적 유용성으로 평가되는 것이 그 하나의 사례다. 사용자는 피고용인의 인격을 문제 삼기보다는 그가 우리 회사에 얼마나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자질을 가졌는가를 문제 삼는다. 당연히 그의 자격증과 토익점수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가 양심, 동정심과 같은 좋은 인격적 특성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업이익에 지장을 주는 것이라면 그가 고용될 가능성은 희박해질 것이다. 그것이 냉혹한 오늘의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사람의 평가는 그의 인격적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도구적 유용성의 기준에서 평가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 시장에서 인간은 인격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품이다. 소외는 바로 인간의 상품화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