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평전
벤저민 양 지음, 권기대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덩샤오핑이라고라고라... 덩샤오핑의 평전이라고라고라...

덩샤오핑. 너무 거대한 이름이라서, 책을 손에 쥐기까지 우습게도 나는 조금 쉽지 않은 여러가지 생각의 단계들을 거쳐야 했다. 마오쩌둥과 함께 현대중국을 만든 지도자, 13억 중국의 현재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개혁개방의 설계사',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장강을 헤엄쳐 건너 세계를 놀라게했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에 접근하는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고, 어떤 책을 읽어야 과연 이 사람의 진솔한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고민이 됐다. 또한 어떤 책을 읽은들 이 사람의 진면목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섣부른 회의도 있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는 마오쩌둥이지만 가장 고마워하는 지도자는 덩샤오핑이다." 이 책의 광고문구를 보는 순간 '고마워하는'이라는 말에 '좋아하는'이라는 느낌이 겹쳐졌다. 중국사람들은 덩샤오핑을 좋아하나보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결국은 책을 손에 잡게 됐다.

처음에 나는 이 책의 저자인 벤저민 양이라는 사람을 색안경 끼고 바라봤던 것 같다. 어떤 인물인지 사전 지식은 전혀 없었고, 책을 다 읽고난 지금도 저자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쓰여진 간단한 약력- 중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 유학했다가 눌러앉은 사람이라는 것, 그것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책의 전반부를 넘기는 동안 저자가 덩샤오핑을 폄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두질 못했다. 책은 덩샤오핑의 키가 작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풍채 좋은 마오쩌둥과 달리 작은 키에 귀염성있는 얼굴이었던 덩샤오핑, '작고 평범한 덩씨'를 강조하면서 저자는 이 '작은 덩씨'가 어떻게 거인이 됐는지를 추적한다. 책은 '평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고, 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덩샤오핑과 관련된 일들을 시시콜콜 오만가지 주워섬기면서 이 사람의 성격과 취향을 묘사해보는 것. 그 점이 이 책의 탁월한 점이고, 또한 단점이기도 하다.

덩샤오핑의 정치인생의 전반부(무려 일흔이 넘도록 덩샤오핑은 인생의 '전반부'를 보냈지만)는 수동태로 진행된다. 저자는 덩씨 아저씨에게 별다른 재능이나 특출난 사상이 없었다면서, 재능이 있었다면 '정치적인 재주' 즉 '마오쩌둥의 눈치를 살피는 재주' 뿐이었다고 말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은 마오의 제국이었고 마오는 제왕이었기에, 덩의 저런 재주는 덩의 운명을 결정한 핵심적인 요인이었다고. 곡절을 겪긴 했지만 덩은 어쨌든 마오에게 끝까지 버림받지는 않았었다. 죽어가는 마오가 덩을 후계자로 지목하진 않았지만 중국인들은 마오 사후의 혼란을 잠재울 지도자로 결국 덩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이로 따지면 늙을대로 늙은 덩은 혼돈 속의 공화국을 이어받아 경제대국의 초석을 닦는다--는 것이 책의 줄거리다.

마오와의 관계를 덩의 인생의 핵심으로 놓았기 때문에 덩의 인생의 '전반부'는 그닥 재미가 없다.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전반부의 덩은 그저 눈치 잘 보고 대인관계 감각이 있는 인물에 지나지 않아보인다. 책이 재미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덩의 행위가 '능동태'로 해석되기 시작하는 후반부부터였다. 시기적으로 따지자면 대약진운동이 비극으로 귀결되고 덩이 마오의 카리스마에 의심을 품기 시작하는 때부터라고 볼 수 있겠다. 덩은 마오의 제왕적 카리스마의 위력을 잘 알았고 거기 거스르지 않게 노력하긴 했지만 이 때부터 마오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심과 애정은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더불어 덩을 평가절하하는 듯했던 저자의 시선에서도 존경심이 묻어나오기 시작한다.

책의 묘미라면 묘미랄까, 저자는 앞서 덩을 폄하했던 부분들, 바로 그것들이 위대한 지도자 덩을 만든 힘이었다는 역설을 강조한다. "덩은 수많은 부대와 함께 전투를 치렀지만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군사 문제를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소련측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두고 유창하게 논쟁을 했지만 사실 잘 아는 편은 아니었다. 근대 경제나 경제학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적었지만 1980년대를 통틀어 경제 재건에 폭넓게 관여했다. 또한 국제 문제에도 전혀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그는 국제연합과 여러 외빈들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연설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덩은 모든 일을 조금씩 할 줄 알았지만 어느 분야에도 전문가가 아니었다. 정치만 제외하고 말이다. 덩은 자신이 다른 무엇이 아닌 정치인임을 보여주었고, 그가 정통했던 것은 바로 인간관계와 조직력이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좋은 일이건 아니건 덩은 처음부터 공산주의 교리 원칙에 노예처럼 헌신하지 않았으므로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떨쳐 버리기가 더욱 수월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반교조적인' 생애를 살았던 덩샤오핑의 철학, 즉 '실용주의'는 철학이라 이름붙이기 뭣할 정도로 '내용이 없다'. 말 그대로 실용주의이기 때문에 어떤 도그마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그러나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덩샤오핑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책에는 덩의 면모를 보여주는 여러가지 일화들이 나와 있어서, 적어도 덩샤오핑이라는 지도자에게 접근하는 한가지 길은 되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들. 중국은 대체 어떤 나라인가. 중국은 대체 어떤 나라를 향해 가는가. 일단 현재의 모습은 경제대국/미국의 카운터파트로 가는 것같긴 하다. 책은 97년 덩 사망 직후에 출간된 것 같은데, 덩이 만들어놓은 기본 틀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데에 방점을 찍고 있고, 적어도 덩 사망 이후 7년이 지난 지금 저자의 예상은 들어맞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덩이 고심 끝에 후계자로 낙점했던 장쩌민, 상하이 출신의 벼락출세 정치인이란 소리를 들었던 그 사람은 그닥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채 결국 물러나버렸다. 장쩌민의 은퇴와 뒤를 이은 후진타오 세력의 집권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는 또다른 문제이겠지만, 장쩌민이 사실상 '실각'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최근 많이 나온 모양이다. 그렇다면 덩의 '후계자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개혁개방은 중국에서 대세가 된 듯하고, 실용주의 또한 시대의 흐름으로 인정받는 모양이다.

세계 곳곳에는 '마오주의 게릴라'들이 적잖게 존재하고 있지만 '덩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저기, 13억 인민들이 마오주의 대신 덩주의를 추종하고 있다지 않은가. 그러니 덩은 과연 '거인'의 대열에 오를법한 인물이다. 천안문 사태로 숱한 비난을 받긴 했지만 '귀엽게 생긴 덩씨 아저씨'의 약발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책은 덩의 인간적 면모, 성격, 행동 양태 따위를 들어 덩의 정치행보를 서술하는데 촛점을 맞춘 것이어서 개혁개방을 향한 덩의 정치적 선택과정에 대해서는 의외로 소홀하다. 독자로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덩이 비록 '정치적 인간'이긴 했지만 정치적 야심이 인민을 위한다는 마음까지 잡아먹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 저자의 말대로 덩은 '정말로 원시안적이고 복잡한 마음을 소유한 정치인'이었던 탓에 여전히 내게는 '미지의 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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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11-1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를 좋아하게 만드는 건 그 사람의 장점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건 그 사람의 단점이라고 누군가는 말하더군요. 마오는 혁명가였고, 덩은 정치가였다고 규정하는 건 어쩌면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와 흡사할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중국이 어디로 갈지에 대해 미리 예측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장담할 수 있으리라 짐작되는 건 최소한 앞으로 10년 이상 중국은 친미국가일 거라는 겁니다. 그런 뒤에 일어날 일들은 중국 외부보다는 중국 내부의 문제가 되겠지요만... 어찌 되었든 이 책은 저도 사놓고 천천히 읽고 있는 중인데, 서평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다는 인사와 추천 하나 남기고 갑니다. 2월에 귀국한다고?

딸기 2004-11-12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를 좋아하게 만드는 건 그 사람의 장점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건 그 사람의 단점이라고요. 일리가 있는 말이군요. 좋아했다가 안 좋아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사랑했으면 미워하게 될 수 있으니까.

중국의 '친미성향' 말인데요, 이라크전 일어나기까지 밀고 당기는 외교전 보면서 정말이지 중국이란 나라-- 황당할만치 대단하고, 기묘하고, 으뭉스런 나라여서 말이죠. ^^

2월에 귀국해요. 출근은 3월부터이지만 그 전에 이것저것 준비도 해야 하고 해서요. 흑흑 이제 벌써 다 끝나가네요. 아쉬워라...

미완성 2004-11-14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사뭇 진지하면서도 발랄해서 너무너무 재밌게 읽은 리뷰였습니다.

새글이 떠서 놀러와보았더니 세상에나, 그 사이에 올리신 리뷰가 한둘이 아니군요. 새삼 놀라고 갑니다.

딸기 2004-11-14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초능력을 좀 하거든요.

...가 아니고, 예전 마이리뷰를 복구요청 했는데 복구가 잘 안 되어서 좀 날려먹고, 결국 삭제하고 다시 올리는 짓을 하고 있답니다. ^^ 하지만 이 리뷰는 중고 아니예요... 신품이예요. ^^

미완성 2004-11-14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님의 초능력;;으로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지고 있는 걸요...! 대단합니다 -_-b

이제까지 읽은 님의 리뷰는 다 재밌었지만 거기다 요놈;;은 신삥이라 하시니 더더욱 좋네요. 이렇게 재밌는 님의 리뷰를 복구해주지 않다니! 알라딘 미워요!

딸기 2004-11-14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리뷰로 사과님의 멍이 가라앉을수만 있다면... ^^

알라딘에선 다 복구를 해줬는데요, 카테고리 이동이 안 되는 거예요

이동시켰다고 나오는데, 정작 옮긴 카테고리에선 사라져버렸지 뭐예요...
 

슬라보예 지젝이 부시 개쉐이의 재선에 대해 논평한 글. 기특한 친구가 물어왔다. 어느 게시판엔가 '도끼'라는 분이 번역해놓으셨는데, 지젝의 어법이 마음에 들어서 허락도 없이 퍼왔다. 들키면 어떡하지... (굵은 글씨는 내가 강조한 거다)


자유주의의 워털루(또는 결국 워싱턴에서 날라 온 약간 좋은 소식)

부시의 재선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첫 반응은 절망, 심지어 공포였다. 지난 4년 간은 단지 악몽에 지나지 않았다. 부시가 새로이 입맛을 다시며 대법원에 보수적인 판사를 임명하고 이라크 다음으로 다른 나라를 침공하며 미국에서 한 발짝 더 자유주의를 사멸로 내몰면서 자신의 의제를 추구함에 따라 대기업과 근본주의 포퓰리즘의 악몽같은 연합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적인 대응은 정확히 우리가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가?, 이다. 이건 자유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자신들의 세계관을 강제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정도를 증명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차가운 머리를 유지하며 냉정하게 결과를 분석한다면 2004년 대선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드러낸다.

많은 유럽인들은 지식인들과 대중문화 엘리트들이 반대했음에도 어떻게 부시가 승리할 수 있었는지 놀라워한다. 결국 유럽인들은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의 동원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에 직면해야만 했다. 그 자명한 우둔함 때문에 이 사실은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역설적이고 정확히 말해 포스트모던 현상이다.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보면, 다가오는 세계종말에 관한 Tim F. Lahaye와 Jerry B. Jenkins의 12권짜리 “두고 간 것 Left Behind” 시리즈는 6천만권 이상이 팔렸다. “두고 간 것” 시리즈는 갑작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아마게돈의 공포를 겪지 않도록 신이 호명해 구원받은 영혼-의 실종으로 시작한다. 그 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젊고 능숙하며 카리스마를 가진 니콜라 카르파티아 Nicolae Carpathia 라는 이름의 루마니아 정치인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뒤 유엔 본부를 바빌론으로 옮긴다. 바빌론에서 카르파티아는 모든 국민국가를 무장해제하고 미국에 반대하는 세계정부를 세운다. 이 터무니없는 음모는 모든 비(非)기독교인들 ­유대인, 이슬람교도 등­이 격동의 불바다에서 다 타버리는 마지막 전쟁까지 계속된다. 만일 이슬람 입장에서 씌어진 비슷한 이야기가 아랍 국가들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면 서구 자유주의 매체가 무엇을 부르짖었을지 상상해 보라. 정말 놀라운 건 이런 소설들의 불충분함과 원시성이 아니라 “심각한” 종교적 메시지와 대중문화 상업주의의 쓰레기같은 관행이 묘하게 겹쳐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반성할 건 VKP(b)­-스탈린주의 성경­-의 역사에서 드러났듯이 민주주의의 기본역설에 관한 것이다. 스탈린(책을 대필한 사람)은 20대 말에 정당대회에서의 투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큰 표차를 보이자 대의원들은 중앙위원회가 제안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만약 투표가 만장일치라면 소수파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약간 비뚤어진 “전체주의적” 왜곡을 했다기보다 이 역설은 민주주의의 구조 그 자체를 구성한다. 민주주의는 다수majority와 “전체all” 사이의 단락 short-circuit에 기반하고 있다. 그 속에서 승자는 전체를 취하고 다수는 전체로 계산되어 모든 권력을 손에 넣는다. 심지어 이 다수가 수백만 표 중에서 단지 2, 3백 표에 불과하다해도 말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과반수의 의지와 이해가(이 두 가지는 자동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국가적인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법률주의 이상인가? 사회의 적대를 담보하는 형식적인 규칙체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착은 정치영역으로 완전히 흡수된다. “민주주의”는 선거 조작이 어떻게 이루어지든 모든 정치인들이 무조건 결과를 존중하는 걸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는 정말 “민주적”이었다. 즉 분명한 선거조작과 플로리다의 수백 표가 미국 전체의 대통령이 될 사람을 결정했다는 사실의 명백한 무의미성에도 민주당 후보자는 패배를 받아들였다. 선거 뒤 불안정한 몇 주 동안 빌 클린턴은 적절하고 신랄한 언급을 했다. “미국인들은 말해 왔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말했는지 모른다.” 이 언급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이 무엇을 말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결과 이후에는 “메시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일 거다.

이건 진정한 사회주의라는 비전을 고수함으로써 가련한 “현존 사회주의”에 반대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의 따분한 시도를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시도에 관해 권위 있는 헤겔주의적 답변은 충분한 대답이 된다. 즉 그 개념을 살아있게 하는데 실패한 현실은 개념 자체에 고유한 취약성을 증명한다. 민주주의에 똑같이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너무 간단해서 더 진정한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현존하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민주주의에 반대하지 못하는 걸까?

이 점은 부시의 승리가 우연한 착오, 또는 사기나 조작의 결과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헤겔은 적절한 시기에 나폴레옹이 두 번 패배해야 한다고 편지를 썼다. 워털루 이후에야 자신의 패배가 군사적인 사안이 아니라 더 심오한 역사적인 변화의 표현이라는 점은 나폴레옹에게 분명해졌다. 부시도 마찬가지다. 부시는 우리 모두가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고 있음을 자유주의자들이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두 번 이겨야 했다.

200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이 파괴되었다. 12년 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1월 9일 “행복한 ‘90년대’”를 선언했던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꿈꿨고 자유민주주의가 원칙적으로 승리했다고 믿었으며 이 초헐리우드적인 행복한 결말을 막을 유일한 방해물은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지도자들이 있는 작은 저항지대일 뿐이라고 믿었다. 반대로 9/11은 클린턴적인 행복한 90년대의 종언을 상징하며 이스라엘과 요단강 서안지구 사이에, 유럽연합 주변에, 미국과 멕시코 국경 사이에 새로운 장벽이 들어서는 시대를 알렸다.

최근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윌리엄 크리스톨과 로렌스 캐플란은 “이 사명은 바그다드에서 시작하지만 그곳에서 끝나지 않는다.…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시대의 첨단에 서 있다.…이것은 결정적인 순간이다.…이것이 이라크 이상을 의미한다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심지어 이것은 중동의 미래와 테러와의 전쟁 이상을 의미한다. 이것은 미국이 21세기에 어떤 종류의 역할을 수행하려 하는가와 관련된다.” 그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위태로운 국제공동체의 실제적인 미래-그것을 조절할 새로운 규칙, 새로운 세계질서가 나아갈 바-이다.

따라서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새로운 비전은 최근 미국정치의 효과적인 틀로 나타나고 있다. 9월 11일 이후 미국은 나머지 세계를 기본적으로 믿음직한 파트너라고 여기지 않는다. 궁극적인 목적은 더 이상 보편적인 자유민주주의를 확대하는 후쿠야마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미국을 나머지 세계와 분리된 고독한 초강대국, 자신의 중요한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새로운 군사력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는 “요새 아메리카”로 바꾸는 것이다.
이 새로운 군사력은 세계 어느 곳에서 신속하게 배치하는 군대만이 아니라 펜타곤이 우주에서 지구상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우주무기의 개발을 포함한다. 이 전략은 미국과 유럽의 최근 갈등에 새로운 빛을 던진다. 미국을 “배신하고 있는” 건 유럽이 아니다. 미국은 더 이상 유럽과의 전폭적인 동반자관계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부시의 미국은 새로운 지구제국이 되려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오히려 부시의 미국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무정한 국민국가를 계속 유지한다. 이제 미국 정치는 잘 알려진 생태주의자의 구호를 이상하게 뒤바꾼 구호로 이끌리고 있는 듯하다. 즉 지구적으로 행동하고 지역적으로 사고하라.

이런 좌표 내에서 생각이 있는 진보주의자라면 모두 부시의 승리를 반겨야 한다. 다가올 적대의 윤곽이 이제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그려질 것이기 때문에 부시의 승리는 전 세계에 좋은 것이다. 케리의 승리는 진정한 분할선을 흐리는 일종의 역사적인 변칙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케리는 부시의 정치에 대해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세계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구나 부시의 승리는 역설적이게도 유럽인과 라틴 아메리카 경제 모두에게 더 좋다. 노동조합의 지지를 얻기 위해 케리는 보호주의적 장치들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득은 국제정치를 포함한다. 케리가 승리했다면 그건 자유주의자들이 이라크 전쟁의 결과에 직면하도록 강요하고 부시 캠프가 자신들의 내린 비극적인 결정의 결과를 가지고 민주당을 비난하도록 했을 것이다. 진 커크패트릭은 1979년에 나온 자신의 유명한 논평집 <독재자와 이중적인 기준>에서 적극적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전복시키는 한편 우파 독재자들과 협력하는 미국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권위주의” 정권과 “전체주의” 정권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권위주의 독재자는 권력과 부에 관심을 가지며 심지어 몇 가지 큰 대의에 관해 입에 발린 말을 할 때조차 이데올로기적인 이슈들에 무관심한 실용적인 지배자이다. 반대로 전체주의 지배자는 사심없고 자신들의 이상을 위해 모든 걸 거는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광신도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지도자가 실질적이고 군사적인 위협에 합리적이고 예측하며 반응하는 것으로 다뤄진다면, 전체주의 지도자는 그 위협을 더 위험하게 하고 직접 맞서야만 한다.
아이러니는 이 구분이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일치하지 않는 점을 완벽하게 요약한다는 점이다. 사담은 권력을 추구하는 부패한 권위주의 독재자였고 잔인한 실용적 고려(80년대 동안 미국과의 협력으로 이끌었던)에 따랐다. 그러나 사담을 제거하는 미국의 간섭은 어떠한 실용적인 타협도 배제하는 “근본주의적” 적대를 창출하는 것으로 이끌었다.

부시의 승리는 선진 서구국가들 사이의 이익의 일치에 대한 환상을 제거할 것이다. 이 승리는 유럽연합이나 라틴 아메리카에서 Mercosur같은 새로운 동맹을 강화하는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과정을 이끌 새로운 동력을 제공할 것이다. 균형잡힌 복지국가라는 환상에 집착하는 “낡은 유럽”에 맞서는 미국 자본주의의 “포스트모던” 동학을 칭송하는 건 언론의 진부한 표현일 뿐이다. 하지만 정치조직의 영역에서 지금 유럽은 지리나 문화와 관계없이 어떤 이에게 한 장소를 제공할 수 있는, 유례없이-아마도 “포스트모던한”- 국경을 초월한 집단으로 스스로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보다 훨씬 더 많이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절망할 이유가 없다. 오늘날의 전망이 어두울지 모르나 위대한 부시주의의 어록 중 하나를 기억하라. “미래는 더 나은 미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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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1-10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딸기'로 돌아오셨네요.

balmas 2004-11-10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정말 '딸기'로 되돌아오셨네요. 왜 그걸 몰랐지???

지젝의 순발력은 역시 알아줄 만하군요. 지젝의 순진한 낙관주의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든 읽을 만한 글이군요.

지젝을 좋아하는 분과 약간 설전을 했는데, 쑥스럽게 바로 지젝의 글을 퍼가야겠군요.
저도 들키면 어쩌죠?? ㅋㅋ

로쟈 2004-11-1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키켰군요. '일관된' 입장을 지키시킬 바랍니다^^...

딸기 2004-11-10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발마스님과 로쟈님, 좀더 치열하게 싸우십시오! ㅋㅋ

우루불루(라고 불러야 하나요)님, 다시 딸기로 돌아와버렸어요. ^^

딸기 2004-11-10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지젝을 좋아하는 분, 그리고 그분과 설전을 벌이신 분께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저는 지젝의 저 글이 맘에 들었습니다. 깊은 사고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한 '약간의 통찰력'(왜냐면 저 글은 맛뵈기 글이니깐), 쌔끈한 비꼬기... 그런데 어떻게 봐야 하나요. 지젝의 저 글, '순진한 낙관주의'입니까, 아니면 '유쾌한 반어법' 입니까?

urblue 2004-11-10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가 더 좋습니다. ^^

전 you are blue 랍니다.

딸기 2004-11-11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유아블루님이셨군요. ^^

저는 '딸기'가 된지 하도 오래돼서, 이젠 진짜 제가 과일인 것만 같아요. 저의 실명이 더 어색할 지경이라니깐요. ^^

비로그인 2004-11-1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문은 ' http://www.inthesetimes.com/site/main/article/1662/ '

에 있습니다. 몇군데 사소한 오역이 있네요. 말이 안되는 것 처럼 보이는 건 대부분 오역이라고 볼 때 다섯번째 줄, "하지만 이런 감정적인 대응은 정확히 우리가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가?,' 이건 " 하지만 이런 감정적인 대응은 정확히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로 봐야 할 것 같고... 이런 식의 오역이 많아요..뭐, 대충 날림으로 번역하신 듯.^^요점은 전달 됐으니까, 뭐라 말하면 실례겠죠?

가을산 2004-11-1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이래서 여기가 좋아요.... ^^

딸기 2004-11-11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거 퍼오면서 보니깐, 번역하신 분도 '급해서 대충 옮겼다'고 쓰셨더라고요. 원문까지 가져오셨네요. 고자님(이름 참 특이하시군요 ^^) 반갑고 고맙습니다. 가을산님도 반가워요 *^^*
 
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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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마구마구 흔들려버릴 때가 있다. 책 속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 혹은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머리 속에 뒤죽박죽 되면서 이것이 소설속의 이야기인지 혹은 나의 이야기인지, 현재의 이야기인지 과거의 이야기인지 경계선이 모호해져버리는 듯한 느낌.

이것은 '공감'과는 좀 다른 경험인데, 소설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게 되는 것에서 그치지를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과 나를 동일시하는 단계를 넘어서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그런 상태. 기분이 좋다 나쁘다 어느 쪽인지조차 알수 없게 되어버리는 상태, 이성도 감성도 엉망으로 엉켜버리는 그런 상태.


그래, 이건 블랙홀이다. '나의 미카엘'. 이 제목은 아주 단순하게 들리는가 하면 또 몹시 심오하고 어지럽게 들리기도 한다. 이 제목은 몹시도 흡인력이 있었고, 나는 블랙홀에 빠지듯 이 소설에 빠져서 한동안 어둠 속을 방황했다. 물론 나의 방황은 어디까지나 '마음 속의' 것이었기에 일상은 일상대로 진행되어 나갔고 둘 사이의 괴리감은 나의 일상에 아무런 장애를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해서 생각할라치면 나는 항상 어떤 부유감, 암흑속을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을 떠올리게 된다.

나의 미카엘. 타인의 존재를 송두리째 가져버리고자 하는 욕망, 그 사람의 존재는 물론이고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까지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 피터 폴 & 메리의 노래 중에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이라는 곡이 있다. 우리나라에선 김광석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라는 노래로 번안해 불렀었다. 김광석의 곡은 세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경쾌한 곡조로 표현한 것이었지만 원곡은 슬픈 노래다. 저 노래의 한 구절. 'I gave her my heart but she wanted my soul'. 신파조로 표현하면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이 되겠다. 바로 저 상태, 마음을 주었는데 영혼까지 달라 하는, 그런 것이 소설의 주인공 한나의 상태다.


아모스 오즈,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작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피스 나우(Peace Now)'를 만든 사람, 팔레스타인 탄압을 중단하라는 모든 종류의 서명에 꼬박꼬박 이름을 올리는 지식인.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오즈의 그런 명성은 잠시 잊어야 한다. 책의 배경은 예루살렘이지만 사실 지리적 배경은 어느 곳이어도 상관 없다. 게다가 책의 줄거리를 요약할 수도 없다. 오즈의 탁월한 감각이 돋보이는 이 미묘한 소설은 '스토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책이기 때문이다.

건국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이스라엘, 한나는 미카엘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살아간다'. 미카엘은 공부를 하고 한나는 살림을 한다. 한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고, 공허감에 방황하고, 미카엘을 달달 볶는다. 이것이 이 책의 '요약된 줄거리'의 전부일 것이다. 극적인 요소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두 사람의 사랑은 항상 드라마틱한 요소를 안고 있다. 한나의 격정, 한나의 사랑, 미카엘의 평온함, 미카엘의 사랑. 어쩌면 두 사람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결합된 두 사람의 인생을 힘겹게 '살아낸다'.


나의 마음과 머리는 방황했고, 나의 일상은 일상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누가 자기의 마음 속에 한나와 미카엘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책은 한나와 미카엘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이고, 어떤 종류이든 격정을 거부한채(혹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자기최면을 걸어버린채로) 살아가는 나, 일상을 어떻게든 붙들어매어보려는 나, 하지만 마음 한귀퉁이의 공허한 공간을 발견할 때 사정없이 흔들려버리는 나를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한나와 미카엘이 '현대인의 갈등과 공허감을 상징한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중세인에게, 혹은 고대인에게 저런 공허감이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오만일 터이니까. 오즈의 이 책은 칼날처럼 마음을 후벼팠고, 나는 책장을 덮으면서 생채기난 마음도 함께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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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1-10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4년 전에 읽었는데,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그때 내가 다 읽고 관심이 갔던 부분은, 남자가 매사에 양보하고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여자는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는 것 같은데 결국 남자는 모든 것을 가지고, 여자는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다는 거예요. 그때 '왜 그런가'고 잠시 생각했던 기억이...

딸기 2004-11-10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저의 케이스하고 같은 거예요. 결국은 현실(일상)이 이겨버리고, 격정은 그냥 몽상으로 남는 거지요. 물론 그 '몽상'에서 우리는 한순간도 완전히 떠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실은 자명한산책님께서 말씀하신 부분, 바로 저도 고개를 갸우뚱했던 부분이었답니다. 아니 이 남자는 왜 일케 착하지.. 이거 순둥이 아냐.. 그리고 저도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기까지의 간결하고 핵심적인 묘사, 그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딸기 2004-11-10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시게 되면, 꼭 리뷰 올려주셔야 해요. :)

urblue 2004-11-1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추가합니다. 조만간 읽어야겠네요.

로즈마리 2004-11-24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관함에 추가...^^;; 서평에 마구마구 흔들리네요
 

알라딘 블로그들을 돌아다닐 때마다 나름대로 자극을 받는다.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 나도 저들처럼 똑똑해져야겠다... 지식만 쌓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많이 해야겠다...라는, 긍정적이기 짝이 없는 결심을 한다. 그런데 그 결심은 정말 딱 사흘이다(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 타인을 통한 자극은 나의 독서행각에 거의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젠 알고도 남겠다. 어쩌냐고.. 어찌하여 나의 결심은 이 모양 이꼴일까. 결심아 결심아 너는 어째 이리 무딘 것이냐. 그러니 다독하지 못하는 첫번째 핑계, 그것은 바로 결심. 내 탓이 아니라 무디고 허약하기 짝이 없는 너, 결심! 바로 너 때문이다.

결심 탓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나는 오늘 아침 또다른 핑계거리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 무슨 가당찮은 핑계인고 하면, 읽을 책이 없다는 것이다. 참내.. 웃기지?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속으로 지금 비웃고 있지요? 대체 이 지구상에서 '책'이 된다는 발싸개같은 명분으로 희생당한 나무가 얼마일진대 감히 '읽을 책이 없다'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허나 어쩌랴, '믿기지 않겠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나의 형편이 형편이다보니 집에 있는 책들은 극히 한정돼있다. (그럼 책이 많이 있을 때엔 많이 읽었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또 핑계사냥에 나서야 하므로 생략) 사실 지난 몇달간 사들이기도 꽤 사들였다. 문제는 나의 재정상태. 현재 돈 한푼 안 벌고 있는 주제에 나무의 희생양들을 자꾸만 먹어치우기엔... 구리의 희생양들이 상당히 모자란다.

여기서 나는 세번째로 포착된 핑계로 도약할 기회를 얻었다. 우째 책값이 이리도 비싸단 말이냐. 이번 핑계는 그리하야 책값이다. 오늘도 나는 (집에 남은 몇 안되는 읽을거리 중에서) 18000원짜리 책을 펼쳐들었다. 무려 하드커버... 하드커버 책을 더이상 만들지 말란 말이다! 하드커버 금지법안 입법청구라도 해야할까보다.

핑계의 세계는 넓고도 넓지만...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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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11-1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하하... 하드커버 금지법안 입법청구에 적극 찬성이요~!



(참고 마이리스트: 매너의 '책 좀 쪼개지 말란 말이야!!' -_-v)

딸기 2004-11-1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하하

매너리스트님, 그것 또한 타당한 이야기로군요. 의도가 빤히 보이는 분책에 대해서도 법적 제재 방안을 강구해봐야겠습니다!

딸기 2004-11-1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님 방에 가서 만들어놓으신 리스트 보고 왔어요. 추천도 꾹~ 하고 왔어요 ^^

'반지제왕'의 경우는 저도 불만이 많아요. 저는 김번 등등 번역한, 3권짜리 맨 처음 판본을 갖고 있었는데(안 읽었지만) 그 책은 좀 빡빡했지요. 톨킨이 애당초 3권으로 냈다면 그걸 살려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책 자체가 '3부'로 되어있는 것은 아니고 5부인가 6부로 돼 있으니깐 그걸 기준으로 나눠줄 수도 있지요. 저는 오로지 잘난척 하기 위해서 원서로 읽었는데, 김번 등등의 번역본은 오직 '분책'을 위해 다시 나온 모양이지요. 한때 3권으로 냈던 것을 정확히 절반씩 쪼갰는지 6권짜리로 나왔단 얘기를 들었습니다.

책 종이가 엄청 좋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나만 그런가? -_-a 저는 워낙 책을 지저분하게 보기 때문에 책장이 구겨지는 것은 다반사이고 낙서라든가 비맞히기 따위도 많이 하는 짓거리인지라 책 종이가 그렇게 좋을 필요를 못 느끼겠더라고요.

책을 고급스럽게 만들어서 좋은 게 있다면... 책표지 안쪽에 빨간색 녹색 등등 두꺼운 색지로 속표지가 있으면 그걸 잘라서 카드 같은 거 만들 때 참 좋아요. 그거 외에는 고급스런 책의 효용성을 아직 못 찾고 있습니다. 책은 '보관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런... 수다가 길어졌네요. :)

로쟈 2004-11-12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값에서만큼은 한국도 선진국에 육박하고 있는 듯합니다(질은 아직 후진 경우가 많지만). 저도 모스크바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데, 가장 아쉬운 건 책일 거 같습니다. 여긴 하드 카바에 정말 6-700쪽이 넘는 좋은 책도 대개 2만원이 안됩니다(화집이 아니라면). 어학을 전공하는 가까운 친구한테, 연구서 10권(절반 이상이 하드카바이고 아주 두툼합니다)을 사서 보냈는데, 우편비까지해서 10만원쯤 들었습니다. 이것도 여기 책값이 몇년간 폭등한 결과입니다. 러시아어가 모(국)어가 아닌 게 좀 유감스럽지요...

딸기 2004-11-12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우편비 포함해서 10만원이라고요...

저는 며칠전에 알라딘에 책 좀 주문했는데... 배송료 6만원 포함해서,

30만원이 넘었어요!

비로그인 2004-11-12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읔, 어케하면 배송료가 6만원이 나오나요? 저는 사실 알라딘에서 책을 사본 적이 한번도 없걸랑요. ^^;

딸기 2004-11-12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일본에 있거든요. 항공우편료가 비싼가봐요
 

발마스님께서 교수신문에 실린 전문번역가에 대한 기사를 퍼놓으신걸 보고 리플 달다가, 아예 페이퍼로 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아(다른 분들한테 정보가 될 수도 있으니) 정리해 다시 올린다.

나는 번역자를 유심히 보는 편이다. 특별히 번역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책 보면서 영어식 일어식 문장을 만나면 한번씩 씨발거리지 않고서는 넘어가질 못하는 못된 버릇 탓이다. 어색하기 짝이없는, 문장도 아닌 문장들이 넘쳐난다는 느낌. 책들도 그렇고, 신문 기사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신문 보면서 기사에 쓰인 희한한 문장들을 나혼자 머리속으로 '우리말'로 번역해보곤 하는데, 그정도로 '말글오염'이 심각하다고나 할까. 번역돼나온 책들을 보면서 문제가 많다고 느낄 때도 한두번이 아니다. 번역된 책들의 문제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몇가지로 정리해보면

첫째, 특정한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잘못쓰거나 문장을 아예 잘못 번역하는 경우. 이건 진짜 심각한 문제다. 책의 내용 자체가 다르게 전달되어 버리니깐 말이다.

이런 대표적인 사례를 꼽자면, 내가 지금까지 봤던 책들 중에서 '최악의 번역' 혹은 '추악한 번역'으로 지목할 수 있는 책인 '추악한 전쟁'(존 쿨리). 성전(holy war)를 비꼬기 위해 'unholy war'라고 제목을 붙인 것을, 웃기는 번역자(라기보다는 독서방해자)가 '추악한 전쟁'이라고 해놨다. '추악한 전쟁'이라고 하면, 명백히 다른 개념인 '더러운 전쟁' 즉 dirty war를 연상케하는데, 번역자가 과연 그런 정도의 상식이라도 갖고 있었는지는 회의적이다. 이 책 읽다가 너무 열받아서 무려 출판사에 항의전화를 하기까지 했다. 내가 책 읽다가 출판사에 전화한 유일한 케이스였다... 

이 책 못잖게 황당했던 것은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 이거 번역하신 분은 실은 내가 개인적으로 뵌 적이 있는 분인데 참 좋은 분이다. 친절하시고, 소박하시고. 그런데 문제는... '성격'으로 번역의 오점을 만회할 수는 없다는 것. (당연한 얘기지만). 여러 복잡다단한 지역이 포함돼있긴 하지만 통틀어 '중동학계'라고 할 수 있는 분야가 존재하는데, 이 동네에서 저 책 번역자가 거의 매장될 분위기였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출판사는 이 책의 절판&재번역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 책은 어떤 정도였냐면, 비문도 비문이지만, 글 맥락상 충분히 알 수 있는 반어법을 곧이곧대로 해석해놓은 부분마저 있었다. 예를 들면 촘스키가 '미국, 참 잘 하는 짓이다'라고 비꼰 것을 '미국은 잘했다'로 번역해놓는 식. 알려질대로 알려진 촘스키 저술을 저따위로 번역하는 것은 범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촘스키 책 중에서 일반 독자들이 읽기엔 너무 전문적인 저 책이, 9.11 직후에 붐을 타고 꽤나 팔렸다는 사실.(실상 이 책은 1982-83 레바논 내전 백서 형식이기 때문에 중동 사태에 대해서 아주아주 특별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읽어볼 필요는 없다)

사족을 달자면 촘스키 책 번역본 중에서는 '507 정복은 계속된다' 번역이 아주 훌륭했다. 이 책을 번역한 오애리님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지내는 분인데, 당초 이 책을 읽어보기 전에 ('트라이앵글' 번역에 대해 나와 함께 공분했던) 친구로부터 질문을 받았었다. 대체 오애리님은 누구이관대 그렇게 번역을 잘 했냐고... 덕택에 '507'을 읽어보게 됐는데, 역시나 훌륭한 번역이었다. 나중에 번역자로부터, 번역료 액수를 듣고 기절하긴 했지만(거의 염가 노동력착취 수준). 하워드진 책들을 번역한 유강은씨 솜씨도 괜찮다.

두번째로 열받는 번역- 짜깁기 번역. 고유명사가 페이지마다 다르게 나온다. 역시나 '추악한 전쟁'이 이런 번역의 극단을 보여줬다. 아프간의 대표적인 반소련 무자헤딘 장군이었던 마수드를 '마수드' '마소드' '마소우드'로 뒤죽박죽 표기한 것은 애교에 속한다. masoud가 어떻게 '마오우'까지 될 수 있는지는 신만이 아실 일이다 -_- 책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고유명사 표기가 다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왼쪽 페이지와 오른쪽 페이지에 다르게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짜깁기를 하려면 제대로 된 인간들끼리라도 번역을 할 일이지, 누구나 '체첸공화국'으로 쓰는 것을 군데군데 '체첸야'로 해놓거나(아예 현지 발음을 되살려 보시든지) 소련의 '프라우다'도 몰라서 무려 '프라다'라고 해놨다. 이 정도면 철저한 로우코미디 수준 아닌가.

세번째, 영어식 일어식 이른바 '번역체' 문장으로 독자를 질리게/열받게/궁금하게 만드는 책들. 누가 번역한 것인지는 까먹었는데, 예전에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을 보다가 중도포기한 적이 있다. 아빠가 딸더러 "오빠한테 편지 좀 쓰지 그러니?" 라고 묻는 부분이 있었다. 이 작자는, 따옴표 안의 저 대사를 문자 그대로 직역하여 "나는 네가 그에게 편지를 쓰기를 원한다"라는 심오한 문장으로 만들어놨었다. 쿵야...

얼마전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이랑, 일본의 비판적 지성으로 꼽히는 후지따 쇼오조오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을 읽었다. 재미난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체 일어체 번역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일본의 저런 학자들이 쓴 책을 번역한 책에서는, 일본어의 독특한 표현을 제외하면, 목에 걸리는 어색한 문장들이 없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것은 전반적인 우리나라와 일본의 학문 수준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마루야마 마사오도 그렇고 가라타니 고진도 그렇고, 이 사람들이 서양 학자들 글 인용해서 말하는 걸 보면 아주 자연스럽고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간다. '완전히 소화해서' 얘기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싶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번역돼 나오는 서양 책들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책 내용이 독창적이어서라기보다는 우리말로 적절한 개념을 찾지 못해서 이상하게 꼬아놨기 때문인 듯하다. 얼마전 엘레건트 유니버스에서 읽은 러더포드의 말이다. "무언가를 전문용어 없이 일상용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우리나라의 번역책들 혹은 번역체에 버금가는 사회과학/철학책들에는 저런 증거들이 너무 많다.

앞서 말한 치명적인 번역들 말고, 조금 다른 맥락에서 번역에 아쉬움을 느꼈던 적도 있기는 하다. 이윤기선생이 번역한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읽을 때였다. 이윤기 선생은 누가 뭐래도 훌륭한 번역자이지만, 본인이 내용을 잘 안다고 자신했던 터인지, 글에서 캠벨보다 번역자가 더 부각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번역자의 독특한 글투(이미 낯익어진 '이윤기체')가 너무 많이 묻어난다는 것. 책은 굉장히 훌륭했고 번역도 그정도면 100점에 가깝지만 캠벨에 앞서 이윤기 냄새가 난다는 것은 좀 아쉬웠다.

지금껏 번역에 대해 불평만 했으니 이제는 칭찬도 해야겠다. 훌륭한 번역자님들도 많으니깐.

훌륭한 번역자들을 유독 많이 만나게 된 것은 의외로 과학분야였다(다른 분야에 훌륭한 번역자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관심사가 이 쪽이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과학책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하면서(주로 90년대 후반 이후) 과학전문 번역가 풀이 형성됐고, 독자층도 형성됐고, 출판사군이 형성되면서 문학도 못잖은 문장력을 자랑하는 번역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 같다(이 좁은 시장 잡아먹겠다고 지금은 과학서적 분야에서도 출판업계 경쟁이 치열한 것 같지만). 

'엘레건트 유니버스'를 번역한 박병철 선생(만나뵌 적은 없지만) 번역은 물리학 쪽에선 최고봉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는 김희봉 선생님도 아주 탁월하다. 김희봉선생님 번역이라면 언제라도 오케이일 정도. 파인만 시리즈 중에서 물리학 강의 말고 에세이 부문 많이 번역하셨고, 특히 존 홀런드의 '숨겨진 질서'같은 책들은 역자의 설명글이 압권이다. '물리가 물렁물렁' 시리즈를 번역하신 이충호선생님도 끝내주는 번역가이시고... 반면에 생명과학 쪽 주로 번역하는 이한음씨 번역은, 관련분야 전문가다운 솜씨는 인정하지만 문장이 가끔 목에 걸린다. (여담이지만 이한음씨는 신문사 국제부 기자들이 제멋대로 번역해서 퍼뜨려놓은 '줄기세포'라는 말을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듯)

일본어 소설 쪽에선 김난주씨가 워낙 탁월하니깐... 자기책 외국어번역본에 까다롭다는 요시모토 바나나도 만족스러워하고 있다고 들었다(김난주씨 본인한테 들은 거니까 신빙성이 떨어지나?) 김난주씨랑 양억관씨는 부부 번역가로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김난주씨 쪽의 명성이 더 높지 않을까 싶다. 두 사람의 번역본을 모두 읽어봤는데(워낙 번역량이 많은 관계로... 이들의 번역본을 피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난주씨의 섬세한 번역은 진짜 대단하다. '창가의 토토'에서는 일본어 7언시의 운율을 살려, 번역문도 7언시로 해놓은 것을 보고 거의 감동했었다.

최근 읽었던 책들 중에서 아주 맘에 들었던 것은, 아모스 오즈 '나의 미카엘' 번역이었다. 국내에 몹시 진귀한 히브리어 전공자이자 손꼽을만한 이스라엘 전문가인 최창모 교수님이 옮기셨는데,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최교수님을 만난 적이 있다(정확히 말하면 아주 좋아하는 분이고 친하기까지 하다 ^^;;) '문학적인 분'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말 수준으로 치면 완벽에 가까운 번역이어서 새삼 놀랐었다. 아모스 오즈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노벨문학상 후보로 늘상 거론되는 작가이지만 국내에는 의외로 팬들이 별로 없다. 그나마 국내에 오즈 작품이 번역돼 들어온 것은 순전히 최교수님 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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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1-0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할게요

딸기 2004-11-09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 복받으실 거예요~~

갈대 2004-11-0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 분야가 오히려 번역이 괜찮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과학책 읽으면서 번역 때문에 열받은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이기적 유전자'는 제외. 제발 그 번역가가 도킨스 책에 손 안 댔으면 좋겠음). '물리학 강의'의 경우엔, 정말 흠 잡을 데 없는 번역이더군요.

딸기 2004-11-09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다른 분야와 달리 아직은 아무나 번역하겠다고 달려들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요. 일단 과학 지식이 좀 있어야 하니깐, '문턱'이 있는 셈이잖아요. 박병철 선생과 김희봉선생은 연세대 물리학과에서 공부하신 것으로 알고 있고, 이충호 선생님은 서울 사대 물리교육학과 졸업하셨을 거예요. 아무래도 과학 쪽에 한 발 걸치신 분들이니깐 전문적인 소양도 있는데다가 훌륭한 문장력까지 갖추고 계시니, 독자로선 고마울 따름이지요. ^^

딸기 2004-11-0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름이 멋지시군요!

숨은아이 2004-11-09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운빈현님 서재에서 보고 왔어요. 자료로 간직하려고 퍼갑니다. 꾸벅.

로쟈 2004-11-09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익하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딸기 2004-11-09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숨은아이님, 로쟈님. 자료로 간직하기엔 너무 조잡한 내용입니다만, 책 고르실 때 조금이라도 도움됐으면 좋겠네요. :)

balmas 2004-11-09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이렇게 하셔야죠.

그래야 퍼가지 ...^^

딸기 2004-11-1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발마스님 ^^

로즈마리 2004-11-25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윤기 번역-오비디우스 등-은 원문과 동떨어진 의역이 너무 많아서 라틴어, 그리스어 전공자들에게는 신뢰가 떨어지는 번역입니다..^^;; 아마 영어 번역을 하시는 분이라서 그런 가 봐요.

딸기 2004-11-2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하긴, 원래의 언어가 아니라 중역을 하게 되면 역시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겠지요. 로즈마리님은 신화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로즈마리 2004-11-26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관심은 많아요..^^ 아는 게 없어서 그렇지. 딸기님은 번역에 관심이 많으신듯..과학책도 정말 읽어보고 싶은 책이 많네요. 문외한이라...엄두가 잘 안나는데, 딸기님 서평을 보며 군침을 흘려보고 있는 중입니다..^^

딸기 2005-01-1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저는 원서로 사실 거의 안 읽어요. (지금껏 원서로 읽은 책 몇권 안 돼요) 좀 부끄러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