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힘 2 밀리언셀러 클럽 125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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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힘에서 구하소서.”
― 시편 22장 20절


 [지하에 부는 서늘한 바람]을 썼던 돈 윈슬로의 [개의 힘](황금가지, 전 2권)이 출간되었다. [지하에 부는 서늘한 바람]은 작가의 사설탐정 경험을 바탕으로, 매력적인 탐정을 등장시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갔다. 특히, 암시와 복선을 잘 맞춰진 구성은 상당히 근사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또한, 인물에게 개성을 부여하는 것이나, 대화의 센스도 뛰어나서 한 마디로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다.
 [개의 힘]은 그러한 장점들을 그대로 가지고 간 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펼쳐지는 거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로 확장시켰다. 멕시코와 미국 등 중남미를 넘나들며 마약 시장을 중점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마피아와 마약 단속국, CIA, 정부, 경찰 등 다양한 단체들이 한데 뒤섞이면서 유장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적절한 장면 전환과 감각적인 대사들로 끝없이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야 말로 잘 만들어진 대작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쉴새없이 등장하지만, 인물 하나하나마다 개성이 부여되어 있고, 사정없이 배신과 죽음이 펼쳐지면서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빠트린다. 죽음이 너무나도 담담하게 등장하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누가 죽을지, 이야기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재미있다. 결말까지 신나게 달려나갈 수 있는 책이다.
 돈 윈슬로의 특징은 일단 번역된 글임에도 매우 잘 읽힌다는 점이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고 이야기에 필요한 문장들이 적재적소에 들어가 있어서 깔끔하게 읽히며 흡인력이 뛰어나다. 뿐만 아니라, 구성도 치밀하게 쌓아올리기 때문에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긴 세월을 다루어도 독자가 혼란을 느낄 여지가 거의 없다.
 때로 너무나 장대하고 완벽하기 때문에 영화로 만들기 힘들 것 같은 책이 있다. [개의 힘]이 바로 그렇다. 장면 하나하나가 영상으로 머릿속에 재생되지만, 인물 한 명 한 명마다 묘사되는 심리와 장대한 시간을 영화 한 편으로 담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어느 장면도 버릴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소설이 가장 잘 맞는 매체라고 생각된다. 영화화하기 힘들 정도로 유장하며 근사한 이야기가 [개의 힘]에 담겨 있다. 영화를 보면 되지, 왜 굳이 책을 읽느냐고 할 때, 소설이라는 매체만의 장점을 모두 갖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영상화하기 힘든 [개의 힘] 같은 작품이 있기에 텍스트의 재미를 만끽한다.
 [개의 힘]은 ‘마약 전쟁’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조금은 낯선 소재일 수 있으나, 각종 헐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접했기 때문에 금세 빠져들 수 있다.
 중요 인물은 일단 마약 수사 전담반에 ‘아트 켈러’다. CIA 출신인 마약 수사 전담반 요원인 아트 켈러는 처음에는 배치된 곳에서 동료들의 무시를 당하지만, 곧 ‘미겔 앙헬 바레라’(티오)의 도움으로 콘도르 작전을 성공시키며 입지를 쌓는다. 그러나 이 작전은 미겔 앙헬 바레라의 1970년대 마약 카르텔의 보스인 ‘돈 페드로’를 없애고 자신이 모든 마약 조직의 보스로 올라서기 위한 계략이었다.
 ‘아트 켈러’는 자신이 이를 돕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미겔 앙헬 바레라’를 독자적으로 수사한다. 이 구도는 마치 만화 [몬스터]를 떠올리게 한다. 한 남자와 아이 중에서 아이의 목숨을 살린 의사가 그 아이가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을 깨닫고 혼자서 추적해 나가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이야기는 점점 복잡해진다. ‘아단 바레라’라는 ‘미겔 앙헬 바레라’의 후계자와 반목하게 된다. 아트 켈러는 아트 켈러가 설치한 도청 장치에 의해 내부 배신자가 있다고 의심하게 된 마약 밀매 조직에서는 분열이 일어나고 마침내 아트 켈러의 ‘어니 이달고’를 납치해 고문 끝에 죽이게 되는데, 이것이 아트 켈러가 모든 것을 걸고 평생을 마약 밀매단과의 싸움을 하게 되는 도화선이 된다. 아트 켈러는 국경의 왕이라 불리게 되며 아단 바레라는 하늘의 군주라고 불리게 된다. 국경의 왕과 하늘의 군주의 잔혹한 싸움이 1000페이지 속에서 펼쳐진다. 이 외에도 미국 치미노 조직의 션 칼란은 뉴욕 출신 아일랜드계 10대 소년으로 이야기의 비중으로 세 번째를 차지한다고 할 만한 중요한 인물이다. 냉정하고 대범한 일처리 능력으로 뛰어난 킬러로의 자질을 발휘한다. 이 이야기는 이렇듯 아트 켈러를 중심으로 한 마약 수사 전담반 쪽과 아단 바레를 중심으로 한 바레라 카르텔, 칼란을 중심으로 한 치미노 조직의 세 이야기가 나오며 이 세 인물과 모두 연관을 갖는 노라 헤이든이라는 고급 콜걸이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을 차지한다. 결손 가정에서 자란 노라 헤이든은 헤일리의 눈에 띄어 고급 매춘부가 되는데, 각각의 인물들과 연관이 되고 살벌한 소설 속 상황에서도 로맨스 적인 요소까지 넣고 있다. 이 외에 후안 오캄포 파라다라는 가톨릭 신부가 역시 노라 헤이든의 친구이자, 이야기의 중요한 역할로 나온다.
 아트 켈러는 전형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비치지만, 그의 뛰어난 능력에 반해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약 수사에 매달리는 이유가 잘 와닿지는 않는다. 마치 운명에 속박된 듯이 보이는데, 동료가 자신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해도, '미겔 앙헬 바레라'가 자기 때문에 보스가 되었다고 해도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이미 '개의 힘'에 빠졌기 때문이리라.(구약성서에 나오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고뇌에 빠뜨린다는 악의 상징. 이 표현은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몰아낼 수 없는 악과 모두에게 내재된 악의 가능성을 가리킴. 이 소설에 나온 모든 인물은 인간에게 내재된,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부터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악의 힘을 표출하고 있다. 성직자인 중요 인물 후안 신부까지도 개의 힘에 마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인상적인 군상을 보여준다.)
 션 칼란은 냉정한 킬러면서도 신부의 죽음에 크게 마음이 흔들리면서 독자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만든다. 이후 그는 만화속 주인공처럼 빠른 판단과 정의를 돕는 행등으로 멋있는 면모를 보인다.(전형적인 캐릭터이면서도 역시 매력적이다.)
 노라 헤이든은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여성이면서 역할이 부여되어 있고 활약하는 인물이다. 능동적이며 자기 생각이 있고, 이 소설의 전개가 마치 운명의 물살처럼 개인이 어찌할 수 없이 흐르는데도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빛난다. 강인하며 매력적이고 감정이입이 되며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게 되는 인물이다. 이 소설에 빠질 수 없는 매력을 더하는 핵심 인물이다.
 미 정부의 베트남 전쟁부터, 중남미 마약 정책까지 다양한 정치적인 요소를 소설 속에 녹아냈으며, 멕시코시티 지진이라든가, 정치적 암살, 실존인물을 집어넣어 사실성을 극대화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마치 실제로 펼쳐진 듯이 몰입하며 읽게 되는 것이다.
 중요인물만 몇 십 명이 되고, 이야기가 여러 지역을 넘나들며 30년이 넘는 세월을 다루기 때문에 자칫 복잡하지만 빠른 전개와 인물들의 연관성을 부각하는 구성이 탁월해서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왔기 때문에 마약 전쟁이라는 것은 마치 영화속 일로만 느껴졌으며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재미있는 소설 한 권으로 마치 논픽션을 읽는 듯이 북미와 중남미에 마약이 차지하는 위치, 마피아와 마약 밀매단과 정부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묶여 있는지, 그 속에서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금 감을 잡게 되고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여러모로 인상적인 책일 수밖에 없었다.
 하드보일드한 문체와 인물들, 장대한 서사의 힘, 긴박한 스릴감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물론 아무리 장대한 스케일이라고 하더라도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한 서술은 어렵고 특히 인물들의 실수를 하는 장면들이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으나, 이런 단점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캐릭터나 이야기가 강렬한다.
 무서울 정도로 잔혹하고 냉정하며 장대한 범죄 세계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은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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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 실크 하우스의 비밀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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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 저기 그가 파이프를 손에 들고 서 있다.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고는 미소를 짓는다. “사냥이 시작되었네…….””(17쪽)

 

 

셜록 홈즈가 돌아왔다. 이미 작가가 죽은 지 오래인데 어떻게 새 소설이 출간될 수 있는가? [셜록 홈즈 – 실크 하우스의 비밀]은 물론 코난 도일이 쓴 셜록 홈즈 시리즈가 아니다. 다른 작가가 쓴 ‘셜록 홈즈’다. 이런 종류의 소설들은 워낙 많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 소설이 기존에 다른 셜록 홈즈 팬픽들과의 차이점은 바로 코난 도일 재단에서 처음으로 공식 인정한 소설이라는 점이다. 작가인 앤터니 호로비츠는 국내에는 잘 소개되지 않아 낯설지만 현지에서는 2007년 영국 출판업계 시상식에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소설가이자 각본가라고 한다.
대표작 「알렉스 라이더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1200만부나 팔렸다고 하니, 얼마나 유명한 작가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앤터니 호로비츠가 쓴 [셜록 홈즈 – 실크 하우스의 비밀]은 결코 가볍게 쓴 작품이 아니다. 작가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무려 8년 동안 자료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작품을 준비했다.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의 배경인 1890년도에는 런던 광역시 자치구라 불리는 4만 7000여 평의 지역에 약 550만 명의 주민들이 거주했고, 늘 그래왔듯 부유층과 빈곤층이라는 영원한 이웃이 아슬아슬하게 나란히 살고 있었다.”(107쪽)

 

 

코난 도일 재단이 공식 인정한 소설이라고 해서 마치 코난 도일이 되살아나서 쓴 듯한 ‘셜록 홈즈’ 시리즈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설정부터 원작을 이어쓴 작품이 아니라, 원작을 존경하면서 새롭게 쓴 오마쥬한 작품임을 드러내고 있다. 즉, 코난 도일이 쓴 원작과 함께 꽂아놓을 만큼 완벽히 같은 작품이라는 느낌보다는 코난 도일을 존경하는 후세의 작가가 썼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얼개는 ‘납작 모자를 쓴 사나이’와 ‘실크 하우스’ 두 개의 사건이 섞인 장편인데, 이 소설의 허구적 설정 안에서는 사건 당시에 발표하지 않았다. 두 개의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발표할 수 없었으며,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상 출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왓슨은 말한다.

 

 

“내가 그만한 여력이 될지 모르겠지만 집필이 끝나면 원고를 봉투에 넣어 채링 크로스에 있는 콕스 사로 보내 내 개인적인 서류를 보관한 금고에 넣어 달라고 할 것이다. 향후 100년 동안 봉투를 개봉하면 안 된다는 당부 사항도 첨부할 것이다. 100년 뒤에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고 얼마만큼 발전했을지 상상이 안 되지만, 미래의 독자들은 현재의 독자들에 비해 추문과 타락상에 좀 더 면역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관점에서 그린 셜록 홈즈의 마지막 초상을 유품으로 남긴다.”(16~17쪽)

 

 

따라서 소설 속 화자인 왓슨은 서류를 금고에 넣어서 향후 100년 동안 개봉하면 안 된다는 사항을 첨부한다고 밝힌다. 즉, 왓슨이 사건 당시에는 공개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셜록 홈즈 사건 하나를 100년 후에 공개하는 조건으로 금고에 넣은 서류가 바로 독자가 읽게 되는 책인 것이다. 작가는 능청스럽게 100년 뒤에 세상이 어떤 모습이고 얼마만큼 발전했을지 상상이 안 간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추문과 타락상에 좀 더 면역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확실히 100년 뒤의 지금이기 때문에 작가는 더 충격적인 소재의 셜록 홈즈를 썼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작가의 치밀한 조사만큼 원전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 그러나 원전과 다른 점도 많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이 작품을 쓰는 왓슨의 시점이 원전보다 시간이 지난 뒤라는 설정 때문에 가능하다.

 

 

“둘이서 주로 셜록 홈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대도 독자 여러분들은 그러려니 할 텐데, 나는 레스트레이드에게 사과하고 싶은 부분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로 나는 책을 쓰면서 그를 이른바 극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지금 생각해도 퍼뜩 떠오르는 표현이 ‘쥐처럼 생겼다’고 한 것과 ‘흰 담비 같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잔인한 표현이기는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 레스트레이드조차 조물주는 그에게 경찰이 아니라 범죄자의 얼굴을 부여했다고, 그쪽을 직업으로 선택했더라면 훨씬 더 돈을 많이 벌었을지도 모른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중략…) 하지만 내가 레스트레이드에게 지적 능력이나 수사력 나부랭이는 아예 있지도 않은 것처럼 간주한 것은 너무한 처사였다.”(94~95쪽)

 

 

작가는 이 설정을 살려서 원전에서 묘사된 허드슨 부인이나, 레스트레이드 경 같은 인물들의 다른 관점을 왓슨을 통해서 드러낸다. 이것은 원전의 느낌이 아니라, 21세기에 읽는 셜록 홈즈라는 것을 물씬 느끼게 한다. 원전을 잘 살린 부분은 작가가 얼마나 많은 조사를 했는지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셜록 홈즈가 상대방이 말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나 옷차림에서 모든 것을 추리하는 모습이나, 사건의 전개 과정 등에서 원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서 특히 좋았다.
차별화된 지점에서는 작가가 자기만의 해석이나 색채를 부여하려고 노력한 점이 또한 좋았다. 원전의 단순한 시각을 후세의 작가가 보완하고 풍성하게 만든 것이다. 셜록 홈즈가 죽고 나서 집필한 왓슨의 유품이라는 설정이 이를 가능케 했다. 원전의 캐릭터들에게 입체감을 부여하며, 이 작품이 셜록 홈즈 시리즈이면서 또 다른 개성과 의의를 지닌 독립적인 작품이 되게 한다. 독자들을 이 작품을 통해 원전에서 단순하게 비친 인물들을 다시 그대로 만나는 게 아니라 앤터니 호로비츠가 재해석한 인물들을 만나면서 원전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이 원전이 있는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원전의 분위기를 잇는 것에만 급급한 게 아니라,(어설프게 흉내를 내느니 차라리 새롭게 재해석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작가가 독자에게 “내 생각에 왓슨이 늙어서 이렇게 후회할 것 같은데 어때?”라며 묻는 듯하다.
작품의 또 다른 기본 설정인 충격적이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 작품이 원전과 차별점을 가진다. 원전에서는 다루지 않은 충격적인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차별화에 성공했고, 독자를 강렬한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미 충격적이라는 암시가 있었기 때문에 읽으면서 사건의 내막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은 아쉬우나, 셜록 홈즈가 이런 사회적으로 심각한 사건에도 끼어들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잘 풀어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원전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왓슨의 관점 변화나 충격적인 소재 등이 이질감을 줄 수도 있다. 또한, 몇몇 이 작가가 넣은 설정이 재미를 주면서도 개연성을 해치는 지점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소설 중간에 왓슨이 모리아티 교수와 만났다는 설정은 작가의 욕심으로 보이기도 한다.

 

 

“약속 하나 해주십시오, 왓슨 박사님. 오늘 이 만남은 홈즈 씨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비밀로 하겠다고 소중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해 주십시오. 책에다 써서도 안 됩니다. 언급해서도 안 됩니다. 내 이름을 어디에서 접하더라도 처음 듣는 이름인 것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해야 합니다.”(268쪽)

 

 

이는 충분히 팬픽으로서는 재미있는 설정이지만, 원전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왓슨이 끝까지 모리아티를 미리 만났다는 사실을 영원한 비밀로 품고 태연한 척을 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허구라고 해도 상식에 비추어 일어나기 어려운 일은 독자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셜록 홈즈 – 실크 하우스의 비밀]은 지금까지 나온 다른 작가가 쓴 셜록 홈즈 소설들과 견주어도 상당히 잘 쓴 작품이다. 원전 그대로의 셜록 홈즈와 왓슨을 만날 수는 없지만, 다른 기반 설정 하에 재해석된 셜록 홈즈와 왓슨을 만날 수 있으며, 이들이 해결하는 새로운 사건이 충분히 독자의 두뇌를 자극한다. 두 개의 사건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면서 독자를 혼란케 하고, 속속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은 독자를 충격에 빠트리며 그 과정에서 홈즈는 누명을 쓰고 구치소에 갇히기도 한다. 추리와 모험이 적절하게 녹아들어 있으며 셜록 홈즈 시리즈 본연의 매력도 잘 깃들어 있다.
‘셜록 홈즈’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영화화된 가공의 인물이며, 탐정의 아이콘이자, 추리소설의 가장 대표적인 시리즈다. 그만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사랑받아온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코난 도일은 이제 없지만 앞으로도 셜록 홈즈 시리즈는 계속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셜록 홈즈 – 실크 하우스의 비밀]은 원전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 회자될 또 다른 셜록 홈즈로 기억될 듯하다.
최근 영화 [셜록 홈즈 : 그림자 게임]의 개봉이나 BBC 드라마 [셜록] 시즌2의 방영으로 다시 한 번 ‘셜록 홈즈’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상태에서 ‘셜록 홈즈’의 또 다른 사건 이야기는 셜록 홈즈를 활자로 더 만나고 싶은 독자들에게 좋은 선택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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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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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 본격 미스터리의 논리

 

 

 본격 미스터리라는 편협한 장르 속에서 걸작이 탄생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하지만 그 기적이 지금 이렇게 독자의 눈앞에 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니시자와 야스히코(작가)

 

 검은숲에서 구라치 준의 추리 소설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이 출간되었다.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가인데 2001[항아리 속의 천국]이라는 작품으로 제1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1996년에 발표하여 제50회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 장편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검은숲 브랜드에서는 꾸준히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재미있는 추리소설들은 소개하고 있다. 특히 성분 함량표라고 해서 고전의 반열, 대반전, 속도감, 캐릭터, 논리정연, 선정성 등 6개의 항목의 5점 만점으로 점수를 채점한다는 것이다. 처음 열어보는 색지에 적혀 있는데, 이것은 독자가 이 작품이 어느 지점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읽을 수 있다. 혹은 서점에서 이 성분 함량표를 보고 작품을 살지 말지를 정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대반전에 4.5점을, 캐릭터에 4, 논리정연에 5점 만점을 넘게 받았다.(무려 물음표로 표기되었는데, 이 성분 함량표는 독자들에게 강력한 추천의 역할도 함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논리적인 해결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SF에서 하드 SF가 과학과 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엄밀한 과학적 이론과 원칙에 입각하여 적힌 가장 SF다운 SF라고 한다면 본격 미스터리는 수수께끼 풀이와 논리에 집중하는, 말 그대로 미스터리의 핵심, 가장 미스터리다운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본격 미스터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90년대에 나온 작품인 만큼 기존 본격 미스터리의 영향을 받으면서 또한 다르게 변주한 지점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별 내리는 산장]은 눈 내리는 산장이라는 클로즈드 서클을 소재로 한 본격 미스터리다. 폐쇄된 산장, 그 안에 고립된 아홉 명의 사람들, 바로 전날까지 웃고 이야기하던 사람이 다음날 변사체로 발견되고 연쇄 살인이 일어나고 경찰이 해결해줄 수 없는 상황. 그야말로 추리 소설하면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기본적인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진부하다거나 뻔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를 매혹적으로 끌어들인다. 그만큼 탄탄한 이야기 전개 실력과 이야기를 전개하는 화자의 캐릭터를 친숙하게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본격 미스터리에서 중요한 것은 치밀한 논리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후반부의 뛰어난 논리 전개를 볼 수 있다. 그 전에 이 작품은 [일흔 다섯 마리의 까마귀]라는 쓰즈키 미치오라는 대가가 한 것처럼 각 챕터마다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말이 적혀 있다. 이 말들은 정확히 사실만을 말하면서 독자를 안내하는 듯이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오히려 이런 친절이 독자를 방심하게 만드는 역할도 하고 있다. 다 읽고 나서도 챕터마다 적혀 있는 글들이 모두 사실이며 동시에 그러면서 독자를 혼란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작가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홉 명이 산장에 갇힌다. 희생자는 두 명이고, 탐정은 한 명이며, 이야기를 관찰하는 주인공은 바로 탐정의 조수이다. 소거법을 적용하면 다섯 명 중에 한 명은 반드시 범인이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본격 미스터리의 장점이라면 독자가 충분한 힌트를 제공받고 탐정보다 먼저 사건을 해결할 수도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탐정과 혹은 작가와 게임을 하듯 대결을 하는 재미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에게 기분좋게 당했고 그 당함 덕분에 더욱 만족스럽고 재미있었던 독서가 되었다. 오랜만에 본격 미스터리를 읽고 본격 미스터리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재미를 느꼈다고 할까. 처음에는 눈 내리는 산장에 아홉 명이 갇히고 그 중 두 명이 연쇄적으로 살인된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는, 너무 뻔한 설정에다가 맥없이 범인이 밝혀지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이 소설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으며 놀라운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만에 금세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소설이었고 논리도 탄탄했고 사건이 해결되는 순간에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큼 재미있었다.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추천하는 책이다. 국내에 소개가 안 된 작가인 만큼 과작이라고는 하나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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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 부는 서늘한 바람 밀리언셀러 클럽 120
돈 윈슬로 지음, 전행선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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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밀리언셀러클럽 120번째로 출간된 책이자 닐 캐리 시리즈의 첫 번째 책입니다. 사립 탐정이 나오는 추리소설입니다. 흔히, 추리 소설이라고 하면 살인사건과 밀실 트릭을 먼저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살인사건이 범인을 추리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이 밖에도 이 소설은 일반적인 추리 소설들과는 다른 점들이 있는데, 이점이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옵니다.

 첫째는 이 소설은 실종 사건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부통령 후보인 하원의원의 딸을 찾는 이야기죠. 마약과 매춘 등의 소재가 등장하기 때문에 선정성이 없지는 않지만, 연쇄 살인이 벌어지지는 않으므로 강력 범죄를 다룬 소설들보다는 소재의 강도는 약합니다.

 둘째는 주인공의 성장담이 같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은 마약에 빠진 홀어머니 밑에서 소매치기로 살아갔었는데, 소설의 첫 시작에는 대학원에 다니며 교수를 꿈꾸는 청년으로 나옵니다. 이 갭이 소설의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도대체 주인공은 어떤 성장을 거친 것인가. 소설은 실종사건을 메인으로 다루면서도 중간중간 주인공인 닐 캐리를 조명합니다.

 아니, 닐 캐리의 성장소설이자 모험 소설로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특히 실제로 사립탐정을 일을 한 적이 있는 작가가 공들여 쓴 사립탐정으로 훈련받는 장면들은 이 소설의 백미입니다. 마치, 닌자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는 것처럼, 미행을 하는 법, 빈 건물에 숨어드는 법 등을 현실감 있게 배우는 장면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사립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에 대해 흥미를 가진 분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부분입니다. 주인공은 놀라운 재능을 보이며 사립탐정으로서 훈련을 받지만, 또한 대학교에 들어가고 대학원까지 가면서 교수가 되는 꿈을 갖게 됩니다.

 소매치기라는 범죄자의 신분에서 사립탐정으로 이끈 것은 가문의 친구들이라는 조직입니다. 이름부터 매력을 느낀 설정이었는데, 지방 은행에서 고객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탄생한 조직입니다. 소소한 사건보다는 중요한 고객들의 문제를 처리하며, 은행에서 탄생된 조직이라 자금이 풍부한 점 등이 재미있는 설정이라고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18세기 영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이자, 어렸을 때는 소매치기였고 우연히 가문의 친구들에 속한 조 그레이엄의 지갑을 훔치다가, 인연을 맺어 사립 탐정으로 길러지고 그러면서도 교수가 되기를 꿈꾸는 주인공 닐 캐리’. 그는 자신을 가문의 친구들이 맡긴 사건, 상원의원의 문제아 딸 앨리 체이스를 찾기 위해 런던으로 향합니다. 닐이 앨리를 만나는 부분에서는 추리보다 우연과 끈기의 잠복이 더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아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만, 앨리를 만나고부터는 더 흥미로워지더군요.

 닐이 앨리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고 모임에 녹아든 다음에 모두를 속이는 부분에서는 마치 뛰어난 사기꾼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는 듯했고, 쫓기고 숨는 과정에서는 스파이 영화를 보는 듯했습니다. 가장 텐션이 높은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번역된 책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가독성이 높지는 않지만, 그걸 이기고도 끝까지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닐 캐리라는 인물에게 매력을 느껴서 어떻게 될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돈 위슬로 작가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첫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인물들을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특히 읽고 나서는 빨리 닐 캐리의 다른 사건들도 읽고 싶어져서 안달이 나고, 도무지 머릿속에서 이 특이한 사립탐정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잘 훈련되었고, 침착하며, 빠른 판단력과 행동 그리고 시종일관 어떤 때든 수시로 등장하는 유머감각은 독자에게 읽는 내내 잔잔한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아마도 이 위트 때문에 닐을 더 마음에 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건이 벌어지는 내내 좀 더 일처리가 간단히 될 수는 없나, 하는 답답함 마음도 들었지만 다 읽고 난 뒤에는 충분히 재미있었다는 느낌을 받는 책입니다. 사립탐정이 등장하는 모험을 한 편 즐기고 싶다면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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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겐지 이야기
아기 다다시 지음 / 서울문화사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도쿄 겐지 이야기


  - 짧고 씁쓸한 이야기


  아기 타다시는 만화의 원작자로 유명하다. 그가 스토리를 쓴 만화로는 『신의 물방울』, 『소년탐정 김전일』, 『탐정학원Q』, 『겟백커스』 등 다수의 인기 만화들이 있다. 이 작가가 쓴 모든 만화를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 중 몇 개는 꽤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서울문화에서 출간한 아기 타다시가 쓴 『도쿄 겐지 이야기』는 유명 만화 원작자의 작품이라고 하여 특별한 기대를 하지는 않고 봤다. 아무리 만화 원작자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소설가로서의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신인 작가의 작품을 본다는 기분으로 읽었고, 그렇게 기대치를 낮춘 것이 도움이 된 듯하다. 일단 작품 색깔부터 그의 유명한 작품인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와는 다르다. 본격적인 사건과 추리가 있는 미스터리 만화의 원작자가 쓴 소설이나, 이 작품은 미스터리보다는 독특한 감성이 주가 되는 작품이다. 치밀한 두뇌싸움을 기대하고 읽어서는 안 된다. 이 작품에 미스터리라고 할 것은 그리 없으며 추리할 요소도 적다. 그저 주위에 항상 죽음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한 소녀의 감성을 따라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작품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쓰여 있어서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고 큼직한 사건들이 다를 뿐, 시간대가 긴밀하게 연속되어 있어서 하나의 책을 읽는 듯한 인상이 있고, 소녀가 품고 있는 비밀이 마지막에 밝혀진다는 점에서 완결성을 띠고 있다.

  출판사의 홍보자료를 보면, 독특한 문장과 실험적인 형식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독특한 문장들이 눈에 띄는 작품은 아니다. 읽으면서 문장이 눈에 띄긴 하는데 그 이유는 밀도가 높지 않고 문장들이 하나의 문단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보통 일본 라이트노벨 쪽에서 잘 읽히는 가벼운 문체를 추구하는 터라 자주 보이는 문체인데 확실히 잘 읽히고 독특한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사실 이 소설은 전체적인 분량이나 문체, 미스터리가 약하다는 점에서 라이트노벨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표지가 『다중인격탐정 사이코』로 잘 알려진 만화가 타지마 쇼우이기도 하고.) 주인공인 히카루의 감성도 그런 문체가 반 이상은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히카루를 빼고는 눈에 띄는 캐릭터는 많지 않다. 토우야는 거의 모든 것을 아는 듯이 행동하고 있지만 그 속내를 많이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등장도 짧은 편이다. 결국 캐릭터의 매력은 ‘겐지’ 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히카루라는 소녀에게 있으며,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는 것도 전적으로 히카루에게 달려 있다.

  히카루는 어릴 적에 부모가 강도로 죽고, 친한 친구도 죽으면서 자기 주변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저주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친한 친구였던 유나가 히카루라는 이름 때문에 ‘겐지’라는 별명을 붙인 후부터 죽음의 저주가 생긴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한 편 이 소설의 첫 사건은 잘못 보내진 문자로 인해 친구가 된 아게하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히카루는 싱크로나이시티(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우연의 일치, 어떤 억압을 받았을 때 합리적이지 못하고 우연한 것에 끌리는 무의식적인 현상)를 경험한다. 이후, 다른 사건들에서도 히카루는 싱크로나이시티를 느끼며 죽음이 일어나는 것을 예지한다.

  현실적인 추리가 아니라 싱크로나이시티라는 것이 주가 된다는 것과 짧은 에피소드 형식이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이 쉽게 밝혀지긴 하지만 이 소설의 미스터리도 나름대로 읽는 재미를 전해준다. 개인적으로 「ACT4. 냉혈의 론도」 편은 가장 인상적이고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기도 했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한 것은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 연관된다는 점에서 츠츠이 야스타카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수록된 「악몽」 같은 단편이 떠오르기도 한다. 분량이 많지 않고 문장도 평이해서 빨리 읽을 수 있는 소설이며, 미스터리가 적당히 들어가면서도 매 사건마다 여러 죽음이 나오는 씁쓸한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어둡고 한없이 차분한 느낌이다. 충격적인 전개도 감정의 분출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어두운 과거와 죽음이 교차하고, 또 살아가는 ‘겐지’라는 별명을 가진 한 소녀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이 어둠 속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어떤 죽음들과 결말이 있는지 궁금하다면 한 번쯤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무언가가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아게하의 주소를 휴대전화에서 지우고, 메일 착신도 '거부'로 해두었다.

  108명을 등록해둔 주소록은 한 명이 지워져서 107명이 되었다.

  동시에 내 마음속에서, 작은 벌레 같은 것이 기어 나와 소리 없이 날아서 사라져버렸다.


  - 『도쿄 겐지 이야기』, 아기 타다시, 서울문화사,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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