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계승자
제임스 P. 호건 지음, 이동진 옮김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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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멜라스에서 출간된 『별의 계승자』는 제임스 P. 호건의 대표작이다 데뷔작이다. 큰 성공을 거둔 출세작이기도 하다. 특히 이 작품은 일본에서 특히 큰 인기를 얻었다. 일본 SF 대회 성운상 해외부문을 수상한 작품이며 『기동전사 Z건담』 극장판의 부제목과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마지막 편 제목은 모두 이 책의 일본어판 제목인 '별을 계승하는 자'가 오마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른 SF소설들과도 차별화된 독특한 소설이다. 일단 이 작품은 하드 SF다. ‘하드SF'라는 단어만 듣고 어려울 것이라거나 지루할 것이라는 선입견은 전혀 가질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철저히 과학에 입각한 논리적인 이야기 전개가 된다는 의미일 뿐, 소설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미덕인 ‘재미’를 빠트리지 않았다. 단언하건대, 이 작품은 재미있다. 올해 국내에 출간된 『멸종』(로버트 J. 소여 지음, 김상훈 옮김, 오멜라스(웅진), 2009년 3월)과 『노인의 전쟁』(존 스칼지 지음, 이수현 옮김, 샘터사, 2009년 1월) 모두 빠른 속도감이 특징이며 놀라운 재미를 선사하는 최신 SF소설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1977년 발표된 이 소설이 조금 더 재미있고 즐거운 독서가 되었다.

  이 작품은 충격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바로 달에서 우주복을 입은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연대측정을 해보니 무려 5만 년 전에 시체라는 것이다. 과연 이 미스터리는 어떻게 풀릴 것인가? 이 소설은 주인공들이 발로 뛰는 모험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적인 사고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쾌감이 아주 뛰어나다. 『노인의 전쟁』이나 『멸종』에서 발로 뛰며 목숨의 위협을 받는 이야기들과 달리 이 소설은 대체로 책상에 앉아서 연구하고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종합하고 분석한다. 이렇게만 들으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소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전혀 아니다.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고, 그 가설이 또 부정되고, 새로운 단서가 발견된다. 정보들이 결합되면서 새로운 이론이 나오는 구성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달에서 발견된 5만 년 전의 시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수많은 과학자들이 매달린다. 언어학자들은 정체불명의 언어를 분석하고, 수학자들을 수학을 계산하며, 생물학자는 신체연구를 한다. 이렇게 소설이 끝날 때까지 계속 과학적인 이야기만 나오는 순수한 과학소설인 것이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다양한 과학적 분석을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이론들이 대립되고 사실이 아닌 이론은 가차없이 기각당하고 새로운 이론으로 넘어간다. 끊이없이 새로운 증거와 이론들이 나오면서 이야기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든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독자는 빠르게 책장을 넘기게 되고 마치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보듯이 새롭게 등장하는 단서들은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액션은 없지만 웬만한 액션소설보다 재미있다. 지적액션물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책이다.

  다 읽고 나면 SF 소설의 경이감은 물론이고 묵직한 감동과 전율까지 흐르는 작품이다. 물론 그 뒤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래 전에 발표된 소설이기 때문에 아주 참신한 발상이나 소재라고 할 수는 없다. 개개인에 따라서는 이제는 낡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읽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은 책 속에 빨려들어가는 경험을 할 수 있고, 읽고 나서도 여운이 남는 기분 좋은 독서가 가능한 책이다.

  만약, ‘달에서 5만년 전 우주비행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라는 문장에서 당신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면, 책을 읽을 준비는 다 마친 것이다. 이제 당신은 달 위에 서 있고 앞에는 5만 년 전 달에서 죽은 시체가 놓여 있다.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 것인가? 책 속에 답이 있다. 책장을 덮고 난 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새까만 하늘 속 달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의문을 가지는 순간, 당신은 이미 위대한 지적 모험에 뛰어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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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02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이지요 ^^

twinpix 2009-08-04 19:48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재미있었죠. 오멜라스에서 이런 재미있는 sf들을 꾸준히 소개해줬으면 싶어요.^^/
 
모래선혈 Nobless Club 15
하지은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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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래선혈


  ――― 단 한 명의 독자


  [모래선혈]은 2008년 겨울, [얼음나무 숲](하지은, 로크미디어, 2008년 1월)이라는 작품으로 노블레스클럽의 첫 작품이자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던 작가의 신작이다. [얼음나무 숲]은 ‘음악’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택한 환상소설이자,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많은 독자들에게 좋은 평을 받은 작품이었다. 오랜 시간 뒤에 출간 된 [모래선혈]은 전작과는 유사하면서 색다른 소설이었다. 여전히 유려한 문체는 그대로였고, 낯선 환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 전작이 음악가들이 나왔다면 이번에는 작가들이 나오는 소설이다.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을지 짐작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요소일 것이다.

  프롤로그는 황제의 주사위로 시작한다. 이 주사위의 설정부터가 흥미롭다. 모욕, 감금 구타, 절단, 소유 그리고 죽음이 적힌 절망의 주사위와 지연, 재도, 무통, 구제, 갑절 그리고 반전이 적힌 구원의 주사위가 존재한다. 프롤로그에 등장한 이 주사위는 처음에는 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마지막에 다시 나옴으로써 그 의미가 드러난다.

  이 소설은 모래처럼 건조하고 텁텁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삭막하고 단조로운 느낌이 있다. 전체적으로 무채색의 느낌이 드는데, 이는 주인공인 ‘레아킨’이 색을 볼 수 없고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사막을 가로질러 속국의 심판관으로 가게 된다. 그가 그런 변방의 땅으로 가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단 한 권의 책 때문이다. 그는 라노프라 불리는 속국의 작가의 책을 읽게 되었고 거기서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이 작가라면 자신의 병을 고쳐 색을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된 것이다. 그 작가는 바로 [호반 위 황금새]의 작가인 비오티였다.

  레아킨은 라노프의 수도 옐린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레아킨이 오기 전 심판관이었던 귀스트 아고스토를 만나고 죽은탑의 심판관으로 부임한다. 레아킨은 심판관으로 부임해 반란군들을 단호히 처형하는 한편, 자신이 이곳에 온 단 하나의 목적인 작가 비오티를 찾는다. 혼자 밖을 나돌아 다니기도 하고, 예술가들을 초청해 파티를 열기도 하면서.

  마침내 레아킨은 비오티와 조우하게 되고 예상외의 모습에 처음에는 실망하나 곧 비오티가 자신의 병을 고쳐주기를 바라게 된다. 이때 레아킨의 모습은 지극히 순수해 보인다. 색을 보지 못하고 감정을 알지 못하는 이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그가 슬픔과 절망을 알아가고 사랑까지 하게 되는 모습은 이 소설의 주된 매력이다. 이 소설은 한없이 음울하거나 어둡지만은 않은데 인물 관계가 선명하고 주인공인 레아킨의 순진한 구석이 밝은 재미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중간에 만화 데스노트의 패러디나(사소하지만) 작가의 전작 내용이 언급되는 부분들은 재미를 주었다.

  이 작품의 초반부의 주요 갈등은 라노프와 쿠세와의 갈등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식민지 시대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이들이 시위를 벌이고 공권력에 탄압받는 장면들은 현 시대의 촛불집회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많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작품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점들이 나타난 것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작가와 독자 모두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동시에 전반부부터 환상적인 요소가 암시로 깔리다가 후반부는 이 환상성이 중심으로 된 갈등과 대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환상세계에서 작가라는 소재와 색을 못 보는 남자를 결합한 소설로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소재부터 독특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전작의 주인공들보다 이번 편의 주인공들이 더 개성이 살아있고 생동감이 있는 느낌이었다. 이야기는 약간 헐거운 감이 있어서 아쉬웠는데, 전체적으로 틈이 보이지 않고 몰아붙인 전작에 비해서 이번에는 틈새가 많고 느슨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경로대로 이야기가 흘러간 느낌이 있었다.(반전이랄 것이 약했고, 사건 전개도 편하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조금 더 촘촘하게 전개되면서 한편으로는 분량이 더 길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작가를 소재로 잡고 소설 속에 몇몇 작품들도 소개되는 만큼 소설 속 소설의 본문 길이가 더 늘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읽어 내릴 수 있는 소설로 엔딩에는 여운이 진하게 남았다. 읽는 속도는 전작보다도 빨랐다. 그만큼 흡인력이 있는 소설이다. 충족감은 전작보다 적을지 몰라도 이 작품은 분명 자기만의 고유의 색과 개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한 작가가 있었다. 자유분방하고 자기 멋대로 글을 쓰는 작가.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글을 쓰는 작가. 재기 넘치고 자신감에 찬 작가. 그리고 한 독자가 있었다. 색을 보지 못하는 남자. 고통도 좌절도 알지 못하는 남자. 그러나 한 작가의 글에서 희망을 발견한 남자. 사막은 둘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국경도, 가치관도, 신념도 부질없었다. 두 사람은 하나의 작품으로,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로 소통할 수 있었으니까. 남자는 결국 색을 볼 수 있었을까. 분명 보았을 것이다 바다빛 색깔을, 무채색의 모래가 청푸른 바다색으로 변하는 광경을. 모래에 떨어진 핏빛 선혈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믿고 믿는 대로 글을 썼을 것이다. 소설은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 결핍되었다고. 그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렇기에 우리는 무채색 모래에서 붉은 선혈을 보고, 그네들의 운명과 삶을 목도하며 나아가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과연 색을 보고 있을까. 현실을 직시하고 있을까. 자신을 울리는 글을 찾아 읽고 있을까.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한 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처음 [얼음나무 숲]을 접했을 때, 리뷰에서 이 작가의 작품이 나오면 바로 구입하게 될 것이라고 적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기대되는 작가이며 보기드믄 환상과 재미를 동시에 주는 작가이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또 기대된다. 이번에는 어떤 환상 속으로 데려가 줄지, 어떤 인물들을 만나게 될지,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다음 번에도 또 그 다음 번에도 나는 이 작가의 작품을 주저 없이 구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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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피다 Nobless Club 14
이헌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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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간은 피다


  ―――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춤을 추고 인간을 먹고




  시간은 피다

 

  ――― 소련 62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


  레닌그라드를 철저히 파괴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든 후 전기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완전 봉쇄한다. 겨울이 지나면 최소 100만 명이 굶어 죽을 것이니, 그 편이 전 도시를 점령하는 것보다 소련군의 사기를 꺾는 데 더 효과적이며 또한 공격 시 따를 아군의 희생을 줄이는 방법이다.


  ――― 독일군 폰 레프 원수

 

――― [시간은 피다], 이헌, 로크미디어, 9쪽


 

  노블레스클럽 열네 번째로 출간된 [시간은 피다](이헌, 로크미디어, 2009년 6월)는 여태껏 한국에서 나온 소설 중 가장 독특한 소재를 다룬 소설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한국이 아니며 동시대도 아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포위 아래 900일간 고립된 레닌그라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소재부터 기대와 우려가 같이 든다. 우선 새로운 소재와 이야기를 다뤘을 거란 기대감이 드는 한편, 그만큼 어려운 소재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작품일지 걱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예상보다 더 잘 쓰인 작품이며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루하거나 난해하지 않고 적절하게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에 치중하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후반부에는 강렬한 갈등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급진전 시켜서 마침내 예정된 결말로 치닫는다.

  실제 역사 속 도시를 배경으로 삼았음에도 큰 위화감 없이 이야기를 읽어나갈 수 있었다. 한국이 아닌 외국을 무대로 하고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은 전혀 외국인처럼 느껴지지 않고 전부 어색하게 느껴질 위험이 있는데 이 소설은 능숙하게 실제 레닌그라드를 어느 정도 체험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쓰였다.


  내가 그 애에게 한 숟갈이라도 나눠 준다면 내 어머니가 죽을 것이다. 그럼 세르게이는 날 용서하지 않겠지. 나도 날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냄비에 일기장을 통째로 넣고 끓였다. 다행히 제본은 실이 아니라 풀로 되어 있었다. 귀한 장작을 하나씩 넣어 가며 겨우겨우 살리는 불에 오래 끓이면 풀이 흐물흐물해진 종이를 부드럽게 응고시켜 좀 더 먹기 편해진다. 가죽으로 만든 젤리보다는 종이 펄프가 낫다.

  가죽 젤리는 단백질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가 아프다. 괴혈병으로 피가 나는 잇몸으로 가죽을 씹으면 턱관절이 빠질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눈에 띄는 가죽이란 가죽은, 사람들이 껌처럼 빨아 먹고 씹어 먹고 삶아 먹어 버렸다.

  표면에 고인 잉크를 흘러 버린 뒤, 나는 어머니와 시퍼런 종이 죽을 먹었다. 괴로움과 분노와 슬픔이 검푸른 물로 흘러 내렸다. 
 

  ――― [시간은 피다], 이헌, 로크미디어, 20~21쪽
 

  이 소설은 ‘굶주림’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전쟁의 광기로 인해 고립된 도시, 레닌그라드. 고립된 도시하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식량이다. 끝없는 굶주림. 도시에 갇힌 사람들에게 굶주림은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초반에 넣을 수 있는 아무거나 다 넣어서 만드는 레닌그라드 식 수프를 소개하는 식으로 이들의 굶주림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한다. 읽으면서 내내 이들의 고통을 체감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전쟁의 참혹함은 바로 이런 굶주림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사람이 죽거나 팔 다리가 잘려나가는 장면이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렇게 먹을 게 없이, 언제 전쟁이 끝날지 모르는 암담함이 전쟁의 비극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에게 900일만 참으면 된다고 말해주면 좀 더 나았을까. 언젠가 끝이 온다고 조금만 참으라고, 그렇게 이야기해주었다면 레닌그라드에서 식인을 하는 사람은 줄어들었을까. 이 소설은 굶주림을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 식인을 이야기한다. 먹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 식인은 도저히 거부하기 힘든 유혹일 것이다. 그러나 식인이라는 것, 식인종의 존재는 이 소설에 끈적끈적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매일 친근하게 굴고 웃으며 인사하는 이웃이 어느 날 식인종으로 돌변해 자신을 납치해서 먹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전쟁 속 고립된 도시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강도, 살인, 강간, 식인까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절망하며 처절한 삶을 이어나갈 것인가. 보통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두 소녀, 일로나와 타티야나는 밝게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에겐 또 이 두 소녀에겐 ‘발레’가 있기 때문이었다. 발레는 그들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시켜주는 고결한 예술이다. 포위 되었어도 레닌그라드에서는 공연이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놀라운 일이다. 이 두 소녀 또한 춤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제고 무대에 서는 날을 고대한다. 그런 꿈이 힘겨운 현실에서도 삶을 버텨나가게 하는 힘이 된다. 이 소설은 이렇듯 ‘식인’이라는 소재와 짝을 맞추듯 ‘발레’라는 소재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작가는 레닌그라드와 발레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자료 조사를 한 것이 눈에 보인다. 곳곳에 설명되는 레닌그라드와 발레에 대한 설명과 묘사는 적절한 분량으로 이야기와 결합되어 있다. 발레에 대한 전혀 조예가 없었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읽어나갔고 지루하지 않았다. 아마 발레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잘 알았다면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발레 또는 예술은 이 소설에서 식인에 반대에 위치하며 삶과 동일하다. 레닌그라드에서 공연을 펼치는 단원들은 지원도 없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자신을 바쳐가며 공연을 하고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으면 대체될 뿐이다. 사람들은 포위된 상태에서도 매일 공연을 보러 간다.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식인도 은밀히 이루어지고 있다. 살인과 강도와 강간도 일어나고 있다. 이 기묘한 대립이 무척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레닌그라드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이 소설을 통해 전쟁의 광기와 처참한 절망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곳곳에 배치된 레닌그라드의 당시 상황 이야기는 작품에 사실성을 주고 배경의 질감을 느끼게 했다.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소설에 녹아들려면 수많은 조사를 거쳐야 하고, 구성에 공을 들여야 한다. 문장력도 안정적이고 치밀한 조사와 함께 뛰어난 구성이 짜여졌기 때문에 이 소설이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타티야나는 나타샤가 잘난 체가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에는 일로나를 끌어당기는 것이 있었다. 평생 춤에만 헌신하여 죽어서도 춤만 추는, 춤에 모든 것을 바친 생.

  춤에 내 삶을 주면 춤도 내 것이 될까.

  지젤은 춤에 목숨을 주었지. 춤추지 말고 병상에만 누웠다면 목숨은 건졌을 거야. 그러나 그녀는 그 고통을 삭이지 않고 춤으로 표출했고, 그래서 죽어 가면서도 춤을 출 수 있었던 거야. 그녀의 사랑, 삶과 죽음을 춤으로 표현하며 죽을 수 있었던 거야.

  광란의 춤,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미친 듯이, 사랑의 고통으로 가슴이 터져 버린 처녀의 광기를 표현하는 춤. 순박한 시골 처녀를 불멸의 무희로 변모시킨 춤.

  그 실체는 유미주의자 테오필 고티에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안나 파블로바도 올가 스페시브체바도 평민이었다. 오데트나 오로라처럼 공주인 무희야말로 발레의 세계에서나 있는 일이다. 공주가 아닌 니키아는 어떻게 됐지? 감자티 공주에게 약혼자를 빼앗기고 독사에게 물려 죽었지.

  안나와 올가는 지젤의 열정을 품고 있었다. 그 열정을 광기로 폭발시킬 혁명과 전쟁의 시련도 겪었고. 바로 일로나가 지금 그러하듯.

  내겐 광기가 있어. 내 안에 그것이 존재해. 일로나는 발목을 감싸고 돌며 귀 뒤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밤바람에 속삭였다. 누가 그 속삭임을 들을까. 누가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까.


  ――― [시간은 피다], 이헌, 로크미디어, 176쪽


  이야기는 묵직하지만 두 소녀의 내면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밝은 부분도 존재한다. 감각적인 문체로 소녀들의 심리를 그럴듯하게 잘 묘사한 소설이다. 소재뿐만 아니라 그 소재를 어색하지 않게 소화한 문체가 뛰어나다. 지금껏 다른 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문체이며 자연스럽게 참혹한 환경을 형상화하고 있다. 레닌그라드라는 공감하기 힘든 참혹한 환경을 두 소녀의 심리를 통해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전쟁 속에서라도 두 소녀가 마냥 행복하게 밝게 지나가다 포위가 풀리고 행복한 미래를 맞이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세상은 또한 전쟁은 두 소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두 소녀에게는 차례차례 절망이 찾아왔고 마침내 파국의 결말을 맞는다. 결말은 그 처절함과 강렬한 장면들의 연속이 마음에 들었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처음에 프롤로그가 장면들로 제시하고 순차적이지도 않아서 난해하게 읽히는데, 다 읽고 나서 다시 그 부분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야말로 괴물이 혼란스러운 기억들 속에서 끄집어내는 기억의 편린을 제대로 보여준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섬세한 감정 묘사와 참혹한 전쟁의 광기를 잘 그려낸 작품이었다. 차분한 전개와 레닌그라드와 당시 시대상, 발레에 대한 고증이 뛰어난 작품으로 보였고, 낯설고 어려운 소재를 선택해서 인상적으로 소화한 소설이다. 제목이 눈길을 끌기 어렵고 아직 브랜드가 확고한 지지층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겁고 진지한 작품이라 많은 호응이 없을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글을 읽고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사서 읽고 작가의 다음 작품도 빠른 시일 내에 또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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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7-27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차 대전중 구 소련의 피해도 정말 막심했지요.전쟁직전 스탈린의 소련군 장성들을 마구 숙청한데다(이건 독일측 간첩이 저지른 농간이였죠),독소불가침 조약을 믿고 있다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이죠.예나 지금이나 지도자 잘못만나면 국민만 개고생이죠 ㅜ.ㅜ
참고로 러시아에서 그라다는 도시를 뜻합니다.레닌그라드는 레닌의 도시란 뜻이죠.하지만 현재는 옛명칭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뀌었네요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 1
차이나 미에빌 지음, 이동현 옮김 / 아고라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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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


  ――― 새로운 디스토피아 환상 세계를 체험하다


  [베오울프](닐 게이먼·케이틀린 R. 키어넌, 아고라, 2007년 11월)를 출간한 아고라 출판사에서 이번에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차이나 미에빌, 아고라, 2009년 4월)을 출간했다. 작가 차이나 미에빌은 국내에서 그리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이 작품으로 아서 C. 클라크 상과 영국환상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실력 있는 작가이다. 국내에는 [쥐의 왕](차이나 미에빌, 들녘, 2001년 7월)이 출간된 적이 있다.

  이 작품은 ‘어번(urban) 판타지 3부작’으로 불린다. 바로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과 [상처The Scar], 그리고 [강철의회Iron Council] 세 작품이다. 그는 이 3부작을 통해 판타지 문학의 혁신자로 떠올랐다고 한다. 특히 [상처The Scar] 같은 작품은 영국 가디언지가 뽑은 SF&판타지 목록에 선정되기도 했다.

  어번 판타지란 흔히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도시전설류의 판타지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은 현실의 도시를 배경으로 삼지 않고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바로 공해에 찌들어가는 부패하는 대도시 ‘뉴크로부존’이라는 도시가 배경이다. 이 도시에는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고 다섯 개의 기차 노선이 만나는 도시의 심장부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이 존재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권 당 500페이지 가깝게 2권으로 나온 이 책은 그 두꺼운 분량을 충분히 살린 작품이며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다. 놀라운 환상과 과학이 공존하는 세계를 작가는 치밀하게 그려냈고, 그 섬세한 디테일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초반부는 이 세계를 묘사하는데 집중하고 있어 지루할지도 모르지만, 이야기가 진행되고 사건이 벌어지면서 재미는 극에 달한다. 잘 들어보지 못한 작가라서, 혹은 한 번에 와 닿지 않는 제목 때문에, 또는 두툼한 분량 때문에 이 책을 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중에 읽고 나서 늦게 읽은 것을 후회할 정도로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종족과 어딘가 현실 세계와 유사하면서도 전혀 다른 도시 ‘뉴크로부존’의 묘사는 매력적이다. 전혀 다른 세계를 체험한다는 것. 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그 두 가지의 매력을 이 소설은 가지고 있다.

  첫 페이지를 넘기면 마치 뇌처럼 생긴 복잡한 ‘뉴크로부존’의 도시 지도가 보인다.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표현되어서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그만큼 작가가 얼마나 상세하게 설정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진정한 판타지 소설을 쓰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종족들


  이 소설에는 여러 다양한 종족들이 등장한다. 한 번에 외형부터 습성이 쉽게 다가오는 종족이 있는가, 하면 낯설고 머릿속에 모습도 그려지지 않는 종족도 있다. 이런 다양한 종족은 환상소설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들을 보면서 사고의 확장을 할 수 있고 이들을 통해 인간을 새로 조명하기도 하며 또한 기존에 없었던 존재들로 인해 새로운 환상과 모험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여성은 케프리족인데, 놀랍게도 벌레 머리를 가진 종족이다. 이런 종족은 기존에 환상소설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종족이 아닌가 싶다. 원래 환상소설에서는 종족을 뛰어넘는 사람은 힘든 법이지만, 케프리족과의 사랑은 읽는 내내 감정이입이 되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인지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도 힘들었고 더군다나 주인공처럼 애정을 갖기는 힘든 면이 있었다.

  그리고 사건의 발단이며 장마다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는 ‘야가렉’은 조인족 가루다이다. 이는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았는데 바로 표지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곳곳에서 많이 접한 이미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리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야가렉’은 죄를 지어 날개를 잃었고 주인공에게 다시 하늘을 날 수 있게 해달라고 의뢰를 한다.

  노동하기 좋게, 또는 형벌을 받아 신체를 개조하는 리메이드 족. 이들은 역시 기괴한 신체구조로 등장하기 때문에 쉽사리 이미지를 상상하기는 어려웠지만, 이 도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종족이며 이 소설에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종족이기도 했다. 디스토피아 세계를 단정적으로 보여주는 종족이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종족이 등장하며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인간과 전혀 다른 외형과 사고를 하고 있는 이런 종족들은 이 소설에서 체험할 수 있는 환상을 극대화 시켜주는 장치이며 다양한 알레고리를 담아내는 효과적인 설정이기도 하다.


  소설의 끊는점은, 396쪽


  비주류 과학자인 주인공 아이작은 날개를 잃은 가루다 ‘야가렉’에게 하늘을 다시 날게 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는 의뢰를 수락하고 연구를 위해 하늘을 나는 갖가지 짐승들을 모으던 중에 정체불명의 애벌레 한 마리를 얻게 된다. 이 애벌레는 곧 엄청난 파국을 몰고 온다.

  이 소설은 지나치게 섬세하고 뛰어난 디테일을 자랑한다. 그 말은 곧 빠른 속도감을 원하는 요즘 독자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새로운 세계를 그려냈기 때문에 종족 하나하나의 상세한 외형 묘사부터, 도시 곳곳의 묘사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야기 진행은 초반에는 상당히 느리다. 게다가 각 장마다 가루다 ‘야가렉’의 심리가 1인칭으로 펼쳐지는데, 뛰어난 문장력과 유려한 묘사로 아름답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 진행을 늦추고 분량을 늘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배경 설명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빠른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라면 초반만 읽다가 지쳐서 그만둘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분을 지나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순간, 이제까지 지루함은 단번에 날아가고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 것이다.

  1부 의뢰, 2부 비행해부학을 지나 3부 변태에 가서야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즉, 아이작이 우연찮게 얻게 된 정체불명의 애벌레가 변태를 하고 깨어나는 순간, 이야기는 활력을 얻고 재미를 선보인다. 세계의 위기가 닥치고 주인공들은 그에 맞서며 모험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주인공 아이작의 연구나 여자친구인 린이 새로운 일을 맡게 되는 것, 아이작이 가루다인 야가렉의 의뢰를 받고 비행해부학에 대해 연구하는 이야기가 상세하게 펼쳐진다.이 도시는 물론 흥미로운 배경이지만 도무지 이야기가 전개되지를 않고 소개만 계속 하고 있으니 독자는 도대체 여기서 뭘 말하고 싶은지 답답함마저 느끼는 게 사실이다. 다른 소설들이라면 한 장으로 압축할 만한 이야기를 길게 늘여놓은 것이다. 이 부분은 지루함을 느끼기 쉽다. 하지만 3부 변태부터는 이야기가 속도감이 생기고 흥미로운 소재들의 등장으로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애벌레가 변태를 해서 사상 최악의 괴물로 탄생하다. 인간의 정신을 흡수해 빨아먹는 악몽의 생명체. 천적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괴물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세상에 풀려난다. 독자는 여기서 흥미를 느낀다. 이제 이 괴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도시는 이대로 괴멸될 것인가. 아니면 반전에 성공할 것인가.

  시장은 먼저 악마와 만난다. 여기서 앞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던 환상성이 갑자기 흥미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마조차 그 괴물을 두려워하고 아무리 최상의 조건을 내걸어도 응하지 않는다. 악마조차 두려워하는 괴물이라니! 악마도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꿈을 꾸기 때문에 괴물을 제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이 꺼리는 두 번째 대안은?

  바로 ‘직조자’라는 존재다. 거대한 거미의 외형을 가진 이 직조자는 생략 어법을 사용하는 정말 특이한 존재다. 세계를 거미집으로 삼아 자신에게만 보이는 에테르 천의 무늬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역시 강력한 힘을 가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기이하면서 독특한 매력적인 존재였다. 놀랄만한 지적 능력과 재료 마법 능력을 갖추고 거미집을 사냥용으로 쓰지 않고 심미적 객체로 보게 된 기이한 정신 세계의 예술가가 직조자다. 이 소설의 개성과 매력, 흥미는 바로 이 직조자가 짜넣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재미있었다. 이 소설은 지루한 배경 설명이 끝나고 사건이 벌어진 뒤에 슬슬 재미를 느끼게 되는데, 본격적으로 독자가 소설에 빠져드는 끊는 점을 꼽아보자면 396쪽이라고 할 수 있다. 악마의 대사와 회담이 실패하고 시장이 그럼 직조자를 만나러 가볼까,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과연 악마보다 더 꺼리면서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그 강력한 ‘직조자’는 어떤 존재일까에 대한 흥미가 글에 놀라운 흡인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직조자뿐만 아니라 1권에서 결정적인 흥미를 제공하는 존재가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청소기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인공적인 지능을 갖게 된 청소기다. 이 소설은 신체를 변형하고 물질을 변형하는 다양한 마법이 존재하는 한 편, 기차가 다니고 자동 청소기가 존재하며 기계가 인공지능을 갖게 되는 등 SF적인 요소도 섞여 있다. 또한 마법 역시 과학적으로 해석되면서 뉴크로부존만의 법칙 안에서 사용되어지고 연구되는데 이 점도 과학적으로 비친다. 이 소설은 환상소설이면서 한편 과학적 요소도 섞여 있는 작품이다.


  구성의 매력


  이 소설은 300쪽이 넘도록 차츰 사건이 벌어질 분위기를 암시하면서 인물들과 배경을 소개하는데 주력하고 있지만, 괴물이 깨어나고 숨가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앞에서 하나씩 느긋하게 나왔던 인물들과 배경이 섞이면서 놀라운 재미를 제공한다. 앞에서 힘겹게 읽어나간 내용들이 나중에는 하나로 합쳐지면서 구성의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가령 청소기가 망가지고 수리공이 와서 수리를 할 때 수리공은 일부러 바이러스를 주입해서 복선을 넣는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위기에 처한 순간, 청소기는 쪽지를 통해 친구의 배신을 일러주는 활약을 선보인다. 또한 주인공 아이작의 야가렉을 날게 하기 위한 연구는 상당히 진척이 된 상태인데, 그 도중에 그가 발견한 엄청난 기술은 사건을 풀 핵심적인 열쇠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잠깐씩 나왔던 인물들이 하나로 뭉쳐서 살아남기 위해, 도시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모습은 뛰어난 재미를 준다.

  

  매력적인 악몽의 서사시


  이 작품은 한 마디로 기이한 악몽 같은 소설이다. 어둡고 음울한 꿈 속 세계를 독자는 독서를 통해 간접체험 할 수 있다. 마치 악몽 속 세계처럼 기괴한 세계 속에서 괴물에게 쫓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꿈이라기 보기에는 눈에 잡힐 듯 묘사되는 도시의 모습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환상을 체험하게 만든다. 게다가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뿐만 아니라 때로는 깜짝 놀랄 만큼 근사한 문장들을 만나게 되는데 작가가 그만큼 굉장히 공들여 쓴 문체 또한 인상적이다.

  한 마디로 구성이나 세계관, 캐릭터 등에서 굉장히 탄탄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은 소설이며, 모험소설로도 충분히 재미있고, 초반만 넘기면 환상적인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는 매혹적인 소설이다.

  정말 오랜만에 뛰어난 환상소설을 접했다. 뉴크로부존이라는 도시를 만들어낸 작가에게 경의가 느껴질 정도다. 환상소설 또는 과학소설을 좋아하는 장르소설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소설이며, 읽고 나면 2부와 3부도 기대하게 될 것이다.

  환상소설을 좋아한다면, 또 환상소설을 쓰고 싶은 지망생이라면 이 작품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은 낯선 작가와 제목 또는 두툼한 분량 때문에 놓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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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로버트 J. 소여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제대로 된 페이지터너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장르소설을 만났다. 웬만한 소설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빠른 소설이다. 어떤 책들은 때론 재미가 있으면서도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가 느린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쉴새없이 몰아치면서 도무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들며, 결국 책 한 권을 읽게 되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그만큼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뛰어난 소설이다.

  작가는 ‘영미권 엔터테인먼트 SF의 1인자’, ‘SF계의 양대 산맥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모두 수상한 몇 안 되는 작가’ ‘캐타나 최고의 SF 작가’, ‘SF만으로 먹고 사는 유일한 캐나다 작가’, ‘캐나다의 아이작 아시모프’ 등의 평을 받고 있는 로버트 J. 소여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로버트 J. 소여는 그의 대표작인 [멸종(End of an Era)]을 통해 그의 재능을 마음껏 한국 작가들에게 첫 선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미 상당히 많은 한국 독자들이 그의 매력에 빠져서 책장을 순식간에 넘긴 것은 물론이다.

  작가는 캐나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SF 작가이며, 스스로 ‘하드 SF 작가’라고 말한다고 한다. 또한 각종 미디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도 방대한 작가 사이트를 통해 독자와 동료 작가들과 교류하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독자가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인 재미를 가진 작품이다. 일단 소재부터가 독특하여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금은 멸종해 버린 ‘공룡’과 SF의 매력적인 소재인 ‘시간여행’이 결합되어 초반부터 흥미롭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뿐만 아니라 양자역학과 휴머니즘까지 더해진 근사한 작품이다.

  간략히 작품 소개를 하자면 서기 2013년 중국계 캐나다인 물리학자 칭- 메이 황의 주도로 인류는 시간여행 기술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자세한 원리는 화자도 잘 모른다는 식으로 가볍게 넘어가고 있다. 이야기 진행에 있어서 ‘시간여행’의 원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며 다 읽고 나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또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점은 이 소설이 탄탄하게 구성되었으며 이 소설의 묘미 중 하나가 바로 그 ‘구성’에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라 ‘시간 여행’은 가볍게 지나갔지만 ‘공룡’에 대한 부분은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이 공룡의 멸종이 또한 중심 소재이고 작가가 스스로 ‘하드 SF 작가’라고 부르는 만큼 개정판에 최신 학설을 수정해 넣을 정도로 정성을 들였기 때문이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를 배려하기 위해 더 이상의 내용 언급을 하기는 어렵지만, 읽으면 누구나 이 책이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고 이전에 나온 다양한 SF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공룡’과 ‘시간여행’ 말고도 다양한 소재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며 독자를 깜짝 놀래 키고 이야기를 더욱 점입가경의 재미로 이끌어간다. 미리 몇몇 소재나 내용의 일부를 알고 읽어도 글의 재미가 크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장 온전한 재미를 느끼고 싶은 독자라면 아무런 부가 정보 없이 이 책을 바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특히 인터넷 서점에 나와 있는 정보들은 스포일러가 많으니 접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양한 소재를 갖고 놀고 버무리는 솜씨가 훌륭한 작가이며, 거기서 감동과 여운을 느끼는 장치 역시 잘 넣었다. 한 번 펼치면 끝까지 읽을 때까지 딴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는 SF소설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 책이 제격일 것이다. 평소에 SF를 자주 보지 않는 독자라도 상관없다. 이 책에는 그렇게 어려운 과학 지식으로 무장하지 않았고, 딱딱하고 지루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이야기 전개 속도는 무서우리만치 빠르고 머릿속에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장면마다 영상으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주위에 SF를 잘 읽지 않는 친구에게 권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인 재미를 확보했다.

  공룡의 멸종에 대해서 평소에 조금의 관심이라도 있었던 사람이라면 더욱 빠져들 것이다. 이 책은 직접 햄버거 같은 우주선을 타고 공룡의 시대로 날아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공룡의 멸종설에 대해서 두 명의 인물이 서로 상반되는 의견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다. 과연 공룡이 멸종한 이유는 무엇이고 그 시대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공룡은 왜 그렇게 거대한 생물이었던 걸까. 공룡이 사라진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시간여행이 소설 속에서 근미래에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공룡의 멸종의 순간을 직접 경험한 주인공에 의해서 우리는 그 긴박감 넘치는 순간을 손에 땀을 쥐며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아직 경험할 수 없는 긴장감 넘치는 엔터테인먼트를 바로 이 책이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직도 SF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이야기가 현재도 종이로 출간되어 살아남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멸종(End of an Era)]은 바로 그런 이야기 본연의 재미에 충실하며 SF의 경이감도 놓치지 않고 있는 잘 쓰인 책이다.

  이 책은 다양한 고전 클리셰들을 활용한 스토리, 시간여행과 맞물린 구성만이 아니라 생동감 있는 캐릭터들도 글의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인 만큼 주인공에게 독자는 몰입할 수밖에 없는데 사랑하는 아내가 클릭스에게 넘어가서 슬픔에 빠진 상태로 둘이 같이 6500만년 전으로 간 주인공의 심리 상태는 글에 계속 긴장감을 부여해주고 독자가 주인공에게 감정을 몰입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완벽한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하게 슬픔을 느끼고 불안한 인간이라는 점이 잘 다가온다. 이 캐릭터들이 공룡과 맞닥뜨리고 죽을 위기를 넘기기도 하고 또 클릭스와 불화를 겪기도 한다. 그리고 독자를 당황과 감탄에 빠져들게 하는 사건에 일어남으로써 모험 소설의 재미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읽고 나면 정말로 가상현실을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실제로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공룡을 보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스펙터클한 모험을 겪은 것 같은 느낌을 이 책은 충분히 보여준다. 즉, 빠른 속도감으로 무장한 종합선물세트 같은 현대 SF소설이다.

  SF를 읽는 독자라면 2009년 드디어 한국에 소개된 로버트 제임스 소여의 이 책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물론 SF 독자가 아니라 관심을 가지려는 독자에게도 이 책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것을 확신한다. 공룡을 좋아한다면 당연히 필독이다.) 또한,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나서 국내에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차례차례 소개되기를 바란다. 이 책으로 인해 작가의 능력은 충분히 느꼈기 때문에 작가 소개에 적힌 이 작가의 다른 책들에게도 엄청난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오락성 높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이며, 그 이야기의 속도감은 여느 소설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책장을 마구 넘기게 되는 진정한 페이지터너를 만나고 싶다면 여기 [멸종(End of an Era)]이 있다. 만약 다음 날 중요한 일이 있다면 밤에 이 책을 펼치지 않기를 권한다. 펼치는 순간 새벽까지 이 책을 다 읽고만 자신을 발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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