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점이 온다 -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
레이 커즈와일 지음, 김명남.장시형 옮김, 진대제 감수 / 김영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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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커즈와일은 참 재밌는 사람인 것 같다. 발명가이고, 부자이고, 불로장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데, 아이디어맨인데다가 생각이 앞서나가도 한참 앞서나간다. 저자는 “내가 너무 앞서나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변화는 이미 진행 중!”이라고 누차 주장하는데, 나는 저자의 말에 어쩐지 혹한다. 허풍선이처럼 표현을 해서 그렇지,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같은 소설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 혹은 상상돼 왔던 것들 아닌가.

저자는 유전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이 이번 세기 전반을 지배할 세 가지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며, 이는 정보혁명의 서로 다른 세가지 얼굴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넘어 인간의 지성/의식은 이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고 있다. 언어의 형태로 저장된 인간 뇌 속 정보들은 이제 컴퓨터/인공지능과 통합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전우주적인 의식의 통합’으로 나아갈 것이다! 에너지 활용기술이 높아지면 우리는 획기적으로 에너지를 적게 소비하는 정보처리과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나노기술의 발달 덕에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와 환경오염도 다 해결할 것이고 질병의 치료와 인공 신체/장기 생산도 가능해질 것이며, 분자조립자라는 작은 창조주들을 만들어서 세상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며(도라에몽을 연상케 한다;;), 완벽을 향해 고안된 ‘버전 2.0의 신체’를 갖게 될 것이며… 여튼, 우리는 지금 그러한 양질 전화의 시기, 곧 ‘특이점’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커즈와일의 주장이다.

황당무계한 얘기 같지만, 황당한 일이 어디 한 둘이었나. 유전자조작 옥수수에 악수하는 로봇, 등에 귀 달린 쥐 같은 것들도 예전엔 다 상상 못했던 것들이었다. 심장도 간도 각막도 다 이식하는 마당에, 팔다리에 의족 의수 달 수 있는 마당에, 뇌를 교체하고 머리 속에 컴퓨터를 단다 해도 안 될 것은 없지 않은가. 생물학적 지능(동물)과 비생물학적 지능(기계)의 본질적 차이 따위는 없다.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인지가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공지능을 머릿속에 이식한다면, 컴퓨터에 내 뇌 속의 기억과 정보, 곧 나의 생각과 마음과 감정을 모두 다운로드한다면, 이 육체의 나는 나인가, 저 컴퓨터는 나인가. 특이점의 시대에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책은 재미난 주제들과 소재들을 섭렵하고 있는데 좀 많이 길다. 150쪽에 이르는 주석과  부록을 빼고도 본문만 680쪽인데, 중언부언이 많아 지겨웠다.

 

   
 

역량이 비슷할 경우, 비생물학적 지능은 뇌보다 훨씬 강력하다. 인간의 패턴 인식능력과 더불어 기계의 장점인 뛰어난 기억력과 기술 공유능력, 정확도를 갖췄기 때문이다. 또 비생물학적인 지능은 언제나 최고 기량을 발휘하는데, 생물학적 인간은 결코 따라할 수 없는 능력이다.
... 2040년 중반이 되면 비생물학적 지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그건 여전히 인류 문명일 것이다. 인간은 생물학을 초월하는 것이지, 인간성을 초월하는 게 아니다. (183쪽)

 
   

 

   
  “기억의 작동 방식에 대해 한동안 이런저런 발견이 이어졌지만 주된 저장 장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화이트헤드 생의학 연구소 소장인 수전 린퀴스트의 말이다. “이 연구 덕분에 저장 장치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단백질의 프리온식 활동이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발견입니다. 프리온이 그저 자연의 별종이 아니라 근본적인 과정들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프리온은 전자 기억장치를 만드는 데도 유용하게 쓰일지 모른다. (239쪽)  
   

 

   
 

분자조립자는 다양한 모양새로 상상되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책상에 올려놓을 만한 크기의 기기를 통해 온갖 물건들을 생산해내는 조립자다. 소프트웨어만 있으면 무엇이든, 컴퓨터, 옷, 예술 작품, 조리된 음식에 이르기까지 뭐든 만들 수 있다.

... 진짜 비용은 생산품을 묘사하는 정보의 가치에 달렸다. 조립 과정을 통제하는 소프트웨어가 제일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 모든 것의 가치는, 물론 물리적 실체들도 포함하여, 전적으로 그 속에 저장된 정보의 가치에 달렸다. ... 분자 제조 과정을 통제하는 소프트웨어 자체도 광범위한 자동화 작업에 의해 설계될 것이다. 요즘의 전자 칩과 마찬가지다. (315쪽)

 
   

 

   
 

그런데 분자 제조기술의 목표는 생물학의 분자 조립 능력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생물계는 오로지 단백질을 바탕으로 한 구조만 만들 수 있어 강도나 속도에 심대한 제약이 있다. 단백질 자신은 3차원적 구조이지만 생물학 자체는 1차원적 아미노산 사슬을 3차원으로 접어주는 화합물에 의존하고 있다.

... 다이아몬드 형 물질 조립자는 외부로부터 계속 물질을 입력 받아야 한다. 이 점은 분자 규모의 로봇이 바깥 세상에서 광포하게 자기복제하는 것을 막아줄 몇 가지 안전장치 중 하나다. 생물학의 복제 로봇인 리보솜 또한 늘 자원과 연료 물질을 필요로 하는데, 우리는 소화계가 흡수한 영양분으로 그것을 공급해준다. 그런데 나노 복제자가 더욱 정교해지면, 그래서 정제되지 않은 원료 물질에서도 탄소 원자나 분자 조각들을 끄집어 쓸 수 있다면, 그때는 커다란 위기가 닥칠 것이다. 나노 복제자는 어떤 생물보다도 강하고 빠르기 때문에 더 그렇다. (319쪽)

 
   

 

   
 

뇌에 널리 퍼진 나노봇들은 기존의 생물학적 뉴런과 상호작용할 것이다. 오감으로 완전 몰입형 가상현실을 체험하게 해줄 것이고, 신경계 내부로부터 작업을 하여 감정을 유발시키기도 할 것이다. 타고난 생물학적 사고 장치와 우리가 만들어낸 비생물학적 지능이 융합됨으로써 인간의 지능은 엄청나게 확장된다.

학습은 일단 온라인을 통해 이뤄지겠으나, 뇌 자체를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게 되면 거추장스런 과정 없이 곧바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다운로드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음악과 미술에서 수학과 과학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지식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노는 것 역시 지식을 창조하는 일이 될 테니, 사실상 일과 놀이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없어진다.
지구 상의, 그리고 지구를 둘러싼 지능은 줄곧 기하급수적 확장을 거듭하여 결국에는 지능적 연산을 뒷받침할 물질과 에너지가 모자라는 순간에 다다를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은하의 에너지를 모두 소모하고 나면 인간 문명의 지능은 이론적으로 가능한 최고의 속도로 더 먼 우주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413쪽)

 
   

   
  새로운 인체를 개념적으로 설계한 것 중에 예술가이자 문화 촉진자인 나타샤 비타-모어가 고안한 프리모 포스트휴먼이라는 것이 있다. 인체의 이동성, 유연성, 내구성을 최적화하려는 설계로서, 나노봇을 이용해 AI를 구현한 인공 신피질로 광역 통신이 가능한 보조 뇌, 색깔과 질감을 바꿀 수 있는 바이오센서에 고감도 감각 기능을 갖추었으며 태양빛도 보호해주는 스마트 피부 등을 쓰는 것이다. (416쪽)  
   

 

   
  나는 2030년대나 2040년대에 좀 더 근본적인 인체의 재설계, 이른바 버전 3.0 인체가 탄생할 것이라 본다. ... 내가 버전 3.0 인체의 특징 중 하나로 꼽는 것은 말 그대로 쉽게 신체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뇌의 대부분이 비생물학적 물질로 찬다 해도 인간은 인체에 대해 미적이고 감정적인 애착을 계속 느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미감은 우리에게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단 인체가 엄청난 유연성을 획득하게 된 이상, 미적 기준 자체가 서서히 변할 것이다. (427쪽)  
   

 

   
  특이점 이후를 ‘포스트휴먼’ 시대라 부르며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인간이란 존재는 끊임없이 제 경계를 넓혀가려는 문명에 속한 존재다. 인간과 기술의 융합은 분명 급속한 변화를 가져올 사건이다. 하지만 놀라운 혜택들을 가능케 할 오르막이지, 니체의 심연에 바지게 할 내리막은 아니다. 융합 후의 인간을 새로운 ‘종’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순수한 생물학적 개념인데, 정작 변화는 생물학 자체를 초월하는 것이다. 특이점이라는 변화는 기나긴 생물학적 진화 역사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아예 생물학적 진화를 통째로 딛고 올라서는 단계인 것이다. (519쪽)  
   

 

   
 

나는 비생물학적 개체에도 의식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 본다. 비생물학적 개체들도 인간이 현재 지니고 있는 온갖 미묘한 의식의 단서들, 감정이나 기타 주관적 체험과 결부되어 있는 듯한 현상들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 나는 패턴에 바탕을 둔 철학을 믿는다. 나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영속하는 패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진화하는 패턴이고, 스스로의 패턴 진화 과정에서 영향력을 갖는다. 지식 또한 하나의 패턴이다. 정보와는 다르다. (536쪽)

 
   

 

   
  프라이타스는 나노봇이 일으킬 수 있는 여러 끔찍한 상황들을 상상해 보았다. ‘그레이 플랑크톤’ 시나리오는 해로운 나노봇들이 바다 바닥에 메탄 형태로 저장된 탄소와 이산화탄소 형태로 녹아 있는 탄소를 해치우는 것이다. 바다에 있는 탄소 자원의 양은 지구 생물자원 탄소량의 열 배나 된다. ‘그레이 먼지’ 시나리오는 자기 복제하는 나노봇들이 공기 중의 먼지를 재료 삼고 태양빛을 동력 삼아 번지는 것이다. ‘그레이 이끼’ 시나리오는 바위에 있는 탄소 등의 물질이 점령되는 상황이다. (558쪽)  
   

 

   
  미래 기술의 영향을 숙고하는 사람들은 종종 세 가지 생각의 단계를 겪는다. 첫째는 오래된 골칫거리들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데서 오는 경외와 놀라움, 둘째는 새로운 기술에 수반한 심각한 위험들에 대한 두려움, 마지막은 우리가 책임감 있게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위험을 적절히 관리하며 편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조심스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라는 깨달음이다. (5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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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특이점이 온다 -레이 커즈와일
    from 김재호의 디지털보단 아날로그 2009-06-21 21:38 
    특이점이 온다 - 레이 커즈와일 지음, 김명남.장시형 옮김, 진대제 감수/김영사 회사에 과학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이 책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앞으로 변할 미래 세계의 모습을 담은 책인데, 그리 멀지 않은 미래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변화를 예언하고 있어서 나는 사이비같은 이야기라 생각하고 한귀로 흘려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진대제의 열정을 경영하라라는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고는, 그가 쓴 다른 책이 없을까 하고 찾아봤는데 이 책이 떡하니 나오..
 
 
 
자유의 미래 - 오늘의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파리드 자카리아 지음, 나상원 이규정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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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동안 읽은 책들 중에서, 다시 생각해봐도 아마도 이 책이 가장 수작이 아니었나 싶다. 파리드 자카리아는 포린어페어스 편집장을 거쳐 뉴스위크 편집장을 하고 있는, 인도 무슬림 이민자 가정 출신의 학자 겸 저널리스트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 미국 최초의 ‘무슬림 국무장관’이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미국에선 알아주는 똑똑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국내에선 ‘벌써 다 유명해진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더더욱 유명해지지 못하고 있는 느낌.

자카리아의 이 책이 한번 나왔다가 절판이 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영어본으로 읽었는데, 문장과 내용이 모두 명쾌해서 정말 재미있었다. 중후하고 명민하되 문법은 어렵지 않아 생각보단 쉽게 읽혔다. 인도네시아에 출장 가서 아침저녁 바깥 출입을 못해 빈둥거리는 시간들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 이상의 오락거리가 돼준 것이 이 책이었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선 민주주의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너무 넘쳐나서 문제라는 것, 반대로 제3세계의 경우 ‘경제 수준에 맞지 않는 민주주의’가 문제라는 것, 민주주의와 GDP의 관계 등등, 제3세계 가난한 나라들을 방문할 때마다 머리 속을 맴돌았던 물음표들이 느낌표로 바뀌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요는, ‘넘쳐나는 민주주의’ ‘과도한 민주주의’의 모순이 왜 생겨나느냐 하면,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이해가 종종 잘못돼 있기 때문이다. 문맹들 잔뜩 모아 투표소에 집어만 넣으면 민주주의가 완성되느냐, 무조건 공개행정 다수결만 하면 유권자들에게 진실로 이익이 되는 행정이 이뤄지느냐 하는 얘기. 읽은지 오래돼서 머리 속에 정리가 잘 안 되는데,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을 듯. 한글판으로 다시 나와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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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1-04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엔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습니다.^^

딸기 2008-01-05 00:00   좋아요 0 | URL
절 놀리시는거죠! ㅋㅋ

로쟈 2008-01-05 09:37   좋아요 0 | URL
제 말씀은 지명도 있는 책이라는.^^;

딸기 2008-01-05 10:28   좋아요 0 | URL
푸하하 그런 뜻이었군요 ^^

2008-01-08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8-01-08 07:22   좋아요 0 | URL
오옷 땡큐땡큐... 당장 저기로 가봐야겠네요.

jsa7723 2013-02-1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구할 곳 없을까요
 
초파리의 기억 - 초파리 연구를 통해 추적한 행동유전학의 비밀
조너던 와이너 지음, 조경희 옮김, 최재천 감수 / 이끌리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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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의 부리>를 쓴 조너던 와이너의 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샀다. 좀 허풍 섞어 말하자면 지금껏 태어나 읽은 책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핀치>다. 그러니까 조너던 와이너의 이름은 나에겐 ‘교주’의 이름과 같은 것이니, 신도는 교주를 따를 수밖에.

이 책 역시 훌륭하다. 분량이나 밀도 면에서 <핀치>보다는 좀 모자란다 싶지만, 별 다섯 개 짜리인 것은 분명하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면서 묵직해지는 느낌. 조너던 와이너 특유의 글쓰기 비법은 대체 뭐길래, 과학책이 이렇게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일까. <초파리의 기억>이라는 한글판 타이틀은, <시간, 사랑, 기억>이라는 원제의 감수성을 영 못 쫓아간다.

 

책은 미국의 생물학자 시모어 벤저라는 사람과 그의 선학들, 후학들이 인간의 행동이라는 비밀의 문을 유전자라는 열쇠로 열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핀치>가 갈라파고스의 과학자 부부와 찰스 다윈, 그리고 핀치라는 새들을 3중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진화생물학의 과거 현재 미래를 펼쳐보이고 있다면, 이 책 <초파리>는 벤저와 동료 과학자들, 그리고 초파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핀치>의 장구한 세월은 이 책에선 좀 짧은, 20세기로 줄어들었다. 갈라파고스라는 천혜의 배경은 칼텍과 MIT 등 미국 유수 대학들의 구석진 실험실로 바뀌었다. 전작의 주제는 진화의 유구한 역사와 ‘지금 이 시각에도 진행되는 진화’라는 두 가지 축이었다. <초파리>에서 주제는 좀더 세분화해 ‘행동과 유전자의 관계’로 좁아진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라는 것을 세상에 꺼내 보인 뒤 유전자는 ‘인간의 설계도’라는 것이 정설로 돼 있다. 하지만 사실 유전자의 이런 ‘결정력’이 인정받기까지는 마치 전쟁과도 같은, 과학자들 간의 치열한 공방이 있었다. 우생학과 나치즘 논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논쟁은 아마도 ‘본성이냐 양육이냐’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유전자 안에 있다? 없다? 인간은 어디까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고 어디까지 자유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인간이란 존재의 ‘설계자’는 과연 누구인가.

벤저는 이 논쟁에서 ‘본성파(派)’의 손에 실탄을 안겨 준 공헌자다. 시간 감각 없이 게으른 초파리, 남들 다 빛을 따라 가는데 홀로 못 쫓아가는 굼뜬 초파리, 유독 머리가 좋아 학습을 잘 하는 초파리, 짝꿍을 만나도 구애를 할줄 모르는 멍청한 초파리... 이 작은 곤충의 돌연변이들을 연구하면서 벤저는 초파리의 행동을 유전자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였다. 행동은 유전된다! 행동은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아빠 옆에 누워 똑같은 포즈로 다리 꼬고 누운 내 딸, 아버지와 똑 닮은 모습으로 걷는 우리 오빠. 행동의 어떤 패턴이 유전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약간의 관찰로도 알 수 있지만 사실 “행동은 유전된다”고 말할 수 있기까지 서양 과학사에선 격렬한 논란이 있었다. 과학사에서 뿐이랴. 행동과 유전, 재능과 유전, 지능과 유전. 이렇게 확장해서 나가면 결국 우리는 ‘현대사의 원죄’ 격인 우생학과 홀로코스트,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서양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그런 고통의 역사에서 좀 다른 길로 비껴왔기 때문에 실감이 잘 나진 않지만 지금까지도 유전자와 행동, 즉 ‘본성’의 문제는 서양 학계에서는 아주 민감한 사안이다.

Seymour Benzer in his Lab.
The test tubes most likely contain both fruit flies and food for them.



시모어 벤저를 전면에 내세우고는 있지만 사실 이 책의 주인공은 벤저를 중심으로 그 앞뒤에 위치한 여러 학자들이다. 초파리의 아버지 허버트 모건과 사회주의 우생학에 경도됐던 허먼 멀러, 유전자 지도의 창시자 앨프레드 스터티번트, 대륙을 건너뛰며 원자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전향한 막스 델브뤼크, ‘사회생물학’으로 ‘본성-양육 논쟁’의 포문을 열었던 이슈메이커 에드워드 윌슨, 그에 반대하며 ‘좌파적 진화론’을 펼친 리처드 르원틴,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 머리는 좋았지만 성격이 지랄 같고 돈독 오른 제임스 왓슨 등등  현대 생물학의 쟁쟁한 거장들이 이 책에 모두 등장한다. 리처드 파인만, 폴 디랙 같은 유명한 물리학자들도 조연으로 간간이 얼굴을 내비친다. 업적을 줄줄이 나열하는 식의 소개가 아니라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된 생생한 일화들이다 보니 저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앞머리에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의 추천사가 들어있다. 이 책에 최교수의 추천사가 없으면 안 되지. 최교수는 <핀치>에도 추천사를 썼지만, 특히 이 책의 내용을 읽은 뒤엔 추천사를 안 쓰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도킨스와 굴드, 윌슨과 르원틴을 편갈라 놓고 보자면 이 책의 도킨스 편, 윌슨 편이다. 르원틴 식의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는 이론은 선험적 좌파론에 불과할 뿐, 과학적 진실과는 맞지 않는다. 본성은 있다! 유전자는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행동은 유전된다!
본성-양육 논쟁 외에 이 책의 또다른 숨겨진 주제 중 하나는 분자생물학과 동물행동학의 갈등이 될 것이다. 밖에 나가 주구장창 개미나 들여다보는 과학자들과, 실험실에서 DNA를 연구하는 ‘첨단’ 분자생물학자들. 윌슨은 전자이고 왓슨은 후자다. 오만방자한 왓슨이 하버드 교수 재임용 탈락한 뒤 노골적으로 윌슨을 거론하며 화풀이를 해댔단 얘기를 최교수에게서 들은 적 있다. 그리하여 개미들의 아버지인 윌슨은 본성-양육 논쟁에선 르원틴의 맞수였고 동물행동학과 분자생물학의 싸움 아닌 싸움에선 동물행동학의 대변자였다.
이 책의 주인공은 윌슨이 아닌 시모어 벤저이지만, 벤저는 ‘본성파’이고 또한 분자생물학에서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동물행동학으로 향해간 사람이다. 그러니 윌슨의 제자인 최교수가 이 책에 써놓은 앞글은 학계 전문가의 의례적인 칭찬이 아닌 구구절절 마음이 담긴 추천사가 됐을 수밖에.

 

책이 주는 재미는 이렇게 여러 가지다. 유전자와 행동의 관계, 비밀의 문을 조금씩 열어가는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첫 번째 재미. 두 번째는 스타 과학자들의 캐릭터가 그대로 드러나는 일화들을 읽는 재미. 세 번째는 최교수가 추천서에 쓴 대로 ‘공부하고 있는 줄 모르면서 배우는 재미’, 즉 진화학과 동물행동학, 분자생물학에 대해 나도 모르게 배우는 재미. 인류에게 화두를 던져놓고 초연히 자신의 길을 가는 노과학자 벤저의 모습은, 네 번째 재미이자 감동으로 남는다.

사족을 붙이자면, 마틴 브룩스의 <초파리>라는 책도 국내에 번역돼 있는데 유전학-진화생물학 책들을 통해 앞서 주워섬긴 과학자들 이름에 익숙해지지 않은 독자라면 그 책을 먼저 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와이너의 <초파리>보다 덜 문학적이지만 버금가게 재미있고, 더 박진감 넘친다는 장점이 있다.


   
  양자물리학자인 파인먼은 벤저의 실험실에 찾아가 자신의 아들에게 초파리의 뇌를 보여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벤저는 아이를 현미경 앞에 앉히고 “이 뇌 속에는 트랜지스터가 10만개나 숨어 있단다” 하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 위로 그 아버지에게 고갯짓으로 동의를 구했다. 물리학자 대 물리학자로서 말이다.
그러나 파인먼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아니지. 똑바로 말해주게. 저건 트랜지스터가 아니라 신경세포야.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말게.” 벤저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파인먼이 옳았다. 신경세포는 실제로 트랜지스터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고 유전자에서 신경세포로, 그리고 신경세포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전자에서 라디오나 컴퓨터로 이어지는 길보다 길고 비밀스럽다.
 
   

 

   
  슈뢰딩거는 ‘델브뤼크의 모형’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주제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썼다. 사실 델브뤼크의 연구는 그때까지 물리학과 생물학 사이에 존재하던 벽과 전쟁 때문에 몇 십 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한 상태였고, 슈뢰딩거 역시 델브뤼크의 파지 연구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도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유전자 문제를 ‘풀 수 있는 문제’로 각인시킴으로써 당대의 젊은 과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 중에 광산으로 피신해 있었던 젊은 물리학자 프랜시스 크릭은 영국 해군 본부의 요새로 알려진 창문 없는 방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생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시카고대학교에 재학중이던 제임스 듀이 왓슨도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는 조류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는 순간부터 유전자의 비밀을 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훗날 이야기했다. ... 에드워드 윌슨은 앨라배마대학교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왓슨이나 크릭, 벤저와 똑같은 감동을 받았다. 윌슨과 왓슨 두 사람은 과학이 추구하는 목표가 행동원자의 탐구라는 믿음에 남은 생애를 바치게 된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아직 어렸던 왓슨은 내가 그때까지 살면서 만나본 가장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고 윌슨은 회상한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유전자는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들의 조상이 갖고 있는 기억이다. 우리는 세 가지 정보 없이는 손가락 하나도 들어올릴 수 없다. 세 가지 정보란 현재 우리의 감각이 보내주는 정보, 과거에 우리의 감각이 보내주었던 정보, 그리고 지구에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우리의 조상들이 습득한 정보, 즉 유전자로 대표되는 정보를 말한다. 진화는 학습이다. 개체가 뇌에 학습을 저장하고 사회가 책에 학습을 저장하는 것처럼 종(種)은 염색체에 학습을 저장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학습하고 기억하는 능력이 곧 기억이다. 그것은 생명이 시작된 순간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시간 감각만큼이나 오래되고 번식 본능만큼이나 오래되었을 발견의 기억이다.

 

... 시간, 사랑, 기억은 경험의 세 가지 토대이며 행동의 금자탑을 지지하는 세 가지 초석이다. 벤저와 그의 연구원들은 초파리실에서 연구하던 초기에 벌써 이 세 가지를 모두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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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숙명의 숙명론: 최재천 교수에 대한 나의 애증의 궤적에 관하여
    from 급진적 생물학자 Radical Biologist 2008-09-16 18:14 
    진취적인 지식인이 숙명론에 빠져 있다면 자가당착일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하는 진보의 믿음을 스스로 저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에겐 그가 처한 상황이 일종의 제약일 수는 있을 지언정 장벽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화론자들 중 정치적으로 더욱 진보적이었던 굴드와 르원틴이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하게 만든 원인이었을런지도 모른다. 대학시절 교회에 다닐 때 만났던 한 맑시스트는 그가 그럼에도 불..
 
 
로쟈 2007-11-19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도'의 충정이 묻어나는 리뷰군요.^^

딸기 2007-11-19 16:49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

이네파벨 2007-11-19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안읽어볼수 없겠네요!!! 딸기님 서평만으로 벌써 저도 전도될것 같습니다. 그 유명한 핀치도 아직 안읽어봤는데...그 책 절판은 안됐나 빨리 찾아보고 주문넣어야겠네욤~

딸기 2007-11-19 16:50   좋아요 0 | URL
아니 이네파벨님이 '핀치'를 안 읽어보셨다니, 그럴수가요! 빨랑 사서 읽어보세요 ^^

마노아 2007-11-20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읽던 '퀴즈쇼'에서 핀치의 부리가 나왔는데 찌찌뽕이에요. 저도 보관함에 담아가요^^

딸기 2007-11-20 17:29   좋아요 0 | URL
핀치의 부리, 정말 너무 좋지! 이 책은, 읽다 보면 저절로 조금씩~ 조금씩 감동이 오는 책. :)

icaru 2007-11-21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성과 양육...에 대한 딸기 님의 리뷰(만, 책이 아니어서 심히 저 자신에게 유감이죠...)를 오소독소하게 읽은 일이 어그제인데.. 이 책 그것과 같은 꽈로군요~ 쩝...

딸기 2007-11-21 07:09   좋아요 0 | URL
ㅋㅋ 사실 과학책이, '문턱' 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아요.
그냥 저런것도 있구나, 그러셔도 되죠 뭐. 저는 원래 일 때문에 읽기 시작한 거예요. :)

군자란 2008-01-04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가을부터 우연히 딸기님이 권해준 도킨스,굴드,매트 리들리, 조너선 와이드,스티븐 핑거책들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지금 읽고 읽는것은 로버트 라이시의 도덕적 동물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제 성격상 한번 끌리면 끝을 보는 경향이 있는데 혹 데이비드 버스의 책들은 님의 목록에 없는데 혹 취향이 달라서 그런지...오늘 욕망의 진화를 구입할까 생각하다가 진화심리학관점에서 남녀간의 성, 지위, 행동들을 해석하는 것은 도덕적 동물 과 별차이는 없을 것 같은데 웬지 망설여 집니다. 같은 이야기를 또 듣고 싶지는 않는데.....

딸기 2008-01-04 14:10   좋아요 0 | URL
저는 이상하게도 도덕, 정신, 의식, 심리 같은 것들에 관심이 적은 편이예요.
데이비드 버스의 책들은 전혀 접해보지 않았는데, 한번 찾아볼께요. :)
 
세계는 평평하다 - 21세기 세계 흐름에 대한 통찰, 증보판
토머스 L. 프리드만 지음, 이윤섭.김상철.최정임 옮김 / 창해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부분은 지겹다 싶고 또 어떤 부분은 제기랄... 이러면서도 프리드먼의 새 책이 나오면 읽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이 사람의 글을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이 사람의 글 속에 통찰력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새 프리드먼의 책들이 번역돼 나오면 웬만한 것은 다 읽어보았고, 더불어 로버트 카플란도 가능하면 읽으려고 애쓰는 중이다. 지난 여름엔 벼르고 벼르던 파리드 자카리아의 책도 간신히 한권 읽었고, 지금은 니알 퍼거슨의 책을 손에 잡고 있다.

제국주의를 연구한 영국 학자인 퍼거슨은 우선 논외로 하자. 프리드먼과 카플란, 자카리아는 모두 미국에서 통칭 국제문제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이 정도만 공통점일 뿐, 이 들의 글은 참 많이 다르면서, 참 많이 비교가 된다.

카플란은 냉혹한 사람이다. 못됐지만 분명 정곡을 찌르는 부분이 있다. 왜냐? 못됐기 때문에... ‘막말’을 해도 되니까... 늘 그렇듯, 못된 소리는 못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노빠를 미워하는 자들은 전여옥을 좋아한다). 못된 사람들로 하여금 “거봐, 이렇게 여러곳 돌아다닌 사람이 무슬림들은 한심하다고 하잖아, 아프리카 깜둥이들은 미련하다고 하잖아, 미국이 다 쥐고 흔들어야 세상이 돌아간다고 하잖아” 이렇게 말한 ‘근거’라는 걸 만들어주는 것이 카플란 같은 사람들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플란을 읽는 이유는? 잘난 사람들, 착한 사람들이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 곳들을 돌아다니며 ‘미련하고 한심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카플란이기 때문이다. 꼴 보기 싫지만, 그래도 이 자가 하는 말들엔 ‘좌파’들이 애써 귀 닫는 일말의 진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카플란의 통찰력이기 때문에.

자카리아도 마찬가지다. 카플란같이 못되진 않았지만 말투는 냉랭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자카리아의 시각은, 외교를 바라보는 카플란의 시각과 일맥상통. 그러나 자카리아는 카플란에 대면 훨씬 공정하다. 민주주의가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다! 제3세계를 놓고 이렇게 말하면 개발독재주의자의 뻘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미국의 ‘과도한 민주주의’에 대한 자카리아의 지적을 잘 들여다보면 새겨들을 구석이 없잖아 많이 있다.

그럼 프리드먼은? 프리드먼은 원래 중동 전문가인데,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때부터 세계화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경도와 태도’에서는 9.11 이후 미국 맛 간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또라이 끼를 드러내 보이더니, ‘세계는 평평하다’ 부분에 이르러서는 다시 ‘렉서스~’ 논조로 돌아섰다.

난 항상 불만이었던 것이, 프리드먼은 카플란보다는 착한 것 같은데 왜 못돼먹은 카플란만큼의 통찰력이 안 보이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프리드먼이 유명하기도 훨씬 더 유명하고, 책도 훨씬 더 많이 팔았을 텐데 말이다.

이유는 어쩌면 단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프리드먼은 유대계이고, 정상적인, 조지 W 부시 식의 일자무식 외교와는 딱 선을 긋는, 민주당 성향의 저널리스트다. 프리드먼은 유대계 언론 뉴욕타임스의 유대계 간판 필자이고, 중동이나 이슬람 사회에 대한 이해 정도가 누구보다도 높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카플란처럼 ‘무식하게 까대는’ 짓은 안 하고, 못 한다. 자카리아는 학구적이고 카플란은 ‘끝까지 함 가보는’ 그런 스타일인 반면에 프리드먼은 적당히 학구적, 적당한데서 끝내는, 어딘가 나이브하면서 전형적으로 ‘저널리스틱한’ 그런 스타일로 보였다는 얘기다.

이 책에서 프리드먼은 ‘렉서스~’ 보다 조금 더 나아간다. 영화 ‘트랜스포머’에서, 쿠웨이트의 미군들은 로봇군단에게 개박살 난다. 미군들은 본국으로 SOS 전화를 때린다. 전화는 누가 받나? 인도의 전화교환수들이 받는다. 글로벌 아웃소싱의 한 단면에 대한 절묘하고도 멋지구리한 풍자! 프리드먼은 ‘트랜스포머’보다는 쫌 덜 극적으로, 쫌 덜 재미있게, 그러나 세계화에 대한 다른 책자들보다는 그래도 생생하게, 최소한 생생한 척 하면서, 유명한 사람들(주로 세계적인 기업 총수들)과 ‘평범한 이웃들’의 말을 조잘조잘 섞어가면서 글로벌 경제의 속살들을 헤짚는다.
이 책의 타이틀을 놓고서 “세계가 뭐가 평평해, 불평등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비판하는 건 좀 어불성설이다. 이 책은 “세상의 모순 따윈 이제 없어졌다”고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평평해져 가는 세계’의 일선 주자들을 들여다보고, 그 뒤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미리 짚어보기 위한 것이니깐.

뒷부분 테러 얘기 나올 땐 지겨워서 환장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세계화의 구체적인 지점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 읽을만했다. 이름 붙이기, 즉 ‘평평하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식의 브랜드 짓기가 좀 지나치다 싶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괜찮은 책이다.

사실 프리드먼은 ‘미국적인, 너무나도 미국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또한 미국의 주류보다 앞서나가는 측면이 있다. 이전 책들 볼 때엔 사실 “이렇게 세계를 누비면서 어째 이렇게 꿰뚫어 찌르는게 없나” 싶어 짜증이 나기도 했었는데, ‘세계는 평평하다’에 이르면 프리드먼도 아주 ‘길이 나서’ 통찰력 비슷한 것을 많이 보여준다. ‘세계화 시대 자기계발법’ 이런 것에 관심 있는 사람도, 이 책에서 힌트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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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7-11-1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을 보면 딸기님이 너무나 존경스러워요.....

딸기 2007-11-12 17:46   좋아요 0 | URL
한껏 유식한 척, 잘난척한 보람이 있군요 ^o^

저는 이네파벨님이 존경스러워요. 우리 서로 존경하고 살아요 ♡
 
포스트휴먼과의 만남 - Post-Human 1세대를 위한 안내서
도미니크 바뱅 지음, 양영란 옮김 / 궁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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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이란 개념도 요즘 유행하는 모양이다. 인간 그 다음의 인간.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랜 세월의 진화를 거쳐 형성된 것이었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우리 머릿속에 뿌리를 내린 인간의 속성들을 뛰어넘는 ‘갑작스런 진화’의 결과물은 분명 기존의 상상과는 다른 존재일 것이다. 그 변화가 과연 얼마나 갑작스런 것일지는 알 수 없지만.

엄지손가락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엄지족 세대와 기성세대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양질 전화에 있으니, 양적인 변화들이 쌓이고 쌓여 드디어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인간이라 부르기 힘든 전혀 다른 인간이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다만 그 양적인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뿐이지, 변화는 점진적으로 오기 때문에(어느날 갑자기 완벽한 인공지능 로봇이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새로운 인간’이 어느날 갑자기 깨벗고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리’ 눈으로 보면, 양질전화를 이룬 미래의 인간은 우리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새로운 인간으로 보일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같은 ‘오래된 눈’을 가진 사람들에겐 전혀 새로운 종류로 보일, 그렇지만 점진적 변화를 통해 우리에게서 출발해서 비로소 나타날 ‘다음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내 보인다. (다음 세대의 인간을 저자는 탈(脫)인간이라 이름붙였지만 그들이라고 인간이 아닐쏘냐. 포스트휴먼은 그저 21세기 초반을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나온 말이니 구애받을 필요는 없겠다.)

아이러니하게도 포스트휴먼의 탄생을 전망한 이 책의 첫 번째 장은 ‘죽음’을 다룬다. 어쩌면 미래사회 인간들의 핵심적인 특징은 지금의 인류보다 훨씬 오래산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은 모든 현생인류의 목적이자 미래 인류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죽음이라는 시간표를 늦추면서 인류는 진화의 궁극을 향해간다? 죽음을 넘어서는 방법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2장 ‘포스트 바디’가 그 해법을 보여준다. 게놈시대 이야기는 이만 생략.

 

이어지는 장들은 ‘포스트 에고’, ‘포스트 릴레이션’, ‘포스트 리얼리티’를 다룬다. 낙관과 비관을 넘나든다는 점에서 공상과학소설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미래의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국 이런 종류의 책들이 다룰 수 있는 최대한도는 ‘트렌드’가 될 것인데, 이 책은 인간 변화의 트렌드를 전하면서 길지 않은 분량 속에 되도록 많은 이슈를 담았다. 포스트휴먼들에겐 세대 사이의 관계가 후원이나 양육이 아닌 경쟁이 될 것이라든가, 고도의 물질문명에서 배태된 포스트휴먼 시대에 기계 숭배는 오히려 끝나고 생명의 복잡성이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라는 예측, 포스트휴먼적 ‘극장쇼’ 관점에서 바라본 9·11 테러의 의미 등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저자는 미래학자인데, 프랑스식 유머가 간간이 배어있어서 책 읽는데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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