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마스님께서 교수신문에 실린 전문번역가에 대한 기사를 퍼놓으신걸 보고 리플 달다가, 아예 페이퍼로 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아(다른 분들한테 정보가 될 수도 있으니) 정리해 다시 올린다.
나는 번역자를 유심히 보는 편이다. 특별히 번역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책 보면서 영어식 일어식 문장을 만나면 한번씩 씨발거리지 않고서는 넘어가질 못하는 못된 버릇 탓이다. 어색하기 짝이없는, 문장도 아닌 문장들이 넘쳐난다는 느낌. 책들도 그렇고, 신문 기사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신문 보면서 기사에 쓰인 희한한 문장들을 나혼자 머리속으로 '우리말'로 번역해보곤 하는데, 그정도로 '말글오염'이 심각하다고나 할까. 번역돼나온 책들을 보면서 문제가 많다고 느낄 때도 한두번이 아니다. 번역된 책들의 문제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몇가지로 정리해보면
첫째, 특정한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잘못쓰거나 문장을 아예 잘못 번역하는 경우. 이건 진짜 심각한 문제다. 책의 내용 자체가 다르게 전달되어 버리니깐 말이다.
이런 대표적인 사례를 꼽자면, 내가 지금까지 봤던 책들 중에서 '최악의 번역' 혹은 '추악한 번역'으로 지목할 수 있는 책인 '추악한 전쟁'(존 쿨리). 성전(holy war)를 비꼬기 위해 'unholy war'라고 제목을 붙인 것을, 웃기는 번역자(라기보다는 독서방해자)가 '추악한 전쟁'이라고 해놨다. '추악한 전쟁'이라고 하면, 명백히 다른 개념인 '더러운 전쟁' 즉 dirty war를 연상케하는데, 번역자가 과연 그런 정도의 상식이라도 갖고 있었는지는 회의적이다. 이 책 읽다가 너무 열받아서 무려 출판사에 항의전화를 하기까지 했다. 내가 책 읽다가 출판사에 전화한 유일한 케이스였다...
이 책 못잖게 황당했던 것은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 이거 번역하신 분은 실은 내가 개인적으로 뵌 적이 있는 분인데 참 좋은 분이다. 친절하시고, 소박하시고. 그런데 문제는... '성격'으로 번역의 오점을 만회할 수는 없다는 것. (당연한 얘기지만). 여러 복잡다단한 지역이 포함돼있긴 하지만 통틀어 '중동학계'라고 할 수 있는 분야가 존재하는데, 이 동네에서 저 책 번역자가 거의 매장될 분위기였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출판사는 이 책의 절판&재번역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 책은 어떤 정도였냐면, 비문도 비문이지만, 글 맥락상 충분히 알 수 있는 반어법을 곧이곧대로 해석해놓은 부분마저 있었다. 예를 들면 촘스키가 '미국, 참 잘 하는 짓이다'라고 비꼰 것을 '미국은 잘했다'로 번역해놓는 식. 알려질대로 알려진 촘스키 저술을 저따위로 번역하는 것은 범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촘스키 책 중에서 일반 독자들이 읽기엔 너무 전문적인 저 책이, 9.11 직후에 붐을 타고 꽤나 팔렸다는 사실.(실상 이 책은 1982-83 레바논 내전 백서 형식이기 때문에 중동 사태에 대해서 아주아주 특별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읽어볼 필요는 없다)
사족을 달자면 촘스키 책 번역본 중에서는 '507 정복은 계속된다' 번역이 아주 훌륭했다. 이 책을 번역한 오애리님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지내는 분인데, 당초 이 책을 읽어보기 전에 ('트라이앵글' 번역에 대해 나와 함께 공분했던) 친구로부터 질문을 받았었다. 대체 오애리님은 누구이관대 그렇게 번역을 잘 했냐고... 덕택에 '507'을 읽어보게 됐는데, 역시나 훌륭한 번역이었다. 나중에 번역자로부터, 번역료 액수를 듣고 기절하긴 했지만(거의 염가 노동력착취 수준). 하워드진 책들을 번역한 유강은씨 솜씨도 괜찮다.
두번째로 열받는 번역- 짜깁기 번역. 고유명사가 페이지마다 다르게 나온다. 역시나 '추악한 전쟁'이 이런 번역의 극단을 보여줬다. 아프간의 대표적인 반소련 무자헤딘 장군이었던 마수드를 '마수드' '마소드' '마소우드'로 뒤죽박죽 표기한 것은 애교에 속한다. masoud가 어떻게 '마오우'까지 될 수 있는지는 신만이 아실 일이다 -_- 책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고유명사 표기가 다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왼쪽 페이지와 오른쪽 페이지에 다르게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짜깁기를 하려면 제대로 된 인간들끼리라도 번역을 할 일이지, 누구나 '체첸공화국'으로 쓰는 것을 군데군데 '체첸야'로 해놓거나(아예 현지 발음을 되살려 보시든지) 소련의 '프라우다'도 몰라서 무려 '프라다'라고 해놨다. 이 정도면 철저한 로우코미디 수준 아닌가.
세번째, 영어식 일어식 이른바 '번역체' 문장으로 독자를 질리게/열받게/궁금하게 만드는 책들. 누가 번역한 것인지는 까먹었는데, 예전에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을 보다가 중도포기한 적이 있다. 아빠가 딸더러 "오빠한테 편지 좀 쓰지 그러니?" 라고 묻는 부분이 있었다. 이 작자는, 따옴표 안의 저 대사를 문자 그대로 직역하여 "나는 네가 그에게 편지를 쓰기를 원한다"라는 심오한 문장으로 만들어놨었다. 쿵야...
얼마전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이랑, 일본의 비판적 지성으로 꼽히는 후지따 쇼오조오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을 읽었다. 재미난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체 일어체 번역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일본의 저런 학자들이 쓴 책을 번역한 책에서는, 일본어의 독특한 표현을 제외하면, 목에 걸리는 어색한 문장들이 없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것은 전반적인 우리나라와 일본의 학문 수준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마루야마 마사오도 그렇고 가라타니 고진도 그렇고, 이 사람들이 서양 학자들 글 인용해서 말하는 걸 보면 아주 자연스럽고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간다. '완전히 소화해서' 얘기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싶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번역돼 나오는 서양 책들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책 내용이 독창적이어서라기보다는 우리말로 적절한 개념을 찾지 못해서 이상하게 꼬아놨기 때문인 듯하다. 얼마전 엘레건트 유니버스에서 읽은 러더포드의 말이다. "무언가를 전문용어 없이 일상용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우리나라의 번역책들 혹은 번역체에 버금가는 사회과학/철학책들에는 저런 증거들이 너무 많다.
앞서 말한 치명적인 번역들 말고, 조금 다른 맥락에서 번역에 아쉬움을 느꼈던 적도 있기는 하다. 이윤기선생이 번역한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읽을 때였다. 이윤기 선생은 누가 뭐래도 훌륭한 번역자이지만, 본인이 내용을 잘 안다고 자신했던 터인지, 글에서 캠벨보다 번역자가 더 부각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번역자의 독특한 글투(이미 낯익어진 '이윤기체')가 너무 많이 묻어난다는 것. 책은 굉장히 훌륭했고 번역도 그정도면 100점에 가깝지만 캠벨에 앞서 이윤기 냄새가 난다는 것은 좀 아쉬웠다.
지금껏 번역에 대해 불평만 했으니 이제는 칭찬도 해야겠다. 훌륭한 번역자님들도 많으니깐.
훌륭한 번역자들을 유독 많이 만나게 된 것은 의외로 과학분야였다(다른 분야에 훌륭한 번역자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관심사가 이 쪽이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과학책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하면서(주로 90년대 후반 이후) 과학전문 번역가 풀이 형성됐고, 독자층도 형성됐고, 출판사군이 형성되면서 문학도 못잖은 문장력을 자랑하는 번역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 같다(이 좁은 시장 잡아먹겠다고 지금은 과학서적 분야에서도 출판업계 경쟁이 치열한 것 같지만).
'엘레건트 유니버스'를 번역한 박병철 선생(만나뵌 적은 없지만) 번역은 물리학 쪽에선 최고봉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는 김희봉 선생님도 아주 탁월하다. 김희봉선생님 번역이라면 언제라도 오케이일 정도. 파인만 시리즈 중에서 물리학 강의 말고 에세이 부문 많이 번역하셨고, 특히 존 홀런드의 '숨겨진 질서'같은 책들은 역자의 설명글이 압권이다. '물리가 물렁물렁' 시리즈를 번역하신 이충호선생님도 끝내주는 번역가이시고... 반면에 생명과학 쪽 주로 번역하는 이한음씨 번역은, 관련분야 전문가다운 솜씨는 인정하지만 문장이 가끔 목에 걸린다. (여담이지만 이한음씨는 신문사 국제부 기자들이 제멋대로 번역해서 퍼뜨려놓은 '줄기세포'라는 말을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듯)
일본어 소설 쪽에선 김난주씨가 워낙 탁월하니깐... 자기책 외국어번역본에 까다롭다는 요시모토 바나나도 만족스러워하고 있다고 들었다(김난주씨 본인한테 들은 거니까 신빙성이 떨어지나?) 김난주씨랑 양억관씨는 부부 번역가로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김난주씨 쪽의 명성이 더 높지 않을까 싶다. 두 사람의 번역본을 모두 읽어봤는데(워낙 번역량이 많은 관계로... 이들의 번역본을 피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난주씨의 섬세한 번역은 진짜 대단하다. '창가의 토토'에서는 일본어 7언시의 운율을 살려, 번역문도 7언시로 해놓은 것을 보고 거의 감동했었다.
최근 읽었던 책들 중에서 아주 맘에 들었던 것은, 아모스 오즈 '나의 미카엘' 번역이었다. 국내에 몹시 진귀한 히브리어 전공자이자 손꼽을만한 이스라엘 전문가인 최창모 교수님이 옮기셨는데,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최교수님을 만난 적이 있다(정확히 말하면 아주 좋아하는 분이고 친하기까지 하다 ^^;;) '문학적인 분'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말 수준으로 치면 완벽에 가까운 번역이어서 새삼 놀랐었다. 아모스 오즈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노벨문학상 후보로 늘상 거론되는 작가이지만 국내에는 의외로 팬들이 별로 없다. 그나마 국내에 오즈 작품이 번역돼 들어온 것은 순전히 최교수님 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