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선혈 Nobless Club 15
하지은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모래선혈


  ――― 단 한 명의 독자


  [모래선혈]은 2008년 겨울, [얼음나무 숲](하지은, 로크미디어, 2008년 1월)이라는 작품으로 노블레스클럽의 첫 작품이자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던 작가의 신작이다. [얼음나무 숲]은 ‘음악’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택한 환상소설이자,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많은 독자들에게 좋은 평을 받은 작품이었다. 오랜 시간 뒤에 출간 된 [모래선혈]은 전작과는 유사하면서 색다른 소설이었다. 여전히 유려한 문체는 그대로였고, 낯선 환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 전작이 음악가들이 나왔다면 이번에는 작가들이 나오는 소설이다.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을지 짐작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요소일 것이다.

  프롤로그는 황제의 주사위로 시작한다. 이 주사위의 설정부터가 흥미롭다. 모욕, 감금 구타, 절단, 소유 그리고 죽음이 적힌 절망의 주사위와 지연, 재도, 무통, 구제, 갑절 그리고 반전이 적힌 구원의 주사위가 존재한다. 프롤로그에 등장한 이 주사위는 처음에는 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마지막에 다시 나옴으로써 그 의미가 드러난다.

  이 소설은 모래처럼 건조하고 텁텁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삭막하고 단조로운 느낌이 있다. 전체적으로 무채색의 느낌이 드는데, 이는 주인공인 ‘레아킨’이 색을 볼 수 없고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사막을 가로질러 속국의 심판관으로 가게 된다. 그가 그런 변방의 땅으로 가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단 한 권의 책 때문이다. 그는 라노프라 불리는 속국의 작가의 책을 읽게 되었고 거기서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이 작가라면 자신의 병을 고쳐 색을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된 것이다. 그 작가는 바로 [호반 위 황금새]의 작가인 비오티였다.

  레아킨은 라노프의 수도 옐린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레아킨이 오기 전 심판관이었던 귀스트 아고스토를 만나고 죽은탑의 심판관으로 부임한다. 레아킨은 심판관으로 부임해 반란군들을 단호히 처형하는 한편, 자신이 이곳에 온 단 하나의 목적인 작가 비오티를 찾는다. 혼자 밖을 나돌아 다니기도 하고, 예술가들을 초청해 파티를 열기도 하면서.

  마침내 레아킨은 비오티와 조우하게 되고 예상외의 모습에 처음에는 실망하나 곧 비오티가 자신의 병을 고쳐주기를 바라게 된다. 이때 레아킨의 모습은 지극히 순수해 보인다. 색을 보지 못하고 감정을 알지 못하는 이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그가 슬픔과 절망을 알아가고 사랑까지 하게 되는 모습은 이 소설의 주된 매력이다. 이 소설은 한없이 음울하거나 어둡지만은 않은데 인물 관계가 선명하고 주인공인 레아킨의 순진한 구석이 밝은 재미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중간에 만화 데스노트의 패러디나(사소하지만) 작가의 전작 내용이 언급되는 부분들은 재미를 주었다.

  이 작품의 초반부의 주요 갈등은 라노프와 쿠세와의 갈등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식민지 시대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이들이 시위를 벌이고 공권력에 탄압받는 장면들은 현 시대의 촛불집회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많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작품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점들이 나타난 것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작가와 독자 모두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동시에 전반부부터 환상적인 요소가 암시로 깔리다가 후반부는 이 환상성이 중심으로 된 갈등과 대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환상세계에서 작가라는 소재와 색을 못 보는 남자를 결합한 소설로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소재부터 독특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전작의 주인공들보다 이번 편의 주인공들이 더 개성이 살아있고 생동감이 있는 느낌이었다. 이야기는 약간 헐거운 감이 있어서 아쉬웠는데, 전체적으로 틈이 보이지 않고 몰아붙인 전작에 비해서 이번에는 틈새가 많고 느슨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경로대로 이야기가 흘러간 느낌이 있었다.(반전이랄 것이 약했고, 사건 전개도 편하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조금 더 촘촘하게 전개되면서 한편으로는 분량이 더 길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작가를 소재로 잡고 소설 속에 몇몇 작품들도 소개되는 만큼 소설 속 소설의 본문 길이가 더 늘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읽어 내릴 수 있는 소설로 엔딩에는 여운이 진하게 남았다. 읽는 속도는 전작보다도 빨랐다. 그만큼 흡인력이 있는 소설이다. 충족감은 전작보다 적을지 몰라도 이 작품은 분명 자기만의 고유의 색과 개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한 작가가 있었다. 자유분방하고 자기 멋대로 글을 쓰는 작가.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글을 쓰는 작가. 재기 넘치고 자신감에 찬 작가. 그리고 한 독자가 있었다. 색을 보지 못하는 남자. 고통도 좌절도 알지 못하는 남자. 그러나 한 작가의 글에서 희망을 발견한 남자. 사막은 둘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국경도, 가치관도, 신념도 부질없었다. 두 사람은 하나의 작품으로,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로 소통할 수 있었으니까. 남자는 결국 색을 볼 수 있었을까. 분명 보았을 것이다 바다빛 색깔을, 무채색의 모래가 청푸른 바다색으로 변하는 광경을. 모래에 떨어진 핏빛 선혈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믿고 믿는 대로 글을 썼을 것이다. 소설은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 결핍되었다고. 그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렇기에 우리는 무채색 모래에서 붉은 선혈을 보고, 그네들의 운명과 삶을 목도하며 나아가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과연 색을 보고 있을까. 현실을 직시하고 있을까. 자신을 울리는 글을 찾아 읽고 있을까.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한 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처음 [얼음나무 숲]을 접했을 때, 리뷰에서 이 작가의 작품이 나오면 바로 구입하게 될 것이라고 적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기대되는 작가이며 보기드믄 환상과 재미를 동시에 주는 작가이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또 기대된다. 이번에는 어떤 환상 속으로 데려가 줄지, 어떤 인물들을 만나게 될지,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다음 번에도 또 그 다음 번에도 나는 이 작가의 작품을 주저 없이 구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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