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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피다 ㅣ Nobless Club 14
이헌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시간은 피다
―――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춤을 추고 인간을 먹고
시간은 피다
――― 소련 62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
레닌그라드를 철저히 파괴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든 후 전기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완전 봉쇄한다. 겨울이 지나면 최소 100만 명이 굶어 죽을 것이니, 그 편이 전 도시를 점령하는 것보다 소련군의 사기를 꺾는 데 더 효과적이며 또한 공격 시 따를 아군의 희생을 줄이는 방법이다.
――― 독일군 폰 레프 원수
――― [시간은 피다], 이헌, 로크미디어, 9쪽
노블레스클럽 열네 번째로 출간된 [시간은 피다](이헌, 로크미디어, 2009년 6월)는 여태껏 한국에서 나온 소설 중 가장 독특한 소재를 다룬 소설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한국이 아니며 동시대도 아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포위 아래 900일간 고립된 레닌그라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소재부터 기대와 우려가 같이 든다. 우선 새로운 소재와 이야기를 다뤘을 거란 기대감이 드는 한편, 그만큼 어려운 소재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작품일지 걱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예상보다 더 잘 쓰인 작품이며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루하거나 난해하지 않고 적절하게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에 치중하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후반부에는 강렬한 갈등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급진전 시켜서 마침내 예정된 결말로 치닫는다.
실제 역사 속 도시를 배경으로 삼았음에도 큰 위화감 없이 이야기를 읽어나갈 수 있었다. 한국이 아닌 외국을 무대로 하고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은 전혀 외국인처럼 느껴지지 않고 전부 어색하게 느껴질 위험이 있는데 이 소설은 능숙하게 실제 레닌그라드를 어느 정도 체험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쓰였다.
내가 그 애에게 한 숟갈이라도 나눠 준다면 내 어머니가 죽을 것이다. 그럼 세르게이는 날 용서하지 않겠지. 나도 날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냄비에 일기장을 통째로 넣고 끓였다. 다행히 제본은 실이 아니라 풀로 되어 있었다. 귀한 장작을 하나씩 넣어 가며 겨우겨우 살리는 불에 오래 끓이면 풀이 흐물흐물해진 종이를 부드럽게 응고시켜 좀 더 먹기 편해진다. 가죽으로 만든 젤리보다는 종이 펄프가 낫다.
가죽 젤리는 단백질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가 아프다. 괴혈병으로 피가 나는 잇몸으로 가죽을 씹으면 턱관절이 빠질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눈에 띄는 가죽이란 가죽은, 사람들이 껌처럼 빨아 먹고 씹어 먹고 삶아 먹어 버렸다.
표면에 고인 잉크를 흘러 버린 뒤, 나는 어머니와 시퍼런 종이 죽을 먹었다. 괴로움과 분노와 슬픔이 검푸른 물로 흘러 내렸다.
――― [시간은 피다], 이헌, 로크미디어, 20~21쪽
이 소설은 ‘굶주림’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전쟁의 광기로 인해 고립된 도시, 레닌그라드. 고립된 도시하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식량이다. 끝없는 굶주림. 도시에 갇힌 사람들에게 굶주림은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초반에 넣을 수 있는 아무거나 다 넣어서 만드는 레닌그라드 식 수프를 소개하는 식으로 이들의 굶주림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한다. 읽으면서 내내 이들의 고통을 체감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전쟁의 참혹함은 바로 이런 굶주림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사람이 죽거나 팔 다리가 잘려나가는 장면이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렇게 먹을 게 없이, 언제 전쟁이 끝날지 모르는 암담함이 전쟁의 비극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에게 900일만 참으면 된다고 말해주면 좀 더 나았을까. 언젠가 끝이 온다고 조금만 참으라고, 그렇게 이야기해주었다면 레닌그라드에서 식인을 하는 사람은 줄어들었을까. 이 소설은 굶주림을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 식인을 이야기한다. 먹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 식인은 도저히 거부하기 힘든 유혹일 것이다. 그러나 식인이라는 것, 식인종의 존재는 이 소설에 끈적끈적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매일 친근하게 굴고 웃으며 인사하는 이웃이 어느 날 식인종으로 돌변해 자신을 납치해서 먹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전쟁 속 고립된 도시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강도, 살인, 강간, 식인까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절망하며 처절한 삶을 이어나갈 것인가. 보통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두 소녀, 일로나와 타티야나는 밝게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에겐 또 이 두 소녀에겐 ‘발레’가 있기 때문이었다. 발레는 그들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시켜주는 고결한 예술이다. 포위 되었어도 레닌그라드에서는 공연이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놀라운 일이다. 이 두 소녀 또한 춤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제고 무대에 서는 날을 고대한다. 그런 꿈이 힘겨운 현실에서도 삶을 버텨나가게 하는 힘이 된다. 이 소설은 이렇듯 ‘식인’이라는 소재와 짝을 맞추듯 ‘발레’라는 소재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작가는 레닌그라드와 발레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자료 조사를 한 것이 눈에 보인다. 곳곳에 설명되는 레닌그라드와 발레에 대한 설명과 묘사는 적절한 분량으로 이야기와 결합되어 있다. 발레에 대한 전혀 조예가 없었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읽어나갔고 지루하지 않았다. 아마 발레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잘 알았다면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발레 또는 예술은 이 소설에서 식인에 반대에 위치하며 삶과 동일하다. 레닌그라드에서 공연을 펼치는 단원들은 지원도 없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자신을 바쳐가며 공연을 하고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으면 대체될 뿐이다. 사람들은 포위된 상태에서도 매일 공연을 보러 간다.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식인도 은밀히 이루어지고 있다. 살인과 강도와 강간도 일어나고 있다. 이 기묘한 대립이 무척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레닌그라드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이 소설을 통해 전쟁의 광기와 처참한 절망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곳곳에 배치된 레닌그라드의 당시 상황 이야기는 작품에 사실성을 주고 배경의 질감을 느끼게 했다.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소설에 녹아들려면 수많은 조사를 거쳐야 하고, 구성에 공을 들여야 한다. 문장력도 안정적이고 치밀한 조사와 함께 뛰어난 구성이 짜여졌기 때문에 이 소설이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타티야나는 나타샤가 잘난 체가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에는 일로나를 끌어당기는 것이 있었다. 평생 춤에만 헌신하여 죽어서도 춤만 추는, 춤에 모든 것을 바친 생.
춤에 내 삶을 주면 춤도 내 것이 될까.
지젤은 춤에 목숨을 주었지. 춤추지 말고 병상에만 누웠다면 목숨은 건졌을 거야. 그러나 그녀는 그 고통을 삭이지 않고 춤으로 표출했고, 그래서 죽어 가면서도 춤을 출 수 있었던 거야. 그녀의 사랑, 삶과 죽음을 춤으로 표현하며 죽을 수 있었던 거야.
광란의 춤,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미친 듯이, 사랑의 고통으로 가슴이 터져 버린 처녀의 광기를 표현하는 춤. 순박한 시골 처녀를 불멸의 무희로 변모시킨 춤.
그 실체는 유미주의자 테오필 고티에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안나 파블로바도 올가 스페시브체바도 평민이었다. 오데트나 오로라처럼 공주인 무희야말로 발레의 세계에서나 있는 일이다. 공주가 아닌 니키아는 어떻게 됐지? 감자티 공주에게 약혼자를 빼앗기고 독사에게 물려 죽었지.
안나와 올가는 지젤의 열정을 품고 있었다. 그 열정을 광기로 폭발시킬 혁명과 전쟁의 시련도 겪었고. 바로 일로나가 지금 그러하듯.
내겐 광기가 있어. 내 안에 그것이 존재해. 일로나는 발목을 감싸고 돌며 귀 뒤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밤바람에 속삭였다. 누가 그 속삭임을 들을까. 누가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까.
――― [시간은 피다], 이헌, 로크미디어, 176쪽
이야기는 묵직하지만 두 소녀의 내면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밝은 부분도 존재한다. 감각적인 문체로 소녀들의 심리를 그럴듯하게 잘 묘사한 소설이다. 소재뿐만 아니라 그 소재를 어색하지 않게 소화한 문체가 뛰어나다. 지금껏 다른 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문체이며 자연스럽게 참혹한 환경을 형상화하고 있다. 레닌그라드라는 공감하기 힘든 참혹한 환경을 두 소녀의 심리를 통해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전쟁 속에서라도 두 소녀가 마냥 행복하게 밝게 지나가다 포위가 풀리고 행복한 미래를 맞이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세상은 또한 전쟁은 두 소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두 소녀에게는 차례차례 절망이 찾아왔고 마침내 파국의 결말을 맞는다. 결말은 그 처절함과 강렬한 장면들의 연속이 마음에 들었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처음에 프롤로그가 장면들로 제시하고 순차적이지도 않아서 난해하게 읽히는데, 다 읽고 나서 다시 그 부분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야말로 괴물이 혼란스러운 기억들 속에서 끄집어내는 기억의 편린을 제대로 보여준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섬세한 감정 묘사와 참혹한 전쟁의 광기를 잘 그려낸 작품이었다. 차분한 전개와 레닌그라드와 당시 시대상, 발레에 대한 고증이 뛰어난 작품으로 보였고, 낯설고 어려운 소재를 선택해서 인상적으로 소화한 소설이다. 제목이 눈길을 끌기 어렵고 아직 브랜드가 확고한 지지층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겁고 진지한 작품이라 많은 호응이 없을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글을 읽고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사서 읽고 작가의 다음 작품도 빠른 시일 내에 또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며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