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이 부시 개쉐이의 재선에 대해 논평한 글. 기특한 친구가 물어왔다. 어느 게시판엔가 '도끼'라는 분이 번역해놓으셨는데, 지젝의 어법이 마음에 들어서 허락도 없이 퍼왔다. 들키면 어떡하지... (굵은 글씨는 내가 강조한 거다)


자유주의의 워털루(또는 결국 워싱턴에서 날라 온 약간 좋은 소식)

부시의 재선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첫 반응은 절망, 심지어 공포였다. 지난 4년 간은 단지 악몽에 지나지 않았다. 부시가 새로이 입맛을 다시며 대법원에 보수적인 판사를 임명하고 이라크 다음으로 다른 나라를 침공하며 미국에서 한 발짝 더 자유주의를 사멸로 내몰면서 자신의 의제를 추구함에 따라 대기업과 근본주의 포퓰리즘의 악몽같은 연합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적인 대응은 정확히 우리가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가?, 이다. 이건 자유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자신들의 세계관을 강제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정도를 증명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차가운 머리를 유지하며 냉정하게 결과를 분석한다면 2004년 대선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드러낸다.

많은 유럽인들은 지식인들과 대중문화 엘리트들이 반대했음에도 어떻게 부시가 승리할 수 있었는지 놀라워한다. 결국 유럽인들은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의 동원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에 직면해야만 했다. 그 자명한 우둔함 때문에 이 사실은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역설적이고 정확히 말해 포스트모던 현상이다.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보면, 다가오는 세계종말에 관한 Tim F. Lahaye와 Jerry B. Jenkins의 12권짜리 “두고 간 것 Left Behind” 시리즈는 6천만권 이상이 팔렸다. “두고 간 것” 시리즈는 갑작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아마게돈의 공포를 겪지 않도록 신이 호명해 구원받은 영혼-의 실종으로 시작한다. 그 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젊고 능숙하며 카리스마를 가진 니콜라 카르파티아 Nicolae Carpathia 라는 이름의 루마니아 정치인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뒤 유엔 본부를 바빌론으로 옮긴다. 바빌론에서 카르파티아는 모든 국민국가를 무장해제하고 미국에 반대하는 세계정부를 세운다. 이 터무니없는 음모는 모든 비(非)기독교인들 ­유대인, 이슬람교도 등­이 격동의 불바다에서 다 타버리는 마지막 전쟁까지 계속된다. 만일 이슬람 입장에서 씌어진 비슷한 이야기가 아랍 국가들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면 서구 자유주의 매체가 무엇을 부르짖었을지 상상해 보라. 정말 놀라운 건 이런 소설들의 불충분함과 원시성이 아니라 “심각한” 종교적 메시지와 대중문화 상업주의의 쓰레기같은 관행이 묘하게 겹쳐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반성할 건 VKP(b)­-스탈린주의 성경­-의 역사에서 드러났듯이 민주주의의 기본역설에 관한 것이다. 스탈린(책을 대필한 사람)은 20대 말에 정당대회에서의 투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큰 표차를 보이자 대의원들은 중앙위원회가 제안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만약 투표가 만장일치라면 소수파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약간 비뚤어진 “전체주의적” 왜곡을 했다기보다 이 역설은 민주주의의 구조 그 자체를 구성한다. 민주주의는 다수majority와 “전체all” 사이의 단락 short-circuit에 기반하고 있다. 그 속에서 승자는 전체를 취하고 다수는 전체로 계산되어 모든 권력을 손에 넣는다. 심지어 이 다수가 수백만 표 중에서 단지 2, 3백 표에 불과하다해도 말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과반수의 의지와 이해가(이 두 가지는 자동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국가적인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법률주의 이상인가? 사회의 적대를 담보하는 형식적인 규칙체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착은 정치영역으로 완전히 흡수된다. “민주주의”는 선거 조작이 어떻게 이루어지든 모든 정치인들이 무조건 결과를 존중하는 걸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는 정말 “민주적”이었다. 즉 분명한 선거조작과 플로리다의 수백 표가 미국 전체의 대통령이 될 사람을 결정했다는 사실의 명백한 무의미성에도 민주당 후보자는 패배를 받아들였다. 선거 뒤 불안정한 몇 주 동안 빌 클린턴은 적절하고 신랄한 언급을 했다. “미국인들은 말해 왔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말했는지 모른다.” 이 언급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이 무엇을 말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결과 이후에는 “메시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일 거다.

이건 진정한 사회주의라는 비전을 고수함으로써 가련한 “현존 사회주의”에 반대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의 따분한 시도를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시도에 관해 권위 있는 헤겔주의적 답변은 충분한 대답이 된다. 즉 그 개념을 살아있게 하는데 실패한 현실은 개념 자체에 고유한 취약성을 증명한다. 민주주의에 똑같이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너무 간단해서 더 진정한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현존하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민주주의에 반대하지 못하는 걸까?

이 점은 부시의 승리가 우연한 착오, 또는 사기나 조작의 결과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헤겔은 적절한 시기에 나폴레옹이 두 번 패배해야 한다고 편지를 썼다. 워털루 이후에야 자신의 패배가 군사적인 사안이 아니라 더 심오한 역사적인 변화의 표현이라는 점은 나폴레옹에게 분명해졌다. 부시도 마찬가지다. 부시는 우리 모두가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고 있음을 자유주의자들이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두 번 이겨야 했다.

200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이 파괴되었다. 12년 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1월 9일 “행복한 ‘90년대’”를 선언했던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꿈꿨고 자유민주주의가 원칙적으로 승리했다고 믿었으며 이 초헐리우드적인 행복한 결말을 막을 유일한 방해물은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지도자들이 있는 작은 저항지대일 뿐이라고 믿었다. 반대로 9/11은 클린턴적인 행복한 90년대의 종언을 상징하며 이스라엘과 요단강 서안지구 사이에, 유럽연합 주변에, 미국과 멕시코 국경 사이에 새로운 장벽이 들어서는 시대를 알렸다.

최근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윌리엄 크리스톨과 로렌스 캐플란은 “이 사명은 바그다드에서 시작하지만 그곳에서 끝나지 않는다.…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시대의 첨단에 서 있다.…이것은 결정적인 순간이다.…이것이 이라크 이상을 의미한다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심지어 이것은 중동의 미래와 테러와의 전쟁 이상을 의미한다. 이것은 미국이 21세기에 어떤 종류의 역할을 수행하려 하는가와 관련된다.” 그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위태로운 국제공동체의 실제적인 미래-그것을 조절할 새로운 규칙, 새로운 세계질서가 나아갈 바-이다.

따라서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새로운 비전은 최근 미국정치의 효과적인 틀로 나타나고 있다. 9월 11일 이후 미국은 나머지 세계를 기본적으로 믿음직한 파트너라고 여기지 않는다. 궁극적인 목적은 더 이상 보편적인 자유민주주의를 확대하는 후쿠야마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미국을 나머지 세계와 분리된 고독한 초강대국, 자신의 중요한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새로운 군사력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는 “요새 아메리카”로 바꾸는 것이다.
이 새로운 군사력은 세계 어느 곳에서 신속하게 배치하는 군대만이 아니라 펜타곤이 우주에서 지구상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우주무기의 개발을 포함한다. 이 전략은 미국과 유럽의 최근 갈등에 새로운 빛을 던진다. 미국을 “배신하고 있는” 건 유럽이 아니다. 미국은 더 이상 유럽과의 전폭적인 동반자관계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부시의 미국은 새로운 지구제국이 되려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오히려 부시의 미국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무정한 국민국가를 계속 유지한다. 이제 미국 정치는 잘 알려진 생태주의자의 구호를 이상하게 뒤바꾼 구호로 이끌리고 있는 듯하다. 즉 지구적으로 행동하고 지역적으로 사고하라.

이런 좌표 내에서 생각이 있는 진보주의자라면 모두 부시의 승리를 반겨야 한다. 다가올 적대의 윤곽이 이제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그려질 것이기 때문에 부시의 승리는 전 세계에 좋은 것이다. 케리의 승리는 진정한 분할선을 흐리는 일종의 역사적인 변칙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케리는 부시의 정치에 대해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세계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구나 부시의 승리는 역설적이게도 유럽인과 라틴 아메리카 경제 모두에게 더 좋다. 노동조합의 지지를 얻기 위해 케리는 보호주의적 장치들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득은 국제정치를 포함한다. 케리가 승리했다면 그건 자유주의자들이 이라크 전쟁의 결과에 직면하도록 강요하고 부시 캠프가 자신들의 내린 비극적인 결정의 결과를 가지고 민주당을 비난하도록 했을 것이다. 진 커크패트릭은 1979년에 나온 자신의 유명한 논평집 <독재자와 이중적인 기준>에서 적극적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전복시키는 한편 우파 독재자들과 협력하는 미국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권위주의” 정권과 “전체주의” 정권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권위주의 독재자는 권력과 부에 관심을 가지며 심지어 몇 가지 큰 대의에 관해 입에 발린 말을 할 때조차 이데올로기적인 이슈들에 무관심한 실용적인 지배자이다. 반대로 전체주의 지배자는 사심없고 자신들의 이상을 위해 모든 걸 거는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광신도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지도자가 실질적이고 군사적인 위협에 합리적이고 예측하며 반응하는 것으로 다뤄진다면, 전체주의 지도자는 그 위협을 더 위험하게 하고 직접 맞서야만 한다.
아이러니는 이 구분이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일치하지 않는 점을 완벽하게 요약한다는 점이다. 사담은 권력을 추구하는 부패한 권위주의 독재자였고 잔인한 실용적 고려(80년대 동안 미국과의 협력으로 이끌었던)에 따랐다. 그러나 사담을 제거하는 미국의 간섭은 어떠한 실용적인 타협도 배제하는 “근본주의적” 적대를 창출하는 것으로 이끌었다.

부시의 승리는 선진 서구국가들 사이의 이익의 일치에 대한 환상을 제거할 것이다. 이 승리는 유럽연합이나 라틴 아메리카에서 Mercosur같은 새로운 동맹을 강화하는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과정을 이끌 새로운 동력을 제공할 것이다. 균형잡힌 복지국가라는 환상에 집착하는 “낡은 유럽”에 맞서는 미국 자본주의의 “포스트모던” 동학을 칭송하는 건 언론의 진부한 표현일 뿐이다. 하지만 정치조직의 영역에서 지금 유럽은 지리나 문화와 관계없이 어떤 이에게 한 장소를 제공할 수 있는, 유례없이-아마도 “포스트모던한”- 국경을 초월한 집단으로 스스로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보다 훨씬 더 많이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절망할 이유가 없다. 오늘날의 전망이 어두울지 모르나 위대한 부시주의의 어록 중 하나를 기억하라. “미래는 더 나은 미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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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1-10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딸기'로 돌아오셨네요.

balmas 2004-11-10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정말 '딸기'로 되돌아오셨네요. 왜 그걸 몰랐지???

지젝의 순발력은 역시 알아줄 만하군요. 지젝의 순진한 낙관주의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든 읽을 만한 글이군요.

지젝을 좋아하는 분과 약간 설전을 했는데, 쑥스럽게 바로 지젝의 글을 퍼가야겠군요.
저도 들키면 어쩌죠?? ㅋㅋ

로쟈 2004-11-1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키켰군요. '일관된' 입장을 지키시킬 바랍니다^^...

딸기 2004-11-10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발마스님과 로쟈님, 좀더 치열하게 싸우십시오! ㅋㅋ

우루불루(라고 불러야 하나요)님, 다시 딸기로 돌아와버렸어요. ^^

딸기 2004-11-10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지젝을 좋아하는 분, 그리고 그분과 설전을 벌이신 분께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저는 지젝의 저 글이 맘에 들었습니다. 깊은 사고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한 '약간의 통찰력'(왜냐면 저 글은 맛뵈기 글이니깐), 쌔끈한 비꼬기... 그런데 어떻게 봐야 하나요. 지젝의 저 글, '순진한 낙관주의'입니까, 아니면 '유쾌한 반어법' 입니까?

urblue 2004-11-10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가 더 좋습니다. ^^

전 you are blue 랍니다.

딸기 2004-11-11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유아블루님이셨군요. ^^

저는 '딸기'가 된지 하도 오래돼서, 이젠 진짜 제가 과일인 것만 같아요. 저의 실명이 더 어색할 지경이라니깐요. ^^

비로그인 2004-11-1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문은 ' http://www.inthesetimes.com/site/main/article/1662/ '

에 있습니다. 몇군데 사소한 오역이 있네요. 말이 안되는 것 처럼 보이는 건 대부분 오역이라고 볼 때 다섯번째 줄, "하지만 이런 감정적인 대응은 정확히 우리가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가?,' 이건 " 하지만 이런 감정적인 대응은 정확히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로 봐야 할 것 같고... 이런 식의 오역이 많아요..뭐, 대충 날림으로 번역하신 듯.^^요점은 전달 됐으니까, 뭐라 말하면 실례겠죠?

가을산 2004-11-1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이래서 여기가 좋아요.... ^^

딸기 2004-11-11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거 퍼오면서 보니깐, 번역하신 분도 '급해서 대충 옮겼다'고 쓰셨더라고요. 원문까지 가져오셨네요. 고자님(이름 참 특이하시군요 ^^) 반갑고 고맙습니다. 가을산님도 반가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