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과학
전방욱 지음 / 풀빛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과학은 언제나 수상했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신농씨 하는 일은 그저 신화였을 것이고, 아크로폴리스의 평범한 ‘시민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는 일을 이해했을 리 없다. 평범한 지식, 그냥 ‘상식’만을 가진 대다수 사람들에게 과학은 언제나 수상한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유사 이래 수상했던 과학은 그 비밀스러움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존재를 규정하고, 변화시키고, 때로는 편하고 행복하게, 때로는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어왔다. 과학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과학을 수상하게 여기는 시선도 오래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굳이 수상한 과학에 ‘윤리’의 칼날을 들이댈 필요가 있는가? 지금 우리가 과학에 들이대는 칼날은, 중세 유럽의 사제들이 종교적 관점에서 연금술사와 마녀들을 처단했던 칼날과는 어떻게 다를까?
분명 뭔가가 있기는 있다. 연금술사의 어두운 방에서 상아탑으로, 그리고 다시 ‘바이오테크기업’의 연구소로 옮겨간 과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과학이 점점 더 창조주의 권능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21세기, ‘생명’이란 말에도 ‘과학’ 혹은 ‘공학’이란 단어가 따라붙는 시대에.

‘수상한 과학’. 이 책은 현직 대학교수인 생물학자가 썼다. 저자는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하고, 경력을 보니 등단한 문인이라고도 한다. 술술 읽히도록 재미있게 썼다. 외국 책들을 많이 읽은 사람인지 글쓰는 스타일이 저널리스틱하다. 국내외 다양한 사례가 들어있어서 생명과학 문외한들도 ‘과학자들의 실험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충이나마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놨다.
너무 저널리스틱하다보니 목차만 보고서는 내용을 짐작할 수가 없다. 내용은 좀 중구난방이다. 국내 학자가 국내 생명과학 연구현황을 담은 ‘과학 바로보기 안내서’를 냈다는 점에서는 칭찬해줄만 하지만, ‘국내’에 굳이 방점을 찍고픈 마음이 없는 독자라면 차라리 반다나 시바의 책을 보는 편이 낫겠다. 반다나 시바의 책들에는 ‘사상’ 혹은 ‘철학’, 더 나아가 일종의 패러다임 같은 것이 있지만 이 책엔 그런 것들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책의 제1장은 외국의 에세이를 아예 베끼다시피 한 것이어서 황당하기까지 했다. 중간에 이상한 문체(충분히 알수 있는 번역체 문장)가 나와서 혹시나 싶어 검색을 해보니 외국 에세이(
http://www.eastbayexpress.com/issues/2002-05-29/news/feature.html)를 번역, 축약한 것이었다. 뒷부분에서도 그런 짜깁기가 많이 보이는데, 대부분의 국내 저자들이 (분야를 막론하고)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지, 그러니까 이렇게 쓰는 것이 관행인지, 혹은 외국 저자들도 그렇게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 (비아냥이 아니라 진짜로 내가 잘 모르니깐 평가를 하기가 뭣하다). 다 읽고나서 확인을 해보니, 내가 굳이 검색해볼 필요도 없었다. 저자가 각주에 저 에세이를 참조했다면서 인터넷 주소까지 붙여놨는데 이 정도면 오히려 양심적인 학자라고 봐야 하나?

저런 것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면 이 책에 별 네 개를 주면서 찝찝하지가 않았을텐데. 무시무시한 생명과학, 뭘 무서워하고 뭘 지켜봐야하나 감을 못 잡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을 정도로 ‘괜찮은’ 책이고, 관련 분야 책들을 단 몇권이라도 본 사람들에겐 굳이 찾아서 읽어볼 필요 없으니 넘어가라고 말해주고픈 책이다.
다만 한가지 재미있었던 부분은-- GM(유전자 변형) 작물 얘기를 하면서 거론한 ‘윤리적 동등성’ 문제. GM 얘기할 때 보통 식품안전성(실질적 동등성)만 놓고들 논쟁을 벌이는데 이건 사실 (이 책의 저자도 지적하듯이) 쉽게 판가름할 수 없는 문제다. 저자는 GM 농업의 문제를 ▲식품 안전성(GM 식품은 유해한가) ▲농업구조의 변화(농민은 사라지고 농업기업만 남는다) ▲문화적 측면 등 세 가지 각도에서 바라본다.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그 중 세 번째, 문화적 측면의 문제였다. “소비자는 안전하다는 이유만으로 식품을 선택하지 않는다. 유전자 변형 식품은 소비자의 권리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믿음과 세속적인 가치관까지도 위협한다.” 개고기를 안 먹는 사람에게 개고기를 억지로 먹이거나, 혹은 개고기가 아닌 것처럼 속여서 먹인다면? 난 개고기를 좋아하지만, 싫다는 사람에게 굳이 먹이고픈 마음은 없는데 말이다.
결국 정보 공개와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가 되는데, 산업적 측면에서 봤을 때 강제 라벨링(GM 원료 공개)을 실시하고, 생산/유통구조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방안 등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강제 라벨링조차도 지금은 안 되고 있지만, 두 번째 ‘생산/유통구조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은 미국을 등에 업은 바이오테크 기업들의 위세를 보건대 전세계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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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05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사마의 리뷰를 읽고, 요새 저랑 읽는 책이 조금 겹치는 듯 해서 호들갑스럽게 들어와서 읽어봤어요. 호들갑스럽게 들어왔다가 화들짝 놀랐는데, 별셋이라... 별넷은 줄줄 알았는데, 그러다 리뷰 내용을 읽어보고, 별 셋 줄 만했겠구나 하는데 충분히 동의할 수 있네요. 물론 저는 다른 이유로 별넷을 고수하고 있지만... 덕분에 새로운 내용들을 알 수 있게 되었어요. 고맙고... 어쨌든 과학은 나에게 쥐약인듯 싶어요. 흐흐. 이건 정말 추천할 만한 리뷰네..

nemuko 2005-03-05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고도 이렇게 다른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니.... ㅠ.ㅜ 맞아요. 너무 여기저기서 내용을 가져온 것 같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이렇게 근거를 보여주시니 역시 딸기님이군요^^ 글구 반다나 시바의 책이 더 재밌다구요? 전에 올리신 리스트 보고 찜해뒀었는데, 이 쪽으로 관련된 책을 좀 더 읽어 보고 싶어서요...

딸기 2005-03-0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네무코님께서도 리뷰를 올리셨나요? 읽어볼께요 ^o^
그런데 사실 리뷰를 올리고 나니 쫌 거시기한 측면이 있네요. 너무 평가절하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4천만의 교양서 목록에 올려도 되겠다, 싶은 그런 생각도 들긴 하거든요. 그런데 독후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거니깐... 다른 사람들에게 권해주는 경우라면, 저도 이 책을 얼마든지 추천할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 책에 써있는 얘기들, 혹은 그 비슷한 얘기들을 전에도 여기저기서 본 적이 있는지라, '저의 경우에는' 별 감흥이 없었던 거거든요.

딸기 2005-03-05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워낙 무소신인 관계로... 별 네개로 바꿨습니다.

nemuko 2005-03-0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아니....딸기님 제가 무슨 리뷰를 쓰겠습니까. 쓸래도 능력이 안되서 페이퍼에 끄적 해두기만 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식은땀이 주르륵.... 보지 마세요..... ㅠ.ㅜ

바람구두 2005-03-0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계몽의 서사는 이래서 무서운 겁니다. 안 그래요? 딸기님!

딸기 2005-03-05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들오들...

반딧불,, 2005-03-08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마 그런 내용을 쓸 수는 없었는데 그래요.
짜깁기한 내용같은 느낌..그런 것이 참 싫었어요.
한번은 본듯한...어쨌든 대단하십니다. 아이구 정말 부끄럽네요.
제 리뷰가 얼마나 황당한지^^;;

딸기 2005-03-0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의 리뷰는 정말 훌륭했어요. 재미있게 잘 읽고, 이렇게 책 트집잡은 것이 오히려 (누구에게인지는 모르지만) 미안할 지경인걸요.

달마.. 2006-02-01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은 언제나 수상했다' 이 말이 무섭게 박히는군요.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앞으로 고쳐가기 위해 서로 노력해야할 최대 과제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반대하고 싶군요. 과학은 그 '상식'의 집합일 뿐입니다. 그 것이 일반적으로 언뜻 생각하기 쉽지않은 부분까지 꽤뚫고 있기에 두려워 보이는 것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사실', 혹은 '상식'을 우리는 언제나 윤리적으로 '선택'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음

책 읽고 하루 정도 지나면- 생각이 있어짐

이틀 지나면- 이런저런 내용으로 리뷰를 써야겠다...라는 생각이 듦

일주일 지나면- 가물가물해짐

2주 지나면- 다시 생각이 없어짐

3주 넘게 지나면- 책 읽었는지도 기억이 안 남

 

 

노는 것은
일을 하는 것보다 즐겁느니라.
오늘도 나는
하늘이라곤 콧배기도 뵈지 않는 
사무실 내 자리에 앉아
인터넷 잡담질을 한다.
내 자리 이쪽저쪽에선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스트레스만땅노인네같은 얼굴로 와서
총총이 전화를 받고 자판을 두드리고
먼 노트북으로 혹은 데스크탑으로
황당하거나 웃기거나 의미심장한 기사들을 보내나니.

(중략)

아무튼 노는 것은
일하는 것보다 즐겁나니라.

 

어디에건 빈틈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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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3-04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체국 계단에 앉아 베고니아꽃을 감상하며 편지를 쓰기엔 아직 너무 춥죠?
유치환과 조용필이 손을 잡고 지나가네요.
이 페이퍼를 읽으니......

딸기 2005-03-04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순한 소녀 혹은 가녀린 문학청년이라면 모를까, 뽀글뽀글 파마머리 이 아줌마가 우체국 계단에 앉아 편지쓰고 있으면 남들이 손가락질 할거예요 ^^

로드무비 2005-03-04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그 모습이 더 멋지다고 이 연사 강력히 주장합니다아.^^
종로 2가 파고다공원 옆 우체국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오래전 그 부근에 파고다극장도 있었는데......

반딧불,, 2005-03-0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쉬 깔끔해요.
글 잘 쓰는 사람 정말 부러워요...

바람구두 2005-03-04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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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사마는 종종 나를 웃긴다.
우선 성격적으로, 그리고 다른 이유로 책을 도저히 못 버리는 내 성격상
읽고나서 휙휙 버린다는(흑, 버릴 거면 나줘라) 그 성품도 그러하지만
저런 글은 읽으며 미소짓게 만든다.

어느 대가리는 컴퓨터 하드디스크라 클릭 한방에 주루룩 모든 걸 토해내겠나?
옛날 사람들은 책을 달달 외웠다.
그러니 감옥에 가도 책 한 권 뚝딱 써낼 수 있었나 보다.
레퍼런스가 필요없는 거 아닌가?
(요새는 하도 창의력창의력 노래를 해서 암기력은 천대받지만,
창의력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려면, 그런 뒤에도 지속되기 위해선
반드시 암기력이 필요하다고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친다. 암기력 꽝!!!)


책을 읽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음
책 읽고 하루 정도 지나면- 생각이 있어짐
이틀 지나면- 이런저런 내용으로 리뷰를 써야겠다...라는 생각이 듦
일주일 지나면- 가물가물해짐
2주 지나면- 다시 생각이 없어짐
3주 넘게 지나면- 책 읽었는지도 기억이 안 남

요 부분 보면서 특히 많이 웃었는데,
어쩜 딸기사마랑 나랑 똑같은가 싶어서 말이다.
아무 생각이 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책 읽는 동안엔 감히 반론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나의 심각한 문제는 조갑제 글을 읽으면서도 그렇다는 거다. 음, 그럴 수 있지. 음, 그런가? 오호...
이런다. 문제 심각하지 않은가? 내가 생각해도 이런 고백까지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 흐흐)

그런데 책 딱 덮어버리면 갑자기 왜 그런 공포영화 있잖나?
문이 딱 열리니까 온갖 괴물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데
와락 덮치듯 온갖 잡생각, 궁금증들이 밀려드는데...
갈피잡는데 시간 좀 걸린다.

그리고 리뷰나 뭐나 이런 걸로 정리하고 나면 더이상 덤비지 않는다.
이걸 다른 말로 까먹는다고 하는 건데...
잡지 마감 치고나면, 내가 어느 필자랑 언제 이야기했는지는 물론,
그 사람이 우리 잡지에 글을 실었던가? 까지 까먹어 버린다.
그야말로 새하얗게....
그래야 내 속이 편하다.

어느 분이 독서와 공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독서와 공부는 밑빠진 시루에 물 붓는 것과 같다.
붓는 족족 빠져나가지만...
그래도 콩나물은 자란다. 쑤욱쑥....

* 딸기사마 글을 읽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퍼다 나르고...
페이퍼 하나 올리고, 글 쓰고... 흐흐


마태우스 2005-03-04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는 설거지 같은 거예요. 책 읽자마자 써야지 안그러면 쓰기 싫어집니다....비유가 적절했는지 모르겠어요^^

바람구두 2005-03-05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사람들은 별로 동의 안하나봐요. 댓글은 좀 있는데, 추천은 별로 없다는 것이...
이제 딸기사마도 늙는건가?

딸기 2005-03-0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님아... 날 놀리려고!

바람구두 2005-03-05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치 하나는...
 

어째 이렇게 단순할까.

아마도 내 뇌를 해부해보면 주름 하나 없이 빤질빤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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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5-03-04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런 인간을 보고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런거 머리 딱 갈라보면 안에 두부 들어앉아 있을꺼야. 허연 두부가 씩 웃고 있을껄?'

딸기 2005-03-04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거울 보면서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

바람구두 2005-03-05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그런가요? 흐흐.

딸기 2005-03-05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웃어요...
 
평화의 발명 - 전쟁과 국제 질서에 대한 성찰
마이클 하워드 지음, 안두환 옮김 / 전통과현대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뜻밖에도 가벼웠다. 부피가 작고 두께도 얇고. 얼렁뚱땅 만든 듯, 어딘가 엉성해보이는 편집이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이런 책이었나? 제목에서 느껴졌던 중량감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분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내 수준에선) 굉장히 빨리 읽었다.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내겐 익숙치않은 문체, 생각할 거리들, 생각의 꼬리를 붙잡지 못하고 물러서버린 나. 책을 읽고 시간이 좀 흘렀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수첩에 메모해뒀던 내용들을 다시 읽어봤다. 역시 ‘평화’는 어렵다. 이루기 어려울뿐더러 이해하기도 어려운 개념이다. ‘전쟁’보다 ‘평화’가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평화를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일까. 혹은 그 반대의 순서이거나. 전쟁영화, 전쟁광, 전쟁소설. 평화영화, 평화소설 같은 것은 없는데 ‘전쟁’은 넘쳐난다. 텍스트에서건 현실에서건. 50년 넘게 ‘휴전상태’에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나는 전쟁도 평화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인가. 전쟁은 싸우는 것, 그렇다면 싸우지 않는 것이 평화인가. 전쟁은 평화를 해치는 것인가, 평화를 위한 것인가.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누구이며, 전쟁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인가. 싸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평화롭게 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이 책의 저자는 “전쟁도 평화도 ‘사회현상’이다”라고 말한다. 유럽 중심의 역사적 고찰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핵심은 전쟁과 평화 그 어느 하나가 인간(역사)의 ‘본질’이 될 수 없으며 둘 다 특정 시기 특정 국면에 나타나는 사회현상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 같기도 하고, 새로운 시각 같기도 하다. 전쟁은 분명 사회현상이다. 그런데 평화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현상이다? 이를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평화’를 얻기 위해 애써야 할 우리 인간은 안타깝게도 문제가 많은 존재들이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또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갈등의 존재, 그리고 그것이 폭력(전쟁)으로 나타나는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비로소 평화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라는 개념이 싹튼 것도 인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어쨌든 최근의 경험(유럽 중심으로 봤을 때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갖는지 절감했고, 평화를 갈망하게 됐다(과연?). 무기의 파괴력을 극점까지 끌어올린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 덕이라고 한다면, 핵폭탄 개발자들에게 감사를 해야할 지경. 아무튼 ‘평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야말로 계몽주의 이래의 수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는 한가지만을 가르쳐주진 않는다. 역사는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르치는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구하기 힘든 과실인지도 확인시켜주었다. 평화는 ‘인간의 본성’도 아니고,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도 아님을 인식해야 이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갈등은 인간의 속성’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도 평화도, 그 어느것도 ‘인간의 본성(혹은 자연스런 상태)’이라 잘라말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기반 위에서 풍선처럼 날아가려 하는 평화를 붙잡으려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내 머리 위에도 헬륨풍선이 떠다닌다. 서구는 1,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장에서 ‘계몽주의 이래의 수확’을 거뒀다. 한국은 한국전쟁이라는 독특한 전쟁을 겪었다. 군사독재정권, 군비경쟁. 겉으로는 전쟁 혐오, 실제로는 ‘반전평화’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죄인이 되었던 속사정. ‘평화’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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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04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오키나와 사람들의 평화를 위한 투쟁(우습죠? 평화를 위한 투쟁이라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이전에 김동심 씨의 글을 통해서도 오키나와 사람들의 그 열린 마음을 접하고 존경의 눈초리로 쳐다본 적이 있어요. 어제 다시 그 다큐를 보면서 참으로 평화란 이루기 어려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마이클 하워드의 책에 제가 별을 몇 개 주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별 다섯 내지 최소한 넷은 주었을 겁니다. 그건 평화에 대한 서구의 현실적인 고민들에 대해 짧은 글에서 잘 묘파해주었다고 생각해서였어요. "평화"를 공부할 수 있다면....*앗, 추천....

딸기 2005-03-0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리뷰는 너무 허접해서 리뷰라고 보기도 힘든데 구두님이 추천을 해주네. 앗싸~
 

짜증 & 우울모드 돌입.

리뷰를 좀 열심히 써볼까 했는데....
하늘이 나의 서재질을 허락치를 않는구나. 

덕택에, 오만군데에 트집잡고 시비걸고 있음. 
당분간 무성의 & 시니컬한 리뷰만 늘어놓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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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3-0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무슨 일이신가요?

딸기 2005-03-03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 싫어하는 부서로 발령났어요 -_-

nemuko 2005-03-03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돌아오셔서 넘 바쁘신가 보다 했더니.... 무슨 부서로 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남들한테 버럭버럭 화내시고 딸기님은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괜히 혼자 속병 앓으면 주름만 늘고 일찍 늙는단 말이예요.... 그래도 여기서 딸기님 만나니 무지 반가워요^^

물만두 2005-03-03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그 부서에서 튀게 왕따를 당하셔서 밀림을 당하심이 어떨런지요. 맘 편안히 먹으시고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바람구두 2005-03-0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한 번 봅시다. 귀국 선물 받아내야지... 음, 이러면 짜증을 북돋는 악영향을? 흐흐....그래도 보고 싶으이...

딸기 2005-03-03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름과 흰머리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그래도 며칠 지나면 기분이 좀 나아지긴 할 것 같아요. 제가 좀 단순해서리...
구두님, 귀국 선물 가져오긴 했는데 짐 속에 끼어들어가서 아직도 못 찾고 있어요. 흐흐. 그래도 한번 봐야죠. ^^

비로그인 2005-03-03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 하지만 그 모드, 오래가지 않을 것 같은데요...?

울보 2005-03-03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오셔셔 간만에 뵙네요..
어쩌나 우울하시면 무슨 방법이 없을까 딸기님 기분이 좋아질 ..
님 힘내세요..
화이팅!!!!!!!!!!!!!

반딧불,, 2005-03-03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시고, 그래도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마냐 2005-03-04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 귀국선물? (에만 눈이 번쩍)...........그 심정, 너무 이해가 되서 뭐라 할 말 없슴..-_-

딸기 2005-03-04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마냐님, 이해가 굉장히 잘 되실 겁니다. 마냐님이 이해를 안해주면 누가 이해해주겠습니까. ㅠ.ㅠ

그리고 어젠 말 못했는데, 약속한대로 서영이 선물 사왔어. 준영이 선물은 못 사왔음... ^^;; 서영이 나이에 갖고놀 수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딱 내 취향대로 골라왔음.
선물이 약간 부피가 있는 것이어서 회사로 갖고올 수가 없거든요. (작은 상자인데 걍 갖고올까?) 밥 사주면 선물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