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캐비닛


  (……전략……)

  나는 글쓰기에 있어 재능과 천재성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환상이다. 그것은 작가란 존재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높은 곳에 있다고 믿는 선민의식의 슬픈 유물이다. 문학이 인간의 이해에 그 뜻을 담고 있다면,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사랑함에 있어서 재능이라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겸손과 성실함이지 재능과 천재성이 아니다. 우리는 술자리에서나 호기롭게 힘을 발휘하는, 이 어줍잖은 재능과 천재성이라는 말로 자신의 게으름을 속이고, 방종과 타락에 면죄를 받았으며, 스스로를 재능 있다 믿는 일군의 무리 속에 들어앉아 킬킬대며 세상의 많은 정직함을 비웃고 상처 주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나는 재능과 천재성이라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은 오로지 체력뿐이다. 지치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것. 겸손하게 사람에게로 다가가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래서 책상에 앉아 스탠드에 우두커니 불을 켜고 자신이 읽어낸 인간의 작은 부분에 대해 매일 밤마다 조금씩 조금씩 글을 쓰는 것이다.

  (……후략……)


  - 2003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부문 당선작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의 수상소감 中


  나는 공감한다. 글쓰기가 재능과 천재성이 아니라, 겸손과 성실함이며 믿는 것은 오로지 체력뿐이라는 말을 절실히 공감한다. 작품이 아닌, 수상소감만으로 팬이 된 느낌이었다. 이 수상소감을 읽고 나는 김언수라는 작가에 대해 기대를 가졌다.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란 믿음을 가졌다. 해마다 신춘문예 수상자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 중에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작가만은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글을 쓰리라 생각했다.

  이윽고 3년의 시간이 지나, 나는 다시 김언수 작가와 재회했다.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캐비닛』.

  그는 결국 내 믿음을 배신하지 않고, 3년간 공들인 작품을 선보였다. 나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마냥 기뻤다. 한편으로는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쉽게 글을 놓았을 리는 없으니까.

  김언수가 읽어낸 인간의 작은 부분에 대해 매일 밤마다 조금씩 조금씩 쓴 글을 마침내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거렸다. 게다가 책 소개글을 보면 현대 사회에 나타난 다양한 증상을 가진 인간들을 다루고 있다지 않은가! 마치 수상 소감을 염두에 두고 쓴 글 같아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긴장시킨 점은 환상성이다. 요즘 국내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많이 보이는 환상성은 이제 더는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언수의 첫 장편이 환상성이 풍부한 글이라는 점에서 나에게 딱 맞춰진 맞춤 선물이란 느낌을 받았다. 이건 꼭 사야해. 반드시 읽을 수밖에 없다고.

  손에 두툼한 책 한 권이 잡혔다. 작가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미묘한 기대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기분 좋은 소설. 그래, 정신없이 빠져들어 책을 손에 놓지 못할 것 같은 기분.

  자, 그럼 이제 13호 캐비닛을 열어보도록 하자.


  유쾌한 상상력?


  이 책은 심토머에 관한 이야기다. 심토머란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징후를 가진 사람들. 심토머. 그들은 새로운 종일까?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이 지구를 아끼고 사랑해줄 수 있는 박애적인 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심토머들의 모습에선 인간의 그림자가 보인다. 동전의 양면처럼 환상과 현실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고, 몇 년이고 잠에 빠지기도 하고, 시간이 쾅하고 사라지고, 양성을 다 갖고 있고,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기도 한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슬픈 모습이 겹쳐 보인다. 이 책은 심토머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또한 그 심토머에 관한 캐비닛을 관리하는 화자의 이야기이기도하다. 화자인 공대리의 모습은 첫 장에 나오는 루저 실바니스와 닮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토머들의 모습도 상피에르 사람들의 변형된 묘사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소외된 사람들, 유리된 사람들의 변형된 묘사처럼 읽혔다.

  이 책은 심토머들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또한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는 양면이다. 자본주의 시대 속에 도시는 각박하다. 다들 가까스로 버티는 삶이다. 누군가는 심토머가 되고 누군가는 견디고 누군가는 기록한다. 이 책은 따스하지도 냉혹하지도 않다. 그저 담담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또 이렇게 살아갈 거라고. 당신은 버틸 수 있느냐고. 또 앞으로 어찌하겠느냐고.


  이 책은 일반적인 장편 서사 형식을 취하고 있지 않다. 에피소드 별로 이야기가 잘게 나누어져 있고 그것조차 순서가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구성의 신선함이랄까. 사실 읽으면서 이건 옴니버스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이야기들의 연속인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라는 우려를 했다. 즉, 결말이 없이 소개로 끝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3부에서 주인공 화자를 부비트랩에 밀어 넣으면서 이야기를 급박하게 결말로 끌고 간다. 어찌 보면, 앞의 2부와는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르고 화자에 불과했던 주인공이 본격적인 이야기의 주체로 나오면서 위화감이 들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작품의 평이 안 좋은 면이 있고 나 역시 좋은 끝맺음이라고 보진 않았다. 좀 더 나아간 무언가가 있었어야 했다. 지금껏 나온 인물들과 연대하여 무언가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하지만 첫 장의 시작인 루저 실바니스와 마지막 장의 공대리가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되는 부분은 인상적인 결말이다. 씁쓸한 끝맺음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작가는 이 책을 결코 기분 좋게만 읽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환상도 현실도 결코 아름답지 않으며 주인공 화자도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없고, 그건 쓰고 있는 작가 본인 그리고 읽는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하듯이.


  책을 읽으면 낡은 13호 캐비닛의 세계가 보인다. 그 세계는 물론 실제가 아니다. 그러나 작가의 능청스런 입담으로 인해 온통 허구인 내용이 마치 실제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하긴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모든 음식에 식초를 넣어 먹는 여자, 설탕만 먹는 할아버지 등이 버젓이 나오는 판국에 캐비닛 속 심토머들이 석유만 먹고, 유리만 먹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작가는 은유를 집어넣는다. “빵과 고기만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식단은 인간을 결국 신뢰할 수 없고 게으른 존재로 만들죠. 휘발유는 인류의 새로운 대안입니다. 주위를 보세요.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속도의 천국이죠. 그러니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p.24) 처음에 심토머를 소개하면서 맨해튼 컨설팅 2005년 보고서를 들먹거리며 진짜처럼 이야기하는 휘발유를 마시는 사람은 단지 유머를 위해서 등장한 것이 아니다. 캐비닛은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기발하고 황당한 이야기들이지만, 그 속에는 특별히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 모두 우리들의 모습 중 한 면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이토록 정교하게 짜놓은 퍼즐 같은 구성과 다채로운 심토머들의 이야기로 대변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캐비닛은 성공했다. 작가는 능청스런 거짓말로 독자들에게 웃음을 짓게 만들고, 다양한 심토머들을 선보이며 활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면서 동시에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책은 쉽게 읽어지지만 쓰는 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물론 뒤에 수상 작가 인터뷰에서 작가가 이 캐비닛을 쓰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나와 있다. 몇 년간 친구의 지원 속에 고시원을 돌아다니며 글만 써온 덕분에 간신히 탄생한 작품이 바로 이 『캐비닛』인 것이다. 작가의 각오가 새삼 떠올랐다. 그런 각오가 있었기에, 그런 행동이 뒤따랐고, 그 결과를 이제 마주치게 되었다.


  앞서 이 책을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보이는 양상과 비슷하다고 언급했다. 풍부한 환상성. 그것 말고도 신선한 화법으로 무장한 유쾌한 문장들이나, 에피소드별 구성 등에서 기존의 리얼리즘 소설들과는 차별성을 띤다. 이 책의 독자들 반응을 보면 포스트 박민규라는 말이 적잖게 나온다. 아무래도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재기발랄한 글이라는 점이다. 『지구영웅전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등에서 보여준 박민규의 재미있는 문체와 독특한 이야기 전개. 『캐비닛』도 마찬가지다. 읽으면 빠져드는 문체고 유려하면서 재기가 철철 넘친다. 또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커다란 줄거리를 따라가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 아니라 신문에 연재되는 칼럼글을 모아놓은 것처럼 작은 에피소드별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두꺼운 책임에도 쉽게 질리지 않게 하는 요소다. 바쁜 생활 중에 진득하게 앉아 책 읽을 시간이 없는 현대인들. 특히 평일에 이야기가 연속되는 장편 읽기는 많은 부담이 있다. 그러나 『캐비닛』 같은 책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가볍게 몇 개 에피소드만 들쳐볼 수 있다. 잠들기 전에 한 편씩 읽을 수도 있고. 이 시대에 맞는 신형식일까? 어쩌면 이 소설 자체도 기존 소설의 변종이며 심토머일지도 모르겠다.


  잠을 좋아하지만 숙면하지 못하는 내게 가장 매력적인 심토머는 몇 년이고 깊이 잠드는 토포러이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누군가는 여러 사람의 의식이 교환될 수 있는 다중 소속자가 인상에 남았을 것이고, 또 바쁜 일상에 치이는 누군가는 중요할 때마다 시간이 사라져 버리는 타임스키퍼가 인상에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작중에 등장한 고양이만을 좋아하는 여자 때문에 진짜 고양이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를 인상 깊게 본 듯하다. 이 외에도 도플갱어, 메모리모자이커,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블러퍼 등등 다양한 심토머들이 등장한다. 낯설고 환상적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이다. 재미있고 유쾌하지만 또한 씁쓸하고 아쉬운 이야기들. 수없이 봐왔던 단절된 타인과의 관계. 대안도, 해답도, 교훈도 없다. 캐비닛은 그런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캐비닛의 의미는? 화자 역시 끝까지 단정 짓기 어려워하고, 읽는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 도시가 하나의 캐비닛이 아닐까?

  이 책을 읽어보면서 자신은 어떤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은 어떨까? 작가는 친절하게 말해줄 것이다. “아뇨, 당신은 심토머가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당신은 아직 이 도시에서 견딜만 합니다.”(p.293)

  작가의 등단작이었던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도 재미있는 문체와 능청스런 이야기 전개 솜씨를 선보였다. 그러나 분명 비슷한 주제를 천착하면서도 『캐비닛』은 더 발전된 글이다. 그리고 등단작보다 이번 작품이 더욱 출사표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또다시 기대가 된다. 아직 그는 자신의 캐비닛 속을 모조리 드러내지 않았다. 더군다나 캐비닛을 채우는 일도 꾸준히 해나갈 것이다. 믿음이 가는 작가다. 그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지고 있다.

  나는 이제 13호 캐비닛을 닫는다. 그리고 이 『캐비닛』에 관한 글 또한 마치려고 한다. 이제 누군가가 13호 캐비닛을 열어보기를 바라면서. 그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엿보기를 바라면서. 새로운 작가의 탄생에 기뻐하기를 바라면서.

  시작을 작가의 등단 소감으로 했듯이, 마지막 역시 이번 수상 소감을 인용하겠다.


  (……전략……)

  나의 선생은 소설쟁이가 농부, 어부, 막노동꾼처럼 자신의 가족을 위해 신성한 밥벌이를 하는 성실한 사람들에 비해 두 수쯤 아래에 있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선생이 틀렸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허영이므로 소설쟁이는 그보다 최소한 세 수쯤은 아래에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독자들은 작가에게 관용이란 걸 베풀 필요가 없다.

  당신이 이 저열한 자본주의에서 땀과 굴욕을 지불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번 돈으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만큼도,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고 맛있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 올려라. 그리고 멋지게 한마디 해주어라.

  “이 자식아, 책 한 권 값이면 삼 인 가족이 맛있는 자장면으로, 게다가 서비스 군만두도 곁들여서, 즐겁게 저녁을 먹는다. 이 썩을 자식아!”


  그런데도 내가, 겁도 없이, 책을 내게 되었다.

  분수도 모르고 덜컥 상까지 받아버려서 이제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하지만

  귀싸대기 맞을 각오는 되어 있다.


  - 2006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캐비닛』 수상소감 中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장면 세 그릇 이상의 값어치는 하고도 남는다. 그러니 자장면과 캐비닛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도 없고, 손이 맵지 않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
진산 지음 / 파란미디어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진산 무협 단편집 - 더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


  진산은 여성 무협 작가로 유명한 작가이다. 본명은 우지연, 1969년 생이고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1996년 장편 처녀작인 『홍엽만리』를 출간한 이후로 총 여섯 편의 장편 무협소설과 네 편의 로맨스 소설을 발표했다. 그러나 나는 진산의 소설을 어느 것도 읽지 않았다. 무협, 로맨스 장르와 그리 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진산이라는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은 장르문학웹진 이매진의 초대 편집장이었고, 환타지 문화 웹진 워터가이드와 이매진의 후신인 디겐의 고문이었으며, 조선일보에 <성밖에서> 코너에서 장르문학 서평을 적기도 하고, 그 외에도 장르 쪽에서는 자주 접하게 되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 『진산 무협 단편집 - 더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를 읽고 나서 간단한 감상 및 소개를 목적으로 쓰는 이 리뷰글에서는 이번에 실린 작품에 대한 언급만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산의 작품 세계나 장르의 핵심을 꿰뚫는 천재성 등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이 점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광검유정


  그리고 노인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협께서도 무림인이라 하니 내가 하나 묻겠네만, 소협은 무武의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느닷없는 질문에 잠시 멈칫했지만, 청년은 곧 서슴없이 대답했다.

  “쾌快와 강强입니다.”

  “옳네. 얼마나 빠른가, 얼마나 강한가. 이 두 가지가 무武의 도道가 갖는 두 가지 요체라고들 이야기하지. 그래, 소협의 무공은 그중 무엇을 취하고 있는가?”


- 「광검유정」中


  『진산 무협 단편집』에 첫 번째로 실려 있는 단편은 바로 「광검유정」이다.  이 책에는 그동안 진산이 쓴 7편의 단편이 집필 순서대로 실려 있다. 즉, 이 단편은 진산이 쓴 첫 번째 무협 단편인 것이다. 또한, 이 단편은 진산의 무협 쓰기의 계기인 작품이라고도 한다. 1994년 하이텔 무림동의 공모전 공지를 보고 충동적으로 몇 시간 만에 써내려간 글이라는 것이다. 한 문장을 쓰고, 그 다음 문장을 쓰는 식으로 써내려갔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글에 군더더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이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한데, 담백하게 필요한 내용, 필요한 말, 필요한 묘사만 적절히 하고 있다. 과도하게 화려한 묘사로 읽기 버겁게 만들지 않고, 그렇다고 적은 설명으로 내용 이해를 흐트러트리지도 않는다. 그야 말로, 더도 덜도 말고 딱 적정선을 정확히 알고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 세 시간에 걸쳐 완성된 「광검유정」은 당시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지금 보면 내용이 기발하다거나 놀라운 반전 등이 있는 글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전형적인 글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문장 하나하나가 정답만을 찾아간 것처럼 깔끔한 글이라 순식간에 읽고 재미를 느끼게 된다.

  책으로 처음 읽게 된 무협 단편이다. 읽으면서 태생적으로 장편 위주인 무협이라는 장르에서 이런 단편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까지 했다.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서 성조차 무(無)로 칭하고 끊임없이 암사자들을 보내는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하여 그 여자의 아비를 죽이려는 남자. 그리고 전설적인 살인광 광검. 이 단편은 구성이 단조롭지 않고, 각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조금씩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즉, 차츰 나오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퍼즐처럼 모두 조합해야만 전체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결말이 쉽게 예상이 가는 편이나, 오래전 작품이며, 처녀작임을 감안하면 첫 시작으로는 무척 좋았다고 생각한다.


  청산녹수


  “아니, 아니야. 오빠, 이제 은망세銀蟒勢를 보여 줘.”

  황창은 잠자코 누이가 시키는 대로 은망세를 펼쳤다. 은망세란 은빛 구렁이가 휘감아 나가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사면을 두루 돌아보며 칼로 몸을 감아 두르면서 스쳐 베어 죽이는 방법인데, 앞을 향해서는 오른손과 오른다리로 방향을 바꾸어 움직이면서 좌우로 급히 바람을 날리어 번개치듯이 하는 것이다. 거대한 은빛 구렁이가 온몸을 뒤척이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듯이 보인다는 이 검초를 어린 창이 시전하자, 거대하지는 않지만 날렵한 은빛 새끼 구렁이와 같았다. 더군다나 땅에는 눈이 가득 덮여 있어 창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눈가루가 날리니, 말 그대로 은망세였다. 희는 그런 오라버니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창도 누이를 보면서 휘날리는 눈가루 아래서 함박 웃었다.


- 「청산녹수」 中

  

  청산녹수는 1년이 지난 1995년에 쓰인 단편이다. 그러나 1년 동안 진산은 글쓰기를 잊었다가 동기, 후배들과 연극을 하기 위한 비용마련을 목적으로 공모전에 응모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해오지 않았음에도 첫 작품보다 비약적으로 발전된 글을 볼 수 있다. 이 단편은 쓴 시간도 스물한 시간이 걸렸다고 하고, 그만큼 분량도 훨씬 늘어났다. 이야기도 절절하고 다채로우며 운문까지 섞여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가진 여러 가지 특징이나 장점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한반도가 배경이라는 것이다. 신라를 배경으로 화랑이 나온다. 백제와 신라와의 역사적 사실이 작가의 예측불가인 상상력이 결합되어 멋진 팩션을 만들어낸다. 그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가 높다고 느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의 비극성 때문에 기억에도 오래 남았다. 이 책에 실린 많은 단편들이 대부분 우열을 가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각자 가장 인상에 남는 소설 한 두 개를 꼽을 수 있을 텐데, 이 소설은 꽤 여러 사람에게 손꼽힐 만한 소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그러하고.


  백결검객


  그의 형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널 두려워해. 원래 너는 이 세상에 없는 줄 알았어. 10년이나 소식이 없었으니까. 우리도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지. 그리고 네가 다시 나타났을 때, 놀라기는 했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었어. 그래서 적은 인원만을 보냈던 거야. 한데 지금은 그들이 너를 두려워하고 있어.”

  “내가 산장에 갈 수 있다면, 그들은 좀더 두려워하게 될 겁니다.”


- 「백결검객」 中


  진산은 자신의 단편들을 돌연변이라고 칭했다. 그 말이 맞다. 무협은 초인문학이고 성장물이며 성공담이지 않은가. 그런데 진산의 무협 단편은 비극적이고, 회귀하는 내용이며, 해체하는 이야기다. 특히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백결검객」이다. 주인공을 백결검객으로 보자면, 이 단편 소설의 시점은 1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강호에 초행으로 나온 주인공이 백결검객을 따라가며, 강호의 비정함과 덧없을 깨닫고 그 비극에 질려버려 강호에 나서지 않고 평범한 삶을 선택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수많은 장편 무협 소설의 이야기들이 무공을 성취하고 명성을 얻는 것과 상반된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의 무협 단편. 아무리 단편 소설이라 하더라도 관찰자 시점의 글은 많지 않다. 하물며 장르 소설에서는 더 적다는 느낌인데, 이 단편은 이런 시점으로 밖에 쓰일 수 없었고, 또한 애잔한 느낌으로 읽히게 만들었다. 독자는 1인칭 화자와 함께 백결검객의 뒤를 따라가게 된다.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절대적인 실력을 가진 백결검객. 그러나 그가 가진 자신의 어머니일지도 모르는 여자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더듬어가다 보면 강호의 무정함에 대해 화자와 동질감을 느낀다. 참 씁쓸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을 주는 단편이다. 머릿속에 오래 기억될만한 이야기다.


  고기만두


  그가 나를 떠날 때, 내가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일을 그래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때 만일 울어버렸다면 나는 형편없이 무너지고 녹아 버렸을 것이다. 그것을 참아 냈기 때문에 오늘날의 철죽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몹시 분하다. 등을 보이고 떠난 것이 내가 아니라 그라는 사실이다. 난 지금도 내게 등을 보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내가 그에게 등을 보이고 떠날 수 있다면.


- 「고기만두」 中


  제목부터 독특한 「고기만두」는 내용 없이 예사롭지 않다. 굉장한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용이 꼭 무협이 아니어도 될 법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물론 앞에 단편들도 그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무공을 설명하거나 은원을 이야기하는 부분 등에서 무협적인 색채가 짙었다. 무협이 아니고서는 그 맛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을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이 단편은 오히려 무협이기 때문에 어색해 보이는 면도 존재한다. 무협 단편이라고는 하나, 무협의 배경만을 취하고 그 내용물은 로맨스가 주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정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사랑에 빠져 버린 두 남녀. 그러나 남자의 배신으로 둘은 이어지지 못하고 여자는 서른이 되는 십 년 가까이 그를 원망하며, 칼을 휘두르며 강호를 살아가고 있다. 뜻밖에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마음의 교차. 그들의 마음과 선택.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보면서도 내가 주목한 것은 이 소설이 사군자 연작 소설의 첫 번째라는 것이다. 내가 진산의 첫 글을 읽은 것은 글틴에서 본 「잠자는 꽃」이었다. 바로 묵란을 주인공으로 한 사군자 연작 소설의 마지막 작품이었는데, 물론 연작이긴 했어도 완결성이 있어서 그 작품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연작 소설의 재미는 모든 연작 소설을 다 읽음을 통해 머릿속에 연결되는 연대기가 또 참 재미중에 하나가 아닐까? 항상 말이 없는 묵란이 초기작에서도 역시 묵묵히 웃고만 있는 모습이 반가웠고, 처음 보게 되는 철죽, 취국, 소매 역시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었다. 사군자가 다 모여 있는 광경이 생경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정겨워 보였으며 다른 두 편도 어서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웃는 매화


  그녀의 이름은, 웃는 매화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까 형의 서재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한 번도 그녀가 웃는 꼬락서니를 본 적이 없었다. 그 이름은 잘못 지은 게 틀림없다. 물론 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여자라는 짐승이 그나마 예뻐 보일 경우는 딱 두 가지뿐이다. 첫째, 벙어리 여자. 둘째, 소복 입고 조용히 흐느껴 우는 여자. 내가 대답이 좀 늦자, 그녀는 술잔을 조용히 움켜쥐었다. 두꺼운 사기 술잔이 그녀의 손 안에서 가루가 되었다.

  “이름이 뭐냐니까?”

  시끄러울 뿐 아니라 힘도 센 여자다. 내가 싫어하는 두 가지를 모두 갖췄다. 나는 대답했다.

  “철죽.”


  - 「웃는 매화」 中


  난 앞에서 「청산녹수」고 좋았고 「백결검객」도 좋았다. 그러나 독자를 매료시키는 요소는 문체, 이야기, 구성, 작품의 완성도뿐이 아니다. 캐릭터가 얼마나 매력적인가에 따라서 독자는 그 작품의 팬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웃는 매화」는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우선 이 작품의 제목인 「웃는 매화」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소매는, 처음 등장한 「고기만두」편에서부터 인상에 남았었다. 항상 웃고 밝으면서도 어딘가 강인해 보이는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이상형이라고 할까?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는 작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항상 분위기를 주도하는 야무진 캐릭터라는 점이 좋았던 것이다.

  사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매가 아니다. 바로 전 편에서 사군자를 떠난 철죽을 대신하여 새롭게 철죽으로 자리한 풍적회, 회주의 배다른 동생이 주인공인 것이다. 1인칭 시점으로 계속 시니컬하게 주변 이야기와 자기 이야기를 결합시켜나가며 주절거리고 있는데, 말하는 스타일이 때론 귀엽기까지 한 녀석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녀석이 어찌 이리도 개그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끝까지 유쾌하게 읽을 수 있던 작품이었다. 분량도 긴 편이고 구성도 복잡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소매와 철죽이라는 두 걸출한 캐릭터가 가장 인상적이었지만 말이다. 서로 티격태격하며 싫어하는 듯 싸우지만 나중에는 미운정 고운정 들 것 같은 커플은 항상 보기에 즐겁다. 같은 무협 로맨스라고 해도 직설적이고 빤히 보이는 「고기만두」보다 은근히 신뢰가 쌓여가는 「웃는 매화」가 더욱 감동이었다.


  날아가는 칼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몸은 점점 차가워졌는데 쇳덩이는 점점 따스해졌다. 마치 쇳덩이가 그의 몸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체온을 흡수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심지어 그것은 말랑말랑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취국은 그 모든 게 환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신기하기만했다.

  지칠 정도로 자다가 무심결에 쇳덩이를 쓰다듬어 보면, 그 모양이 그의 손길에 따라 바뀌는 듯 여겨졌다. 손톱으로 꾹 누르면 쇳덩이에 손톱자국이 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착각이었다. 누군가 자박자박 걸어와 대롱에 약을 붓고 나간 뒤, 아주 잠깐 정신이 돌아올 때 다시 만져 보면 그건 처음과 다를 바 없는 단단하고 차가운 쇳덩이에 불과했다.


- 「날아가는 칼」 中


  이기어검술. 검이 스스로 날아가는 절대 무공. 「날아가는 칼」은 그 무공을 익히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앞에 나온 기존의 단편들과는 확실히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진산도 책 뒤편 해설에서 무협이 아니면 안 되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무공을 익히는 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지만, 읽을수록 빠져들게 된다. 검이 난다는 것이, 취국에게 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올 법하다. 특히 장르 독자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무언가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죽음을 뛰어넘는 과정을 겪는 것은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흡인력을 가진다. 차분하게 취국의 수련 과정을 따라 읽으며, 설 선생이 겪은 생사의 고통을 바라보면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짜인 글이고 냉랭한 글이며 섬뜩한 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읽고 나서 만족하게 읽었더라도 아쉬운 점도 없잖아 있었다. 우선 취국이라는 캐릭터가 정체성이 지나치게 흐릿하다는 점이었다. 사군자 연작 소설 중에서 가장 개성이 없었다고 할까? 존재감이 적고 자신의 생각을 도무지 내비치지 않아서 답답했다. 취국이 집중 조명되는 이번 단편에서도 취국의 생각은 그리 많이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무공을 익히면서 점차 인간의 감정이 사라지기 때문에 더욱 취국에게 생동감을 느끼기란 힘들다. 그래서 그들이 겪는 외로움, 고독 같은 감정은 공감이 되지 않으며, 결말 부분도 크게 와 닿지 않는 것이다.

  검이 날자, 심장이 뛰었으나 검날은 여자의 나신처럼 위험했고 차디 찼다.


  잠자는 꽃


  마침내 좌호법인 취국이 회를 떠났을 때, 회주는 너를 풍적회의 좌호법으로 임명했다. 그것은 사마세가의 마지막 혈손으로서 풍적회에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 외에 또 하나의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풍적회의 우호법은 묵란. 너는 마침내 그 여자와 대등한 위치에 선 것이다.

  호법으로 임명받은 날, 너는 술병을 들고 묵란의 처소를 찾아갔다. 본타에 뿌리를 내린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그녀의 처소에는 처음으로 가 보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문전박대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너는 하인을 불렀다. 하인은 없었다. 그녀가 나왔다. 너는 술병을 떨어트릴 뻔했다.

  “이야기나 좀 할까 해서 왔소.”


- 「잠자는 꽃」中


  이 글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진산의 소설이며, 유려한 문장과 구성, 완결성에 큰 인상을 받은 작품이다.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시점일 것이다. 이 소설은 2인칭 시점을 사용했다. 글쓰기를 하는 작가라면, 시점에 대해서 자주 고민을 하게 될 것이고, 항상 1인칭 아니면 3인칭을 선택하는 상황에서 가끔은 2인칭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순수문학이 아닌 장르문학에서 2인칭을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선 단편보다 장편 위주이기 때문이고 단편을 쓴다고 하더라도 2인칭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산은 매우 능숙하게 2인칭 시점을 사용하며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그렇게 자연스러웠던 이유 중 하나는 작가도 해설에서 말했듯이 묵란이라는 독특한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명경지수라는 심법을 익히며 타인의 감정을 대변하는 얼굴을 가지고 말 한마디 없이 존재하는 묵란이라는 캐릭터에게 초점이 맞춰진 단편에서 2인칭은 더 없이 딱 맞는 선택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별다른 위화감 없이 소설을 읽게 된다.

  사군자 이야기의 마지막. 그러나 처음에 난 그런 걸 전혀 모르고 읽었다. 즉, 연작인지 모르고 온전한 단편 하나로만 대하고 읽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굉장히 잘 쓰인 무협 단편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복수와 성공, 좌절이 잘 얽혀 있고, 화려한 무공이 나오지 않아도 ― 무협 단편에서는 대부분 무공 대결 같은 건 분량 상 나오기가 힘들다 ― 명경지수 같은 심법은 신비롭고 묘한 느낌을 주어 좋았다.

  이제 다시 책으로 사군자 이야기의 마지막 편이며, 묵란의 이야기이며, 종장이고 에필로그라는 사실을 알고 읽게 되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마냥 좋게만 보이던 이야기가 왠지 가슴 저린 느낌을 주었다. 사군자 중에 마지막 묵란만이 남아 풍적회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모습이 울적한 느낌을 주었나 보다. 게다가 묵란의 마지막은 씁쓸함을 더해 주었다.

  꽃이 잠들고,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다시 꽃은 필 것이나 칼은 더 이상 그 위를 날지 않을 것이다.


  마치며


  이 무협 단편집이 정식 출간으로는 최초이며 또한 최후의 작품이 될 가능성은 높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더욱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칼은 날지 않기에, 지금 날아오른 이 칼을 쉽게 놓아주고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랴.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로 부드럽고 격정적이며 아름다운 유려한 문장들이 촘촘하게 강호와 사람을 그리고 있다. 수십 권에 달하는 무협 소설들이 주는 재미가 있겠지만, 때론 단 한 편의 단편이 주는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울 때도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칼이 날지 않는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진산의 무협 고별사라고 할지라도, 진산의 글에 대한 고별사는 아니기에. 이후에도 어떤 장르로든 글이 나올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무협 장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적다고 할지라도 두려워 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나부터도 무협 소설을 읽은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별다른 무협 지식 없이도 공감하며 웃으며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한 권의 멋진 단편 소설집을 읽고 싶다면 주저 없이 사서 읽으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멋진 글을 찾는다면 말이다. 방금 날아오른 이 책이 소리 없이 사라지기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소망한다. 이미 얼마나 즐거운 책인가를, 빛나는 책인가를 알기 때문에.

  화려한 춤사위 속으로 지금 당신을 초대한다. 푸른 산, 흐르는 물가에 핀 꽃들, 따스하고 쓴 고기 만두 맛, 웃는 매화, 그 위를 나는 칼춤. 칼이 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룬의 아이들 2부 데모닉 8
전민희 지음 / 제우미디어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룬의 아이들 2부 데모닉 8권을 읽고


  <아룬드 연대기> 3부, 『세월의 돌』로 데뷔한 전민희 작가님의 최신간입니다. 룬의 아이들은 <아룬드 연대기>가 아닌, 소프트맥스의 게임 배경 소설로 시작된 프로젝트물이었죠. 처음에는 기대보다 걱정도 많이 되었습니다. <아룬드 연대기>를 잘 보고 있는 와중에 뜬금없이 새로운 글이라니. 그러나 <4leaf>가 등장하고 다양한 캐릭터 소개를 보면서 조금씩 기대가 되었습니다. 한 명, 한 명 모두 독특한 개성을 가진 캐릭터들이었고, 이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알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룬의 아이들 - 윈터러』가 등장했습니다.

  윈터러는 여러모로 기대를 뛰어넘은 작품이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호평을 받았고, <아룬드 연대기> 보다 <룬의 아이들> 시리즈의 후편을 바라는 마음이 커지게 만들었습니다. <아룬드 연대기> 1, 3부 이후에 쓰여 졌다는 점 때문이겠지만, 글 솜씨도 더욱 발전한 것 같았습니다. 아니, 적정한 선을 찾았다고 할까요? 분명 『세월의 돌』은 손에 잡힐 듯한 묘사가 일품이었지만, 과도하다고 느끼는 독자들도 적지 않았죠. 『룬의 아이들-윈터러』에 이르러서는 문단의 나눔이나 묘사의 양이 일정해지고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변합니다. 독자가 좀 더 빠른 호흡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윈터러는 ‘보리스 진네만’이라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수많은 인생 역경을 겪고 고뇌하는 보리스의 숨 막히는 발자취를 독자는 쫓게 됩니다. 고난과 역경, 생존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은 항상 진지했습니다. 7권에 이르는 분량 동안 독자는 작품에 흠뻑 빠져 들었고, 끝내는 긴 여운을 느끼며 감동을 느꼈습니다.

  일본, 중국, 대만, 홍콩 등에 출간되어 호평을 받았고, 아마존 재팬에서 SF, 판타지부문  1위, 동양문학부문(일본작가제외) 1위, 한국소설부문 1위, 아동서 부문 9위, 일본소설(일본어로 출간된 소설) 34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습니다. YAHOO-JAPAN이 2006년 10대가 가장 많이 읽은 소설 베스트셀러 목록에 17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룬의 아이들은 그 탄생 배경이 한국에서도 <4leaf>등의 게임 배경 소설로 기획되었고, 일본에 출간된 것도 <테일즈 위버> 등의 원작 소설로 소개되어 게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재미가 떨어졌거나 작품 수준이 낮았다면 결코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아무리 인기가 있는 스타크래프트나 디아블로의 게임 소설일지라도 국내에서는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없었던 것처럼요.)


  그런 윈터러의 완결 이후 출간된 것은 룬의 아이들 2부 데모닉이었습니다. 과연 2부가 1부를 뛰어넘을 수 있었을까요? 그런 면도 있고 아닌 면도 있습니다. 뛰어넘는 다는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각기 다른 방식을 취했으며,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것을 장점으로 여기거나 단점으로 여기는 것 뿐이죠.

  장르 팬터지. 장르 팬터지는 일종의 패턴들을 조합한 소설입니다. 익숙한 패턴이 나오지만, 그렇게 패턴이 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흥미 요소라는 것이죠. 수많은 클리셰들로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드래곤 라자』나 『세월의 돌』등 많은 소설들이 관습화된 장르의 규칙을 사용한 장르 팬터지로 수많은 독자들에게 재미를 안겨주었습니다. 윈터러는 이야기보다도 캐릭터가 먼저 작가에게 다가온 소설입니다.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세계가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곧바로 게임으로 통해 이미지가 미리 구현되었죠. 그런 특이한 배경 때문인지 윈터러는 초반 1, 2권만 해도 평범한 장르 팬터지의 구성을 따라 가는 듯이 보이지만, 후반부에 갈수록 스케일이 커지면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제가 열광한 점도 그런 면이었습니다. 예상하는 전개를 뛰어넘는 거침없는 이야기 전개 방식, 기존의 세계와 이질적인 세계 그리고 그 세계는 게임과 연동이 되는 점 등.

  그러나 윈터러의 가장 큰 장점은 완결성입니다. 구성의 탄탄함이라고 할까요? 보리스 진네만이라는 캐릭터에게만 집중해서 이야기가 꽉 채워져 있습니다. 독자는 보리스라는 캐릭터에게 애정을 느끼고 감정 이입을 합니다. 그의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이해하고 이솔렛에 대한 가슴 저린 사랑까지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큰 감동으로 독자의 가슴을 흔듭니다. 이 밀도 있는 집중성이야 말로 윈터러가 가진 가장 큰 힘입니다. 즉, 윈터러는 7권이나 되는 많은 분량을 가지고 있지만, 마치 1권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짜임새 있게 이야기가 쓰여져 있습니다. 어느 하나 허투루 읽을 수 없고, 외길로 새는 여행 한 번 없었던 것입니다.

  데모닉과 윈터러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 완결성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문인지 데모닉은 윈터러보다 1권이 더 많고 페이지 수로 따지자면 그보다 더 차이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인 분량의 차이뿐만 아니라 실제로 독자가 읽고 느끼기에도 데모닉이 훨씬 긴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윈터러보다 더 방대한 여행을 했기 때문에? 그것만이 아니라 본래 전개와 상관없는 듯한 여행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독자가 어리둥절한 까닭입니다. 물론 전민희 작가가 아무 생각 없이 쓴 부분은 결코 없고, 마지막에 모두 합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 읽으면서 약간은 어긋났다는 인상을 이미 받았던 것이지요. 물론, 이 뿐만 아니라 윈터러 때보다 더욱 발매 기간이 띄엄 띄엄이었던 탓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느낀 매력은,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윈터러보다 데모닉이 더 사랑스러웠던 것은 마치 정해진 길 안에서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글자 한 자라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촘촘히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윈터러와는 달리, 굉장히 자유분방하게 거침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데모닉 때문이었습니다. 때론 바다에 빠져 표류하기도 하고, 해적선에 휘말리기도 하고, 여행 도중 연극을 하기도 하는 등. 이 얼마나 자유롭고 유쾌합니까? 항상 정해진 틀 안에 짜여 있는 소설들과 달리 작가가 재미있고 신명나게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썼다는 인상을 받아서 저도 즐거웠습니다. 아, 이 부분 작가도 즐거웠겠구나, 라는 느낌이 전달되었다고 할까요?

  데모닉은 앞에서 말한 장르 팬터지에 나오는 패턴들이 잘 보이지 않아 더욱 새로운 소설을 읽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윈터러에서 보리스가 겪은 고난은 감정적으로 와 닿았지만, 이성적으로는 너무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너무나 완벽했다고 할까요? 숨 돌릴 구석이 없을 만큼. 데모닉에서는 막시민의 독설과 비아냥 거림, 리체의 새침스런 목소리가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항상 암살자가 따라다니고, 귀신이 들리고 하는 등 수없이 죽을 위기를 넘기는 모험이었지만, 그들은 항상 밝았고 위험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이 당당함이, 캐릭터들의 매력으로, 이야기의 매력으로 살아났습니다.

  윈터러와 달리 데모닉은 감정적으로는 와 닿을 수 없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바로 조슈아 폰 아르님. 데모닉이라고 불리는 천재로, 일반 사람들인 우리들은 그런 천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다가가기가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조슈아의 고민들은 실제 가슴에 와 닿기 힘든 문제들입니다. 천재성의 문제, 특별한 신분, 데모닉으로 태어나 겪는 어려움, 영매기 때문에 들리는 귀신들의 목소리,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약속 등등.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슈아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습니다. 엄마 친구 아들처럼 일상에서는 접하기 힘든 환상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사고하는 것도 차원이 다른 존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조슈아는 막시민을 만납니다. 막시민은 조슈아와 반대되는 캐릭터이죠. 평민 출신에 가난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당장 먹고 사는 게 걱정인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런 막시민과 조슈아가 만나면서 조슈아는 그제야 드디어 생동감을 얻습니다. 그 전까지는 글자로 무미건조하게 천재라고 주장하는 단면적인 캐릭터였다면, 막시민과의 만남을 통해 입체적인 모습을 갖게 됩니다.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고, 당황하는 천재의 모습은 통쾌했고, 천재라고 다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들판에 내다 놓으면 혼자 지 밥벌이도 못하고 물고기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모습은 살풋 웃음을 짓게 만들었습니다. 천재마저 입을 다물게 만들고 납득시키는 막시민의 독설은 가히 데모닉의 초반부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데모닉에 관한 제 관심과 흥미는 윈터러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아, 이 멋모르는 똑똑하기만 한 천재 양반께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밑바닥 삶을 겪어보고 이제야 철들고 인간 되겠네. 이제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갈까? 그런 생각이 든 것이죠.

  이야기는 급격하게 시간을 뛰어넘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죠. 7년 만에 조슈아를 만나게 된 막시민은 곧바로 위화감을 느낍니다. 이 부분은 그야말로 감탄 밖에 안 나왔고, 막시민이란 캐릭터의 장점이 너무나도 멋진 부분에 터져준 장면이었습니다. ‘내가 막시민이다.’ 하는 느낌이랄까요? 부모도 친척들도 게다가 또 다른 데모닉 히스파니에조차도 눈치 못 챈, 사실을 막시민만이 알아차린 것입니다. 7년 만에 만났는데 그것을 알아차린 것도 놀랍고, 친구의 안위를 위해서 곧바로 달려가는 행동력도 멋졌습니다. 막시민이라는 캐릭터의 모든 것이 나타난 장면이었죠.

  이후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인 전개에 들어갑니다. 복제된 또 다른 자신의 인형. 그 둘은 모든 기억이 같지만, 약간의 기억의 차이와 공백만 있을 뿐. 과연 인형을 없애고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거기에 이카본의 약속까지 맞물리면서 이야기는 복잡해지고 장황해지고 아련해집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끝을 향해 달려가지 않습니다. 숙명 앞에 폭풍처럼 몰아치던 여정이 윈터러였다면, 데모닉은 자신의 자아의 고민, 조상이 주어진 짐에 관한 고뇌를 안고 벌이는 약간은 어긋난 여행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확연히 다른 방식의 이야기 전개입니다. 밀도 있고 집중된 이야기, 깔끔하면서도 강렬한 이야기를 원한다면 윈터러가 그 취향에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씩 홍차를 한 잔 마시고, 여행을 다니면서 이곳저곳에서 사진도 찍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중간에 서점에도 들리는 그런 여행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데모닉이 더 취향에 맞겠죠. 제게는 그런 까닭에 데모닉의 여행이 정겨웠습니다. 윈터러에서 보리스는 고독하고 우울하고 혼자인 느낌이 너무나도 강해서 읽는 저까지도 힘에 겨운 느낌이 있었다면, 데모닉은 친구들과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시종일관 여유를 놓치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막스민과 리체가 있었기에 윈터러와 다른 데모닉이 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도 나왔듯 조슈아가 데모닉임에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막스민과 리체를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도피 길에 연극을 하기도 하고, 쥬스피앙을 만나고, 하늘을 나는 배를 타기도 하고, 항해사를 구하기도 하고, 페리윙클 섬에 들리고 정말이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여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정리될 즈음인 8권은 아련한 감동이 느껴집니다. 우리, 정말 고생했었어. 근데도 용케 살아있네. 이런 느낌, 예전에 친구들과 겪었던 일을 추억하며 느끼는 감정과 동질감을 느끼게 되지요.

  물론 데모닉의 이야기가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테오와의 문제, 죽은 누이, 그리고 란지에의 공화국 이야기, 복제된 인형. 진지할 때는 또 한없이 진지한 면을 선보였습니다. 그런 긴장감을 유지하기 때문에 전체 이야기가 아무리 다른 이야기로 눈길을 돌려도 힘을 잃지 않았죠. 윈터러만큼 강대한 힘의 위험성 등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보다 더 깊숙한 내면의 문제나, 약속의 문제, 용서 그리고 란지에 시점에서는 정치적인 문제들까지, 즉 다른 방향성의 진지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쉽게 결정 내리기 힘들고, 이성과 감성이 복합된 문제들이었지요. 항상 같은 이야기만 할 수 없는 것이고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만족했습니다. 기존의 양산형 팬터지 소설들에서 접하기 힘든 주제 의식이기도 했고요.

  자, 지금까지 데모닉과 윈터러에 대한 비교에만 글을 쓴 것 같습니다. 8권을 막 읽고, 쓰기 시작한 글이니 이제 8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8권은 우선 다른 권들에 비해 두꺼운 분량이 좋았습니다. 사실 그만큼 앞에서 벌여놓은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걸 모두 풀기에는 이 정도 분량은 기본이었겠지요. 데모닉은 윈터러보다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보리스와 이솔렛은 한없이 진지하고 고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존재들이었지요. 앙증맞다는 어울리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시민은 항상 툴툴 거리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조슈아를 아끼고 보살피는 존재입니다. 그의 장점은 행동력과 추리력. 그리고 독설.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서 막시민이 있으면 든든했습니다. 일단, 무슨 말이라도 먼저 확실하게 꺼내 줄 것이고, 입담을 과시해줄 테니까요. 봉재사인 리체는 별다른 능력이 없으면서도 우연찮게 여행에 휩쓸립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당당합니다. 어느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꿋꿋이 잘 살 것 같은 그런 야무진 캐릭터이죠. 8권에서는 이들 뿐 아니라 티치엘이 등장합니다. 이미 7권에서도 예고된 그녀의 모습은 8권에서는 제법 많은 대사와 위치를 부여 받습니다. 원래 캐릭터 소개에서도 사랑스러운 소녀라고 설정된 그녀답게 순진한 구석이 있고 실수도 하면서 여리기도 하고 또 착하고 바른생활 이미지인 소녀입니다. 8권에서만 활약한 그녀지만,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작가분이 네냐플 학원 이야기를 잔뜩 써주시면 좋겠다는 심정입니다. 오직 티치엘을 더 보고 싶은 마음에서 말이지요.

  물론, 티치엘 혼자만 있으면 빛이 나지 않겠지요. 8권의 장점 중 하나는 네냐플 학원 이야기를 보여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윈터러에서는 입학식 장면으로 끝이었으나 8권에서는 드디어 학원에 입학한 이후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학원물! 해리포터보다도 더 재미있는 마법 학원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보리스와 돈 많은 부잣집 자제이며 밝고 순진한 루시안 칼츠, 그리고 막시민, 조슈아. 티치엘. 빌라 전쟁 같은 경우는 작가의 센스가 빛을 발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학원물의 재미가 느껴졌다고 할까요? 그런 이벤트로 인해 주인공들이 뭉치고 친구가 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이런저런 이벤트가 얼마나 많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파티를 이루며 잘 해결해 나가겠지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마지막에 란지에가 오면서 란지에 역시 이들과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될 것이고, 또 새로운 사건들이 터질 것입니다. 마지막 즈음에 악의 무구에 의한 괴물을 보리스와 티치엘, 조슈아의 연합 등으로 해결하는 장면을 보면서 정말 신이 났습니다. 마치 게임처럼 마법사가 보조를 하고 검사가 싸우는 그런 장면이 재미있었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들이 이렇게까지 같이 싸운다는 점도 즐거웠습니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데모닉 문제에 관한 결말은 조슈아의 손으로만 끝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쓰면 쓸 수 있었겠지만, 이왕 학원 이야기를 등장시키고 보리스와 루시안 까지 등장시킨 팬서비스 상, 이들이 뭉쳐 싸우는 모습까지 보여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3부는 좀 먼 미래인 <아룬드 연대기> 이후에 나올 테고, 네냐플 학원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할 테니, 이것저것 재미있는 기숙사 이야기, 수업 이야기, 게다가 전투씬 까지 소개해 준 것 같았습니다. 조슈아와 막시민 일행에 의해서만 조용히 마무리 되었던 점이 어쩌면 앞에서 말한 완결성 측면에서는 더 뛰어날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티치엘과 보리스의 활약이 더욱 반가웠고 손에 땀을 쥐며 읽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한 길로 가지 않고 돌아가는 이야기였던 데모닉이었으니, 이런 점들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꿈같은 여정이 끝나고 데모닉은 완결을 맺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다 할 줄 아는 천재 녀석이라 정이 안 가던 조슈아는 마지막에 풀밭에서 리체에게 편지를 쓰느라 고민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고 어느새 친구들까지 사귀면서 나름대로 즐거운 학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리스 역시 학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어느새 그들과 동화되어 있었습니다. 룬의 아이들 시리즈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일단 어느 한 파트가 끝을 맺은 느낌이 드는군요. 조슈아, 보리스, 막시민, 란지에. 룬의 아이들. 이들의 긴 여정이 끝난 느낌입니다. 학원에서 그들은 많은 추억을 쌓아가겠죠. 친구란 이름으로.

  3부는 20세로 성장한 후의 이야기이며 지금껏 등장하지 않은 다른 캐릭터의 이야기라고 작가는 밝히고 있습니다.(이스핀 샤를, 밀라 네브라스카, 아나이스 델 카릴 등이 후보자겠군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윈터러와 데모닉으로 인해 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결말을 맺은 느낌입니다.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이 아닌 보리스와 조슈아, 란지에도 대륙의 격동기에 휩쓸리겠지만요.

  작가는 <아룬드 연대기> 두 작품을 먼저 완결하고 룬의 아이들 3부를 집필한다고 제작 노트에서 밝혔습니다. 『세월의 돌』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지만 『태양의 탑』은 약간 기대에 못 미친 상태이나, 이후 어떤 결말로 향할지 궁금하긴 합니다. 그보다 룬의 아이들이 더 기대되는 것은 윈터러와 데모닉의 팬으로서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요. 『세월의 돌』도 개정판을 내는 것이고 『태양의 탑』도 5권까지는 이미 출간되었던 분량이니 두 작품의 완결이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1, 2년 내에 룬의 아이들 3부에서 다 자란 아이들의 화려한 활약상을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공의 모습도.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걸고싸워 2007-04-27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미처 읽지 못한 부분도 많네요, 한번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
전민희씨 정말 대단한 작가입니다~

twinpix 2007-07-15 14:10   좋아요 0 | URL
네, 정말 대단한 작가죠. 아룬드 연대기가 또 멋진 모습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JINI 2007-07-20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룬의 아이들!!! 판타지소설에 한참 빠졌을 때, '전민희' 라는 작가님을 알았죠.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죠T________T 그 지식? 이라고 해야하나? 그 깊이가 정말 깊으신 것 같아요. 은연중에 소설에서 나타나는... 정말 좋아요 ~

twinpix 2007-07-25 23:02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좋아하는 작가예요. 나오면 꼭 구입하는 작가분이고요. 아룬드 연대기도 기대되고, 룬의 아이들 시리즈도 기대되고요.^^ 어서 내주셨으면.^^

민트 2007-08-18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제까지 읽었던 평 중에 가장 깔끔하고 좋은 평이었습니다^^ 글 정말 잘 쓰시네요;;
사실 전 윈터러는 읽다 그만둔 반면 데모닉은 굉장히 좋아하는, 좀 별난 유형이거든요. 그 강렬한 정치성[!]에 끌렸다고나 할까;ㅁ; 그래서 항상 '데모닉도 절대 꿀리지 않아!'라고 주장했었는데^^; 그래도 이야기의 완결성이 좀 떨어진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글을 읽어보니 그게 또 매력이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옙, 그럼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파우스트 2007.겨울 - VOL.3
학산문화사 편집부 엮음 / 학산문화사(잡지)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December Rail by Tiv

  깔끔한 그림체. 마지막 장면은 은하철도 999가 떠오른다. 창에 비친 것을 보고 옆 좌석에 앉은 소년을 그제야 보는 소녀. Boy meets girl. 12월, 1년의 끝에서 만난 기차 속 소년과 소녀. 짧은 분량 안에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묘한 느낌을 준다.

그랜드 마마 피쉬 by 박형동

  꿈속에서 수족관 속 물고기 소년을 만나고, 할머니 물고기 안에서 오랜만에 편안한 잠이 든다. 이상한 나라로 빠지는 앨리스처럼 돌연 다른 환상 속 세계로 빠져버린 소녀지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단잠에 빠진다. 그건 할머니의 품속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단잠에서 빠진 소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환상이란 때론 그런 게 아닐까.

月草 by take

  소년은 개울에서 인어를 보고 데려온다. 그리고 인어에게 비닐을 묶은 금빛 끈을 선물로 준다. 인어는 욕탕 속에서 다시 자신이 살던 세계로 돌아간다. 재미있는 상상력, 깔끔한 그림체. 세 작품 모두 아주 작디 작은 분량 속에서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을 주는 정감가는 그림들을 그렸다. 모두 일상에서 환상을 마주치게 되는 인물들이며, 소년 혹은 소녀가 나온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그것은 우리들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비일상에 대한 원형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꿈처럼, 때론 일상에서 어느 순간 환상 속으로 빠져버릴 지도 모른다는 것. 거기서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것. 그건 누구나 순수하게 갖고 있는 사랑의 예감이 형상화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보이 밋 걸 같은.


특집기획

신본격 마법소녀 리스카 / 니시오 이신

  「신본격 마법소녀 리스카」는 『젊은|감성|일러스토리|소설|무크 파우스트』에서 1호 때부터 재미있게 읽고 있는 작품이다.

  …왜, 마법이 있는 거야? …왜, 변신하는 거야? …왜, 어른이 되는 거야? 왜, 소녀야?

  라는, 첫 장의 물음이 항상 인상 깊게 다가오는 소설이기도 하다.

  ‘마법소녀’라는 단어가 들어갔기 때문에 처음에는 진부하다는 고정관념을 보고 읽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 ‘신본격’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애니메이션에서 보던 진부한 마법소녀물과는 다른 비틀어진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것이 이 소설이 갖고 있는 매력이며 장점일 것이다. 라이트 노벨답게 캐릭터가 중요시되고, 특히 ‘마법소녀’라는 것은 독자를 끌어들일 풍부한 매력을 이미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호에서는 사실 작은 이야기와 뻔한 반전으로 재미가 떨어지긴 했지만, 흥미로운 기대감을 심어주는 데는 충분했다. 왜냐하면, 이는 이야기의 도입부, 즉 프롤로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하게 펼쳐질 거란 기대를 독자에게 심어준 것이다. 그리고 2호에서 읽게 된 리스카는 1호의 이야기보다 더 나아진 점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역시 아직은 기대에 지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일단, 같은 패턴의 지루함이다. 마법소녀물의 한계일 수도 있는 이 점은, 한 회마다 하나의 적이 등장하고 그것을 마법소녀가 퇴치하는 식이다. 게다가 그것도 고정불변의 변신씬과 함께 말이다. 이 때문에 이야기는 힘을 잃는다. 또 같은 식이네, 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캐릭터의 매력에 기대는 것이 아무리 라이트노벨이라지만, 단 둘의 캐릭터 그 중에서 모에를 느낄 수 있는 캐릭터는 리스카 혼자뿐인 상황에서 많은 독자를 끌어들일 요소가 적은 것이다. 물론 남자 주인공인 화자는 독특한 캐릭터 성을 가지고 있고 2호에서 가장 큰 수확인 다른 사람을 죽이는 비범함을 보이면서 독자적인 위치를 자리 잡는다.

  하지만, 아무튼 2호까지는 아쉬운 점이 컸다. 3호는 어떠한가. 3호는 1,2호 보다도 훨씬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물론 스토리 진전이 크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화려한 장면 연출이나 독특한 캐릭터 성이 돋보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1, 2호에 나왔던 기존 공식들을 깨트렸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또 다른 가능성을 심어준 것이다. 1, 2호를 읽으면서 느꼈던 위화감 중 가장 큰 점은 변신만 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이건 희극에서 나오는 기계장치의 신을 연상시키는데 온갖 문제들이 많다고 해도 리스카가 변신해서 나타나면 모든 사건이 종결되어 버리니 식상하기 이전에 재미가 없다. 처음에는 오, 신선한데, 재미있네, 라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것도 1호에만 한정되어 있다.

  3호는 어떠한가? 지금껏 나왔던 시시껄렁한 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적을 등장시켰다. 그야말로 초강수. 그로 인해 독자들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긴장감을 느껴보았다. 어떤 때든 변신만 하면 끝장이니, 긴장이 흐를 리가 없었던 것에 반해 이번에는 변신해도 잡아먹힐 뿐인 강력한 캐릭터인 것이다. 게다가 기존에 나왔던 적과도 다르다. 적의 적인 것이다. 새로운 세력의 등장은 항상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1,2호 보다 그래서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이 적을 어찌 퇴치할 것인가. 이들은 살 수 있을 것인가. 적을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인가. 협력할 수는 없는 것인가.

  새로운 정보는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은 앞으로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까지 대로 두 명의 캐릭터만 유지된 채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이야기는 금세 지루해지고 만다. 물론 새로운 캐릭터가 아직 이 소설에 남아있는 모든 문제점들을 해결해 줄 열쇠는 아닐 것이다. 다만, 열쇠를 발견해줄 인도자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지막지하게 강력하며, 아군이 아닌 적이었던 캐릭터라는 것은 드래곤볼의 베지터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만화나 소설에서 사용된 장르적 패턴이다. 이 패턴을 작가가 얼마나 더 매력적이고 새롭게 묘사하는 가에 따라, 앞으로 신본격 마법소녀 리스카의 이야기가 탄력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편에는 더 스토리가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도 싶다. 이제 예비로 깔아두는 전개는 충분히 된 것이 아닌지.

제로자키 키시시키의 인간노트 / 니시오 이신

  재미는 있었지만, 살인귀 집단이라는 소재가 내게는 썩 와 닿지 않았다. 만약 사람을 죽이는 주인공과 죽이지 않는 주인공, 두 개로 소설을 구분한다면 후자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자물이나 캐릭터 개성 면에서는 뛰어난 장점을 보인 소설이다. 일단, 능력자들의 대결이란 점은 만화나 소설에서 많이 나오는 것으로 누구나 쉽게 좋아하는 매력적인 소재이다. 부기팝도 그렇고 상당히 많은 곳에 영향을 끼친 죠죠의 기묘한 모험도 그렇고 말이다. 다른 시리즈도 읽어봐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불쾌감이 재미를 더 앞서고 있다는 느낌이다. 소재 때문에 취향이 안 맞다고도.

니시오 이신 슈퍼 인터뷰

  인터뷰 기사인데, 굉장히 유익하고 재미있었다. 역시 잡지에는 이런 게 유익한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소설이야 단편이 아닌 것들은 대부분 단행본으로 나오니 나중에도 볼 수 있지만, 이런 인터뷰들은 잡지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아닌가. 니시오 이신이 데뷔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글을 썼고, 현재는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는지 자세히 나와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하거나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충분히 참고가 될 것이다.

그녀 집으로 오세요 / 이종호

  한국 작가의 작품이다. 그 때문에 편견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앞에 다른 라이트 노벨 소설들보다 흡인력이 떨어졌다. 속도감의 차이라고 할까. 라이트 노벨 다운 속도감보다는 일반 소설의 속도감 때문에 이 잡지 전체와 맞지 않는 위화감을 느꼈다. 차라리, 따로 단행본으로 나오면 그 때는 재밌게 읽었겠지만, 이렇게 잡지 속에 포함되면 왠지 잘못 자리 잡은 작품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너무 진부하거나 못 쓴 글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캐릭터들도 약간은 무미건조하고, 공포도 기존의 공포와 아주 색다른 것도 아니다. 다만, 이야기가 이게 끝이 아니고 앞으로도 더 남아 있기 때문에 기대를 할 뿐이다. 이건, 도입부일 테니.

킬킬킬 / 강병융

  강병융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건 많지 않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을 주거나 큰 재미를 주지 못해왔다. 글은 잘 쓰는 편이고 이야기도 색다른 점도 많지만, 그게 재미란 요소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전에 실렸던 작품보다는 이번 킬킬킬이 조금 더 나아졌으나, 그래도 아쉬운 점이 많이 뛴다. 극 초반부터 예상이 가는, 맥없는 결말이나 애정이 가지 않는 캐릭터들. 이야기가 항상 얌전하게 갈무리 되는 느낌이다. 차라리 그냥 폭주족처럼 마구마구 거침없이 아나가는 극적인, 갈 데까지 가는 그런 이야기를 쓰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무지갯빛 다이어트 코카콜라 레몬 / 사토 유야

  기대주라는 사토 유야의 글 역시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가나 평들도 좋은 평을 못 봤고. 이번은 특히 미지근했다. 진짜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을 바랐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대로였다.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지만, 기대감이 크게 들지 않는다. 과연 이 색 시리즈에 멋진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의문만 자꾸 든다.

ECCO / 타키모토 타츠히코

  저번 호에 실렸던 ECCO는 의아함만을 남겨주었던 글이다. 모호하다고 할까? 중반까지는 재미있었지만, 막판에 와서는 사람을 벙찌게 만드는 결말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 호에서는 저번 호에 느꼈던 감정들을 많이 해소시켜 주었다. 그러나 또다시 알 수 없는 결말로 치닫는 것은 같았다. ECCO는 아직 판단을 내리기에는 애매모호한 글이다. 글의 목적이 잘 부각되지 않았고, 세계관도 성립되지 않았다. 독자가 매력을 느낄만한 요소가 아직은 극히 적으며, 이야기도 제대로 전개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역시 작가의 입담이나 글 솜씨는 뛰어나다고 느낀다.

월드 미트 월드 / 모토나가 마사키

  처음에는 색다른 어휘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했지만, 곧 그것을 파악하고 난 다음부터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일단, 시리즈물로 보이지 않는 단편 구성이며 중반 부분에 두 세계관의 만남을 암시하는 부분은 제목을 스쳐 읽어서 그런지 몰라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소년과 소녀의 만남이라는 것은 두 개의 다른 세계가 만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하여간, 알듯 모를 듯 전개되는 이야기는 결국 예정된 결말을 맞이한다. 인상적인 단편이다. 크게 재미있거나 캐릭터가 매력적이거나 한 건 아니지만, 괜찮게 읽은 단편이었다.

호질 / 이선웅

제1회 파우스트 소설상 우수상을 탄 호질. 탄탄한 글솜씨와 무난한 전개, 그리고 캐릭터성. 적절한 소설이었다. 확실히 엄청난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선작으로 뽑을 수는 없겠지만, 충분한 수작이라는 느낌이었다. 꽤 몰입하면서 읽었고, 만족했기 때문이다. 역시 심사평에 지적이 나온 대로 끝이 좀 성급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코마츠키 마키코 / 마이조 오타로

  1호에서 실린 마이조 오타로의 글은 충격이었고 재미있었다. 자신과 그 의식 속 안에 또 다른 세계와 거기에 있는 자신. 마치 작가가 판타지 속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비유하는 듯한 그 이중적 구조와 무엇이 허상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매트릭스 같은 구조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었다. 이번 작품 역시 그런 점이 드러난다. 끊임없이 자신 안에 또 다른 인격을 만들고 죽이고를 반복한다. 그 새에 그 인격과 진짜 인격이 뒤바뀔 수도 있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혼란스럽다. 복잡하다. 신선하다. 머리에서 혜성이 폭발한 것 같은 감탄을 느낀다. 이런 독특한 사고 전개 소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또 영감을 주게 만드는 것 같다.

The world is full of angry young men / TAGRO

어른이란 무엇일까. 성장이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전의 두 작품보다 더 좋았다.

이상한 사람들 / 와타나베 코지

  04 사회 복귀, 05 쉬운 여자. 04 사회 복귀는 실업, 히키코모리 등을 문제 삼은 꽁트 같은 느낌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굉장히 인상적이라고 할까. 05 쉬운 여자는 결말이 호러스럽다. 링2를 떠오르게 하기도 하고. 역시 이상한 사람들이다.

성공학 캬라 교수 / 세이료인 류스이

  재미있었다. 실제 게임처럼 진행되어서. 나는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마이너스 사고를 플러스 사고로 바꾼다. 낙천적, 긍정적 삶을 산다. 이것이 성공의 열쇠중 하나일 것이다.

경성탐정록 - 운수나쁜 날 / 한동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당시 시대상을 그대로 그렸다는 점이 멋졌다. 글도 잘 썼고, 우리나라 추리에도 이런 작가들의 노력에 의해서 대박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


파우스트 3호

  이번 3호는 전보다 더 두꺼워졌고 전보다 더 만족스러웠다. 예전 나스 키노코보다 인터뷰도 더 알차고 흥미로웠으며, 한국 작가의 작품이 4편인 실린 것도 좋았다. 미스터리 팬들의 좌담회도 유익했다. 우리나라 미스터리 시장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2000년대 일본 서브컬처의 흐름과 전망에서도 일본의 미스터리 발전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다음 호에는 좀 더 다양한 국내 작가의 작품이 실렸으면 한다. 파우스트 문학상은 정확한 시기를 정해서 1년에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열면 어떨까 싶다. 2회의 참여율 저조를 보면 연속으로 여는 것은 힘들 테니 말이다.

  아무튼 이런 무크지가 꾸준히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끊기지 않고 꾸준히 나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HK에 어서 오세요 - 소설
타키모토 타츠히코 지음, 아베 요시토시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NHK에 어서오세요!』

  "NHK에 어서오세요!"라는 독특한 제목을 가진 소설이다. NHK라면 일본 방송사 아닌가? 거기에 왜 오라는 거지? 처음에 드는 생각은 그럼 것들이었다. 환타지 문화 웹진 워터가이드가 있던 시절, 게시판에서 "NHK에 어서오세요!"라는 소설에 대해서 처음 들어보았다. 거의 극찬에 가까운 글로 기억하는데, 한국에 번역되어 출간된다면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완독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만화책으로 먼저 출간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만화책을 그렇게 많이 보는 편이 아닌 나로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우선 제목 만큼이나 내용은 독특하다. 소재는 히키코모리. 우리나라에서는 은둔형 외톨이라고 불리는 존재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히키코모리 성향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히키코모리를 소재로 한 단편을 썼던 만큼 관심이 가는 책이었다.

   이 책은 일단 라이트 노벨이다. 그러나 표지를 제외화고는 삽화가 일체 들어있지 않고, 내용도 비일상을 다루고 있지 않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다룬 것이다. 물론 오타쿠와 히키코모리를 다루면서 장르적인 특성들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일반 소설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그래서 라이트 노벨처럼 출간되지 않고 양장본으로 출간되어서 마음에 들었다. 라이트 노벨이라고 하지만, 라이트 노벨이라는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소설인 것이다.

  주인공은 사토 타츠히로. 대학교를 중퇴하고 백수로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이는 젊은 편. 그는 환각제를 먹는 동안 이렇게 된 것은 누군가의 음모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음모의 정체는 NHK. 바로 일본 히키코모리 협회의 약자란 것이다. 그는 조직에 맞서 싸우며 음모를 타파할 생각을 갖게 되지만, 히키코모리이기 때문에 방에서 나오는 것조차 힘겨워 한다. 히키코모리.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고, 남들이 전부 자신을 비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 그에게는 사회에 나가 맞서 싸울 자신감이 없었다. 그가 비록 음모를 파악했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패전한 전사였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소녀가 있다. 나카하라 미사키. 그녀는 히키코모리 탈출을 도와주겠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 방법을 알고 있다면서. 그러나 막상 만난 나카하라 미사키는 엉뚱하다. 그게 그녀의 매력이겠지만.

  히키코모리라는 소재는 무척 제한적이다. 방에서만 있으려 하는 인간에 대해서 다룬 소설이 과연 읽힐 수 있을까? 재미를 가질 수 있을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소설은 성공했다. 히키코모리라는 소재를 다룬 것만으로도 화제를 얻고, 캐릭터성을 통해 독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아니면, 버텨나가는 이야기. 일어서는 이야기)를 통해 감동과 여운을 주고 있다. 소설이 독자들에게 동질감을 느껴 감정이입을 하게 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나아가서 메시지를 전달하고 여운을 준다면, 충분히 성공한 것이다. 이 소설은 분명 특정 독자층을 성공적으로 공략했고, 그들의 마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또한, 라이트 노벨 다운 재미를 갖추고 있어 만화책으로 나왔고 현재는 애니메이션이 방영 중에 있다. 작가 본인도 히키코모리였던 만큼, 자신의 경험을 잘 녹여내고 있고, 비슷한 경험이 있거나 성향이 있는 사람의 마음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읽으면서 감탄했던 것 중에 하나는 속도감 있는 문체였다. 스피드 있는 문체가 이런 것이구나. 문체의 힘만으로도 글이 이렇게 살아나는구나, 를 느꼈다. 빠르게 읽혀서 더욱 재미있었다. 위트가 있으면서도 속도가 있는 문체를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이런 문체가 아니었다면, 이 책은 재미를 반 이상 떨어트렸을 것이다.

   소녀와 소년의 만남이라는 뻔한 공식. 뻔한 패턴. 그러나 라이트 노벨에서는 그것이 장르의 법칙이고 로망이다. 우리네 삶 속에서 사랑이 영원불멸한 테마이듯이. 히키코모리인 주인공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음모가 있어서도 아니다. 중요한 건, 서로 구원해주길 바라는 또 하나의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다. 사람은 소통을 통해서, 만남을 통해서, 교류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고, 비로소 사회에 나갈 수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NHK에 어서오세요!"는 속도감 있는 문체, 참신한 소재, 안정된 구성, 독특한 위트, 마음이 따뜻해지는 치유계 이야기로 재미를 주고 있다.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아쉬운 점은 필자가 워낙 많은 비일상의 이야기들을 읽어온 탓인지, 끝까지 일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적잖이 허전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클라이막스 부분에서도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마지막 부분도 '엥?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거야?'라고 할 정도로 담백하게 끝을 맺고 있어서 아쉬웠다.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돌아봐도 엔딩에서 아쉬웠다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어쩌면 "NHK에 어서오세요!"의 장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이야기에 거창한 이야기가 들어갔다면(주인공이 NHK 본사를 폭발시킨다든지!) 오히려 밸런스가 붕괴되어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을까? 이 이야기가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의 완결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한 번 히키코모리의 세계로 들어와 보지 않겠는가? 사회에 대한 두려움, 망상, 그리고 신뢰, 믿음, 사랑. 인간. 결국 그들이 찾아낸 NHK란?

  자, 그럼 여러분

 

  NHK에 어서오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