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서 고마워 - 가속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낙관주의자의 안내서
토머스 L. 프리드먼 지음, 장경덕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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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읽은 토머스 프리드먼의 책. 내가 오랜만에 읽은 게 아니고 이 아저씨가 오랜만에 내놓은 책이겠지, 아마도. 프리드먼의 책은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를 비롯해 경도와 태도렉서스와 올리브나무뜨겁고 평평한~세계는 평평하다 등등 전부 읽었다. 만델바움과 함께 낸 <미국쇠망론> 하나만 빼고.


프리드먼의 책을 찾아 읽기는 하지만 언제나 별로라고 생각했다. 말투가 싫어... 그런데 이번 책은 좀 달랐다. 일단 재미는 있었다. 너무나 빨리 변해가는 세계, 너무나 걱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주의를 견지하면서 우리 모두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프리드먼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라지는 세상의 메커니즘을 대기계(기술의 변화), 대자연(기후변화), 그리고 무어의 법칙(변화의 속도를 곱배기로 만드는)같은 개념들로 설명한다. 프리드먼식 개념붙이기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다니며 수퍼노바(클라우드를 프리드먼은 이렇게 부른다)의 혁신을 이끄는 에드워드 텔러의 손자를 비롯해, 실리콘밸리와 인도 등등 여러 곳의 격변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너무 낙관적이라며 트집잡을 수도 있고, '힘센 나라 가진 자들의 논리에만 충실한 것 아니냐, 지금 지구가 개판인데'라고 반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프리드먼이 그 정도 모를 리는 없을 것같고... 이 혼란 속에 최대한 많은 이들이 적응하고 변해야 하며, 그 변화에 맞춰 개인은 스스로 달라지고 기업은 추동하고 정부는 도와야 한다는 조언은 누가 뭐라든 맞는 얘기다.


오히려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젠 환갑이 지나버린 이 저널리스트의 목소리가 변해가는 과정이랄까. 베이루트~는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나 중동에서 전쟁을 취재한 열정적인 기자의 기록이었다. 그 뒤에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렉서스~'라든가 '평평' 같은 책들은 세계를 넘나들며 변화의 현장을 소개하면서 컨셉트를 잘 잡았고 브랜딩도 잘 했지만... 넘나 미국적이고 넘나 주류적인 시각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기분이 나빠지는 그런 책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책에선 어쩐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것같은 느낌이 난다. 책은 미국 대선이 한창일 때, 하지만 결과가 결정되기 전에 나왔다. 이번 책에서 프리드먼은 "미국은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 미국이 나서야 한다, 여전히 미국은 해줘야 할 역할이 많으며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거듭해서 말한다. 미국의 오만함을 체현해보이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트럼프식 미국우선주의, 거기 동조해 결국 트럼프를 미국 대통령으로 만들어버린 미국인들의 정서, 점점 배타적으로 안팎의 이방인들을 몰아내려는 미국 사회의 흐름을 경계하기 위해 열변을 토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트럼프의 당선이었고, 세계는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선동에 휘둘리고 있으니. 미국 대선이 끝나고 트럼프가 하는 짓들, 거기 박수치며 세상을 거꾸로 살려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이 책을 읽으니 참 허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허무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지. 이대로 흘러가게 둬서도 안 되고. 유대인들이 여전히 차별받고 집 구하기도 힘들던 시절, 자기 고향 세인트루이스파크는 어떻게 유대인들을 끌어안는 곳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저자는 이 책의 뒷부분 4분의 1 정도를 할애했다. 


암튼, 이모저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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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1-04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야 놀러가자님 무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딸기 2018-02-26 16:49   좋아요 0 | URL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 에메 세제르 선집 4
에메 세제르.프랑수아즈 베르제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그린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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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동안 시장직을 수행한 그는 나를 오래된 시청 건물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맞았다. 처음 만난 이 사람은 아주 정중했다. 또한 주의 깊은 반면 데면데면하기도 했고, 소심한 반면 친근하기도 했으며, 매사에 관심을 가진 반면 의심이 많기도 했다. 자기와의 대담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예전히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믿고 싶지 않아 했다. 또한 런던에 있는 한 대학에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그의 저작들, 특히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과 <귀향 수첩>을 연구하고 인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

 

프랑수아즈 베르제라는 포스트식민주의 학자가 에메 세제르를 만났다.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변광배·김용석 옮김. 그린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담은 대담집이다. 


책의 분량은 매우 짧은 데다가, 뒷부분 절반은 베르제가 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정작 세제르의 목소리는 그리 많이 담겨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울림은 얕지 않다. 세제르는 카리브해의 프랑스 영토(해외도)인 마르티니크 사람이자 ‘프랑스 옛 식민지의 흑인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탈식민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정치가다. 인터뷰를 한 베르제는 역시 프랑스의 해외도인 레위니옹 출신이다. 이 인터뷰 자체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명예·인정·영광 등은 세제르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이런 것들을 무시하는 듯 보였다. 그는 더 영광스러운 많은 제안을 물리친 채 마르티니크에 사는 것을 선택했다. 여러 번에 걸쳐 내게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그는 자기가 태어난 섬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가 항상 프랑스령 앙티이(카리브의 프랑스 옛 식민지 섬들)에 대해 부드러운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앙티이를 역사적인 면에서 상기하는 것, 그것은 앙티이와 끝장을 보려는 내 의지이다. 그러니까 역사의 가장자리에서 기아·기근·억압이라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막장 상태를 끝장내려는 내 의지이다.”

이와 같은 그의 단언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하니는 열대 섬에 대한 낭만주의의 거부이다. 다른 하나는 <귀향 수첩>의 도입부에서 볼 수 있는 그 유명한 구절이다. “굶주리고 천연두 딱지가 닥지닥지 내려앉은, 술에 절은 앙티이인들. 돌다 돌다 떠돌다 이 부두의 진창에, 이 도시의 속진에 좌초한, 속절없이 가라앉은 앙티이인들.” 또 다른 하나는 “사랑과 도덕의 질서정연한 장소”인 마르티니크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그는 마르티니크인들에게 “공감”을 가지고 있다. 
(8쪽)

 

이제는 ‘탈식민’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유행 지난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세제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더군다나 2017년의 한국에서. 이 대담집은 에메 세제르 선집으로 묶여나온 네 번째 책이다. 일본의 프랑스문학자이자 탈식민주의 학자인 니시가와 나가오의 책에서도 세제르와의 짧은 대화를 엿본 적 있는데, 베르제의 이 책에서 느껴지는 정조는 뭐랄까, ‘회한’에 가깝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과 열정을 놓칠 수 없는 그런 회한.

 

세제르와 같은 피부색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 까닭일까. 베르제가 이 노인에게 집요하게 파묻는 것은 ‘흑인’ 혹은 ‘흑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이다.

 

널리 퍼져 있는 주장들은 식민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세제르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부정하고 있고, 그 몫은 오히려 프란츠 파농, 파트리크 샤무아조, 에두아르 글리상에게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보기에 ‘흑인’에 대한 세제르의 접근방식은 파농의 그것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흑인 문제’에 훨씬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세제르에게 ‘흑인이라는 것’은 대륙횡단적 역사를, 특히 전 세계에서 이루어진 디아스포라의 원천인 아프리카를 가리킨다. ‘흑인이라는 것’은 잉여의 무엇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노예무역과 노예제도의 역사에 대한 기억과 기술이 공적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는 동안, 노예제도가 정착되었던 식민지 출신이자 프랑스의 공공 교육을 받았던 한 사람의 저작을 다시 읽는 작업은 매우 중요해 보였다. 여전히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섬에서 태어났고, 프랑스 엘리트의 산실인 고등사범학교 학생이었던 한 사람, 그것도 193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한 사람의 저작을 말이다. 그의 저작들에는 그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중요성이 잘 나타나 있다. 투생 루베르튀르에 대한 그의 에세이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극작품, 연설, 그리고 아이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러 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14쪽)

 

평생을 고뇌와, 싸움과, 때로는 비난과 맞서 싸워온 세제르에게 마르티니크인이라는 것의 의미는 절절하고, 복합적이다. 그는 마르티니크를 떠나던 어린 시절의 기쁨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특히 상고르와의 만남을 회고한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세제르와 함께 프랑스 ‘식민지 지식인’을 대표하는 상고르 아닌가.

 

나는 아주 기뻤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군. 마르티니크는 지긋지긋했어. 난 이제 꽃을 피울 거야!’ 나는 그 길로 고등사범학교 준비 1학년 반에 등록했습니다.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한 남자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중간 키, 아니 작은 키에 회색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곧장 나는 그가 이 학교 기숙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허리 끝에 빈 잉크병이 달린 줄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녕, 이름이 뭐야? 어디에서 왔어? 무엇을 하니?” “난 에메 세제르야. 마르티니크에서 왔고, 고등사범학교 준비 1학년반에 등록했어. 넌?” “난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야. 세네갈 출신이고, 준비 2학년 반이야.” 그러고 나서 그는나와 가볍게 포옹했습니다. “반가워, 반갑다.” 이 일이 루이르그랑 고등학교에 도착한 바로 그날에 일어났어요! 그 이후 준비 2학년 반에 있던 그와 1학년 반에 있던 나는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만났고 토론했습니다. 그는 조르주 퐁피두와 준비 2학년 반에 있었고, 아주 친했습니다. 
상고르와 나는 아프리카, 식민주의, 문명에 대해 끝없이 토론했습니다. 그는 그리스와 라틴 문화를 화제로 삼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헬레니스트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함께 성장했던 것이고,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첫번째 질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난 누구지? 우린 누구지? 백인들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이지?” 중요한 질문들이었죠. 두번째 질문은 도덕적인 것이었습니다. “난 뭘 해야 하지?” 세번째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것이었습니다. “뭘 희망할 수 있을까?” 이 세 질문은 그 당시 우리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전쟁 후에 파리에 다시 갔을 때 나는 예복을 입은 키 작은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상고르는 세네갈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나는 마르티니크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던 겁니다. 우리는 다시 포옹을 나누었습니다. 성격과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우정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인이었고, 니는 앙티이인이었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고, 정치적으로는 인민공화국운동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거나 ‘공산주의에 가까워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언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했고, 성징하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많이 주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24-25쪽)

 

한 흑인이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노예선 바닥에 실려 묶인 채 얻어터지고 모욕을 당하면서 대륙으로 이송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합시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을까요? 이 모든 것이 내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역사가 분명 무겁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30쪽)

 

‘자유·평등·박애’, 프랑스 본국인들은 이 세 종류의 가치를 항상 권장할 겁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은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어디에 박애가 있습니까? 왜 사람들은 이 박애를 경험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바로 프랑스가 정체성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네가 모든 권리를 가진 인간, 다른 사람들의 존중을 받아야 할 인간이라면, 나 역시 한 명의 인간이고, 나 역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나를 존중해 주기 바란다. 그 순간에 우리는 형제가 되는 것이다. 서로 포옹하자. 그것이 바로 박애이다.’ 
(38쪽)

 

혹인 노예 지지자들의 말만큼이나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박애주의자들이, 분명 선량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은 사람이고, 백인도 흑인도 없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오. 그건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이고, 이 세상 밖의 일이오, 부인. 모든 사람이 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 나도 그것엔 동의하오. 하지만 공동 운명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의무를 가진 사람이 있소. 그것에 불평등이 있다오. 명령의 불평등 말이오.
(62쪽, 에메 세제르 <크리스토프 왕의 비극> 중 크리스토프의 대사)

 

아래는 베르제가 후기에서 설명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의 역할.

 

‘포스트식민성’ 개념은 권력들의 새로운 지도를,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접촉 지대들을, 그리고 식민지들 사이의 접촉 지대들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포스트식민 이론은 대규모의 가속화된 이주와 사회적 구조의 상실, 잔혹함과 폭력이 곧 권리인 정책들의 재출현, 정체성의 후퇴, 폭력의 폭발, 모든 것이 상품이며 판매될 수 있는 자유시장경제 담론의 헤게모니적인 지배와 같은 새로운 동요들을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포스트식민 이론은 학제 간 학문이 되고자 하고, 부차적인 표현들과 ‘소수자들’에, 새로운 저항의 장소들(음악, 조형예술, 도시 문화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며, 권력과 착취의 새로운 형태들, 지역들과 새로운 교역로들과 국제 도시들의 출현을 목도하는 데 관심을 두고자 한다. 역사는 선형적인 것이 아니다. 게다가 식민지의 역사가 이주와 유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의 구성 원칙인 ‘민족’은 더 이상 최고의 준거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뿌리 또한 더 이상 가치를 높게 평가받거나 찬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86쪽)

 

파농이 포스트인종주의적 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한 바로 그 지점에서, 그 ‘피부색’이 더 이상 신원 판별의 기준이 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세제르는 그 어떤 부정적인 신원판별도 그것과 결부되지 않으면서도 흑인이 되는 것이 가능한 사회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반환청구이고 노예무역과 노예와 세계를 가로지르는 디아스포라에 대한 반환 청구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Blackness without Ethnicity’는 유효하다. 이때 네그리튀드는 “체험된 경험들의 합”, “참아낸 억압 공동체”, “역사속에서 역사를 사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정말이지 한 공동체의 역사의 경험이 그 공동체 인구의 강제 이주,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의 인간 이송, 요원한 믿음에 대한 기억들, 말살된 문화의 폐허들과 함께 독특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기억으로서, 충실성으로서, 연대로서의 차이에 대한 의식화이다. “억압에 대한 거부”인 네그리튀드는 “투쟁”이며, 또한 “지난 수세기 동안에 구성된 것으로서의 문화 시스템”에 맞서는, “유럽의 환원주의에 맞서는” “저항”이다. 
(98쪽)

 

번역은 껄끄럽다. 아리스티드(아이티 전 대통령을 가리키는 듯)를 지명으로 옮긴 것도 그렇고...
세제르의 <귀향수첩>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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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스틱스 - 전지구적 물류의 치명적 폭력과 죽음의 삶 카이로스총서 44
데보라 코웬 지음, 권범철 옮김 / 갈무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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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 책답게 -_- 번역은 목에 탁탁 걸린다. 내용은 중언부언 반복이 많고, 밀도가 낮다. 사례로 든 것도 너무 적고, 한마디로 세포 없이 뼈대만 있는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은 건 저자의 문제의식, 그리고 ‘로지스틱스’를 가운데에 놓고 본 세계 경제질서라는 프레임이 눈에 띄어서다. 


정확히 말하면 ‘눈에 띄어서’라기보다는, 이렇게 한번 봐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웃소싱, 오프쇼어링, 외주화, 글로벌화 등등 지난 수십년 동안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 그리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모두 이 틀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 틀로 바라보면 많은 걸 포괄하면서 또한 새롭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빌면 “운동화는 여전히 스마트폭탄보다 온라인 주문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산업은 경영학과 전쟁술의 구별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전쟁과 무역은 공급 사슬에 의해 조직되고, 그것의 형태를 취한다.”(12쪽)


전쟁의 민영화, 경제의 글로벌화.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의 결합일 수도 있고, 혹은 같은 것의 두 얼굴일 수도 있다. 이제 ‘보급(로지스틱스)’은 그 자체로 전쟁이 되었고, 생산과 유통은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졌다. 공장은 생산하고 상인들은 유통하고 소비자는 돈 주고 사서 쓰는 게 아니다. 방글라데시에 물건을 만들고 홍콩의 지사에서 유통망을 관리하며 미국 시장의 상점에 내놓는 식의 총체적인 흐름이 이제는 ‘경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사슬의 고리들을 세계의 어디에 얼마만큼 배분하느냐가 곧 경제가 된 시대다.


유류가 전쟁의 본성을 개조하기 시작했던 것은 1차 세계대전이지만 그럼에도 가축은 여전히 결정적인 영향을 수행했고 사료는 막대한 로지스틱스상의 문제로 남았다. 1차 대전 동안 영국에서 프랑스로 수송된 물자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 것은 탄약이 아니라 말에게 먹일 귀리와 건초였다. 2차 대전에서는 산업전의 로지스틱스가 무대의 중심을 차지했다. 처칠은 연합 작전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결국 휘발유가 모든 이동을 지배했다.” 이 모든 것에서 결정적인 것은 변화하는 폭력의 기술이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재조직했던 방식이다. 군사 로지스틱스는 산업전의 부상과 더불어 전략과 전술을 이끌게 되었고, 점점 본질을 구현하는 방법이 되었다. (53-54쪽) 


로지스틱스에 대한 기업의 관심은 2차 대전 동안 시작되었다. 2차 대전 동안 그리고 그 이후 미국의 전장을 지원하기 위해 설계된 사회적·산업적 기술이 결정적이었다. 처음에는 점령지 일본에서의 노동자 훈련을 통해서, 이후에는 한국전쟁 물자 도급을 통해 이 기법을 확산함으로써 미군의 또 다른 혁신인 표준 수송 컨테이너는 무역 지구화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적 혁신이 됐다. 로지스틱스의 금전적·전략적 가치에 대한 기업가의 관심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사이에 급격하게 늘었다. 1965년 4월 6일 피터 드러커는 “물적 유통은 ‘전체 비즈니스 과정’을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라고 단언했다. 드러커는 새로 꾸려진 물적유통관리전국협회 강연에서 유통은 “오늘날 비즈니스의 최전선”이라고 주장했다. (55-56쪽)


전후 로지스틱스를 경영 관리의 중심으로 만든 다른 현실적인 요인들이 있었다. 컴퓨터가 핵심이었다. 1950년대의 이윤 감소는 1958년의 경기 후퇴로 이어졌고 미국 대기업이 운영비용 절감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로지스틱스가 문제 해결책으로 간주됐다. (59쪽)


전쟁의 기술이 경제에, 경제의 흐름이 전쟁에 물려들어간다. 민영화된 전쟁의 맨 얼굴을 보여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 미 국방부와 미군과 용병들은 ‘로지스틱스’라는 이름으로 통합됐다. 더 중요한 건 글로벌 경제가 전쟁에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경제의 글로벌화 자체가 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힘을 빌린 자본 혹은 자본을 위해 일하는 국가에게, 이 ‘흐름’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은 ‘공공의 적’이다. 항만 노동자들의 시위, 파이프라인을 끊는 원주민들의 사보타주, 노조의 파업, 극단세력의 공격과 지역 분쟁, 심지어 종교 갈등과 소말리아 해적까지도. 


미국에서는 1980년 ‘스태거스 철도법’이 제정돼 “극적인 고용 감소와 점진적인 임금 하락 그리고 노조의 협상력 위축”을 낳았다. 철도 부문의 규제가 남아 있었음에도 그랬다. 트럭운송산업은 1978년부터 1996년까지 탈규제 시기 동안 노조 가입률이 46%에서 23%로 떨어졌다. 1980년의 자동차운송법은 차량 소유주가 아닌 운전기사들에 위험을 전가하게끔 조장했고 노조 없는 ‘개인 트럭사업자’가 널리 퍼지게 만들었다. 배들은 편의치적 즉 규제 없는 남의 나라에 선적을 두는 방식으로 규제에서 벗어났다. 해운의 국제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이미 1950년대부터 배 주인들은 전투적인 선원노조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미국 해운 노동자들은 수세에 빠졌다. 물류 노동자들이 무너지는 사이에 미국과 글로벌 자본은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장벽들을 무너뜨렸다. 신자유주의는 로지스틱스 시스템을 위한 이데올로기도 했던 것이다. 


흐름을 막는 국가 단위의 조치들은 ‘규제완화’라는 이름으로 제거됐다. 위험 요소들을 관리하고 차단하기 위한 모든 조치들이 ‘안보’라는 이름으로 통합됐다. ‘공급 사슬의 관리’라고 부르는 것의 다른 이름은 바로 안보다. 지구를 잇는 흐름은 한번 끊기면 파장이 너무 크다. ‘적시 Just-in-time 운송 체계’는 공장 하나의 파업조차, 항만 노동자들의 며칠짜리 방해공작조차 용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위험한 것들을 걸러내고 ‘예방’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쟁이라면 예방적 공격 혹은 선제 타격 같은 이름이 붙을 것이며, 통상적인 보안관리라면 검문검색과 격리와 노조파괴가 되는 것이다. 가끔씩 이 두 가지는 합쳐져서, 군사작전 수준의 보안관리와 로지스틱스의 탈을 쓴 군사작전(예를 들면 소말리아 해적 퇴치작전)이 되곤 한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저자는 공급 사슬 보안 SCS이라 부른다. 


공급 사슬 보안의 핵심은 상품 흐름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교통·통신 인프라를 보호하는 것이다. 무역흐름을 교란할 잠재력이 있는 사건과 세력을 통치하고자 하는 국가적, 초국가적 프로그램들을 통해 형성된다. 공급 사슬 보안은 화산 폭발이나 테러 공격처럼 예측 불가능한 위협으로부터 취약성을 줄이기 위해 선제 기법을 동원하며, 교란 이후의 순환을 회복시킬 대비 조치를 동원한다. 공급 사슬 보안은 교란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위험물을 식별하고 이들을 순환 시스템에서 떼어 놓는 위험 관리에 의지한다. (123쪽)


글로벌 공급 사슬의 관리는 그 이전 시대의 ‘글로벌 분업체계’와는 의미도 맥락도 다르다. 한국은 섬유제품을 생산하고 미국은 사가는 식의 분업이 아니다. 이 공급 사슬은 자원과 노동력과 인프라와 세금 등의 여러 요소를 놓고 움직이며, 진화한다. 동시에 이 사슬은 세계의 지도를 바꾼다. 로지스틱스가 창출하는 새로운 세계지도 mapping는 공급 사슬의 교란을 막는 것을 우선 과제로 한다. 해적을 막을 유럽의 군대를 배치하고 이라크에 미군 토마호크 미사일을 퍼붓고 남중국해에서 미군 항모가 중국 함정과 대치하게 만드는 것은 국가 단위의 지정학인 동시에 ‘물류’ 그 자체다. 


9·11의 직접적인 여파로 미국 관리들은 항구에 대한 새로운 보안 계획을 조용하고 신속하게 설계하기 시작했다. 이는 국내 공간뿐 아니라 전지구적 보안을 개조할 것이었다. 미 당국이 규정하고 관리하는 컨테이너보안협정 CSI은 미국행 화물을 검사하기 위해 수십 개의 외국항에 관세국경보호청 직원들을 파견한다. 더불어 세관원들은 ‘테러리스트나 테러 무기가 미국으로 오기 전에 고위험 화물 컨테이너를 식별하고 미리 걸러낸다.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관세청이 고위험 컨테이너가 입국 항구에 있는 동안 표적으로 삼고 검사한다. (131쪽)


방글라데시에서 1500명의 부두 노동자들이 2010년 10월 치타공 항만국의 컨테이너와 화물운영 민영화에 저항하기 위해 파업에 들어갔을 때 정부는 군대를 동원했다. 정확히 1년 뒤 미국은 워싱턴 주의 노동분쟁에 개입했다. 곡물 기업 EGT는 롱뷰항에 새 가공시설을 만든 뒤 국제항운노조가 아닌 노동자와 불법으로 계약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EGT의 배를 경호하기 위한 연안경비대 동원을 승인했다. 로지스틱스에 관련된 노동 행위를 국가안보 문제로 취급하는 일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177쪽)


소말리아 해적은 로지스틱스의 세계에서 삐져나온 송곳이고, 뚫린 구멍이다. ‘공해 상’ 혹은 ‘통제 밖’의 해적들이 물류를 끊는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안보리 결의와 ‘지부티 강령’ 등의 이름으로 군사행동에 나서 해적 퇴치작전을 벌이고 있다. “소말리아에서 영국은 1960년에 포스트식민적 영토분할을 했다. 1990년대 초 미국 최초의 아프리카 지상전과 유엔이 개입된 폭력이 소말리아에서 일어났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해적 행위가 늘어난 주된 요인이 된 사건은 불법 남획과 유독성 폐기물의 불법 투기였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소말리아 어업을 완전히 파괴해버렸고 해안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중요한 생게 원천을 제거해버렸다. 유독성 핵폐기물이 그 바다에 불법 투기되고 있다. 소말리아 해역은 유럽 산업폐기물의 무료 쓰레기 하치장이 됐다. 유럽 기업이 아프리카의 뿔에 우라늄을 버리는 데에는 톤당 2.5달러가 든다. 유럽에서 처리하는 비용의 100분의 1이다.”(219-220쪽) 


이런 사실은 가려지고, 해적은 세계의 공적이자 안보 위협이 된다. 선박에 무장 경비원을 태우거나 무장 호위선이 따라붙게 함으로써 수에즈에서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물길은 ‘안보 민영화’의 실험장이 된다. 붙잡힌 해적들은 지구상 어느 나라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카리브 해적’의 낭만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지구의 사생아들이다. 


“해적 사건을 기소할 시스템은 개발되지 않았다. 어떤 국가들은 미심쩍은 해적들을 풀어주지만 어떤 국가들은 그들을 구금하고 국내 법정에 세운다. 또 다른 국가들은 마주친 장소에서 그냥 살해한다는 소문도 있다. 점점 흔해지는 것은 소말리아에 이웃한 가난한 국가들이 돈벌이를 위한 감금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연합은 모두 케냐와 협정을 맺어 해적을 기소하게 했다. 2006년과 2011년 사이 20개 국가가 1063명의 소말리아 해적을 기소했다. 그중 5개 국가는 유엔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해적을 기소하고 있었다.”(238쪽)


이 지구에서 사람들은? 노동자는 탄압받을 수도 있고, 노동자의 또 다른 이름인 소비자는 편할 수도 있다. 소비자의 다른 얼굴인 시민은 감시를 받을 수 있고, 세계화라는 이름의 물류가 저지르는 폭력에 맞서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이미지와 달리 이제 지구상 수많은 노동자들은 총체적인 의미에서 ‘물류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노동자들 자체가 물류의 대상이다. 생산은 어느 지역 어느 한 공장에서 수십년간 이뤄지는 게 아니며,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 지역에 수십년 간 머무는 이들이 아니다. 생산과 수송은 모두 섞여 지구를 가로지른다. 


로지스틱스 혁명 와중에 지구적으로 심화된 경향성들은 모두 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 저자는 그 세 가지로 1)우발성의 증가(임시직과 계약직 등 불안정한 노동형태가 늘어난다), 2)노조의 약화 3)인종화를 든다(151쪽). 경제적으로 취약한 (인종)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은 그 취약성 때문에 글로벌 물류 속에서 약한 곳에 자리하게 되고, 그래서 더 취약해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항구 트럭 운전사들의 30~50퍼센트는 불법 이민자들이며, 그들에게는 ‘인증증명서’가 있을 뿐 노동 보호는 없다. 책에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아프리카의 트럭 운전사들 상당수는 마사이족등 취약한 유목민이고, 어디에서나 국경을 오가는 트럭 운전사들은 불법 이주와 합법 노동의 경계 사이를 넘나든다. 두바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파업과 노조는 불법이며, 이들의 ‘임시노동허가’는 언제라도 끝날 수 있다. 


두바이 물류그룹이 미국 항만을 인수할 거라 해서 조지 W 부시 때 의회가 난리를 치며 막아섰지만 아랍에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를 덧씌운 ‘이미지 안보 장사’가 낳은 헤프닝이었을 뿐이다. 두바이 물류그룹이 아니라 두바이라는 물류 모델 자체가 로지스틱스의 중심을 지향하는 세계의 거대도시들로 퍼져나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 회사가 이라크 남부에 만든다는 ‘바스라 로지스틱스 도시’, 필리핀의 ‘국제관문 로지스틱스 도시’ 등의 프로젝트들을 저자는 사례로 들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부분은 업체 보도자료를 너무 확대해석한 것같은 느낌.)


저자가 중요하게 본 포인트 중 또 하나는 로지스틱스의 지도 속에선 인간의 '몸’에도 이전과 다른 정치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행위가 일어난 뒤에 대처하면 늦다. 예방적 안전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소비자/시민의 몸을 장악하는 것이다. 테러용의자나 파괴분자 혹은 과격파를 미리 구분해 격리하고 차단하기 위해. 자연의 순환도, 노동력과 물자의 이동도, 우리의 몸 자체도 이 지도 위에 표기돼야 할 생산과 공급의 관리 요소가 되는 것이다. 노동자의 몸은 자원이자 비용이다. 가져다 쓰고 다른 곳에 버리는 노동력들에게, 이제는 20세기에 필요했던 훈육(트레이닝)조차 필요가 없다. “공급 사슬 관리자들이 자동화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많다.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자원이다. 관리자는 자동화를 통해 노동력을 ‘안정시킬’ 수 있다.”(171쪽) 노동자들은 그저 코드로, 데이터로 존재할 뿐이다. 


헤쳐나갈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공동체와 내 몸을 저항하는 것밖에.


“2011년 항만 용접공이자 활동가인 김진숙은 한국 부산항의 갠트리 크레인을 점거했다. 노동자를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하려는 한진의 계획에 맞선 그녀의 점거는 땅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살쾡이 파업과 연계하여 2011년 6월에 시작했다.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결국 계약에 대한 양보안을 받아들였지만 김진숙은 자리를 지켰다. 수천 명이 땅 위에서 그녀를 중심으로 대열을 만들었다. ‘희망버스’라고 불린 이것은 그녀에게 로지스틱스적·정치적 지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309일이 지난 뒤 진숙의 점거는 성과를 거두었다. 노동자들은 재고용됐고 체불임금을 받았다. 한국에서 15년만에 처음 있는 노동의 승리였다.”(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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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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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다. 그래도 나는 끄떡없다. 그리고 저 사람들에게 내가 개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 기껏해야 저들은 내게 채찍질밖에 안 할 테니까 말이다. 내가 잃어버린 것의 향기가 저 어둠으로부터 희미하게 전해지고 있는 지금,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15쪽)


반딧불이 쿠데마유의 초록 불빛이 꼭 감고 있는 내 눈가를 촉촉하게 만든다. "내가 모든 걸 잃어버린 것은 바로 그날이야." 나는 눈으로 반딧불이 쿠데마유에게 말한다. 그러자 반딧불이가 초록 불빛으로 내게 대답한다. "그날 너만 모든 걸 잃어버린 것은 아니야." (55쪽)


그 작은 양털 실오라기에서 마른 장작, 곡물 가루, 우유, 꿀,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의 냄새가 난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 있는 힘을 다해 울부짖는다. 내가 근처에 있고, 만나러 갈 거라는 사실을 아우카만에게 알리기 위해 울부짖는다. 다른 건 몰라도 고통에 찬 목소리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 법이기에, 미친 듯이 울부짖는다. (76쪽)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이다. 세풀베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은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던지라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문화부에서 책을 종종 얻어오다 보니, 나의 몇 권 안 되는 독서는 거의 내 취향이 아닌 얻어보기 수준에 걸려 있다. 어차피 취향이 그리 뚜렷하지도 않지만. 그렇게 얻어걸리는 책들 중에 마음이 얼얼하게 좋은 것들이 있다. 이 책이 그랬다. 칠레의 마푸체 원주민들 행진 소식이나 땅 싸움 얘기는 외국 언론 보도에서 몇 번 읽었으나 이런 동화를 통해 접할 때에는 또 다르다. 


노란 색의 얇은 책을 읽는데 늘 그랬듯 몇 주가 걸렸다. 아민 말루프의 <동방의 항구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시간의 목소리>, 제수알도 부팔리노의 <그림자 박물관> 그리고 이 책. 할아버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조금씩 아껴가며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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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셸터스 :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정림건축문화재단 지음 / 프로파간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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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플렛같은 소책자여서 가뿐한 마음으로 펼쳐들었는데, 뜻밖에 알차고 재미나다. <뉴 셸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은 건축가들과 여러 장르의 예술가, 연구자들이 난민 문제를 놓고 벌인 전시회와 포럼 같은 작업들을 정리해 소개한 책이다. 유기견 문제에서 홍세화와 서경식의 대담까지, 얇은 책자에 여러 내용을 묶었다. 중구난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사실은 난민 문제의 본질이다. 우리가 '남의 일' 혹은 '보기도 싫고 말하기도 실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에서부터 세계시민으로서의 공존이 시작된다는 것, 인권과 평등과 공존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되짚어보고 서로를 위해 고민하면서 이뤄낼 수 있는 가치라는 것.


무엇보다 이런 작업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갑다. 난민 문제에 대한 전시회가 열리고 그걸 정리한 책이 나온다 해서 우리 사회가 뭐 그리 변했느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이 이뤄진다는 것, 누군가는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마치, 등대의 불빛처럼. 바다 전체가 깜깜해도 이런 등대가 있으면 최소한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은 해보게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우리 각각의,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모이면 사회가 나아지고, 난민들의 삶이 바뀐다. 


건축과 관련된 타이틀이 붙어 있지만 이 책에서 무언가 새로운 '난민 하우스'의 형태나 건축 아이디어를 찾으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난민들의 삶을,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어떻게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건축가들과 연구자들이 염두에 둔 것은 '지금 있는 것을 낫게 만드는 방법'이다. 김찬중 건축가의 표현을 빌면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타지 사람이 들어와 살 공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기존 인프라를 잘 연구하고 활용하는 것, 셸터와 개인을 어떻게 매칭해 최적의 장소에서 머물 수 있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뉴 셸터'라는 것은 우리의 기본 인프라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다"(20쪽). 


국제규약상 난민의 범주는 매우 좁다. 이 책에 실린 작업을 한 이들은 이주노동자들, 탈북민들, 북한 비상사태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탈북민들까지 모두 난민의 범주에 넣고 이들과 토착민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살핀다. 빅데이터를 이용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뭔지, 어떤 곳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수요와 공급의 계획을 세울 프로세스를 만들자는 제안이 눈에 띈다. 한국에 건물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난민촌을 세울 시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작업자들이 보는 '기존의 인프라'에는 "현재 우리가 가진 물적 토대를 네트워크 또는 어떤 관계 속에 위치시키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으며, 이것이 곧 시스템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20쪽). 


현재 한국의 이주민, 난민들의 주거현실은 열악하다. 책에는 비닐하우스에서 몇 명씩 생활하는데도 매달 '월세'를 고용주에게 30~40만원씩 내는 농촌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사정이 나온다. SoA라는 건축사무소에서는 이런 이주노동자들의 주거 실태를 조사한 시민단체의 자료들을 모아 '주거도감'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열악한 주거환경을 뛰어넘는다. 가령 화장실이 없거나, 문고리가 없어서 문을 잡고 잔다거나, 전류가 흘러 벽에 손을 갖다 대면 전기가 통한다거나 하는 수준이다. 남녀 혼방도 많다. 그들이 무료로 사는 것도 아니고 적지 않은 월세를 지불함에도, 집주인이 막 들어와 물건을 꺼내기도 한단다."(50쪽)  


자물쇠도 없는 '집'에 살면서 성폭행 같은 위협에 노출돼 있는 이들을 착취하고 또 착취하는 구조. 이들에게 필요한 집의 모양을 넘어, 이들이 제대로 된 주거공간에 살 수 있게 해주는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 대안은? "비닐하우스 외에 대안이 없다면 그 비닐하우스라도 쾌적하게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게 더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주노동자가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든지, 그래서 그들 스스로 아이디어를 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을 실제로 만나보면 매우 적극적이다. 단지 노동시간이 너무 길어서 여유가 없을 뿐이다. 여유가 있다면 충분히 자신이 살 공간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52쪽) 


건축가들이 이주민과 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인프라를 얘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최소화된 주거'의 필요성은 거주나 정주가 아닌, 거기 머무르는 사람들이 거쳐간다는 것을 전제로 말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이주노동자들은 사실 '살아가고' 있다. 이 나라에 있는 동안만큼은 우리의 일상과 똑같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52쪽) 


난민이나 이주자들은 자기 나라를 떠나오기 전에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일상을 꾸려왔던 사람들이다. "안전이란 개념은 없고, 휴식을 취할 수조차 없는 거리와 집의 경계지가 이주여성의 '집'이다. 한국 사람들은 경제 빈국에서 온 사람들은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야 하거나 감수해야 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자가 방문해본 이주자 본국의 집은 비록 현금이 부족하여 시설은 열악하지만 주거 환경은 매우 풍요로운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떠나온 캄보디아나 베트남의 집은 넓은 공간에 자는 곳과 요리하는 곳이 잘 분리돼 있고, 망고 등의 과일나무로 그늘이 드리워져 있으며, 각종 채소가 자라고 닭과 개들이 뛰어노는 것이다. 또한 동네 사람들과의 친밀감과 오랜 신뢰로 지역사회로부터 안전과 도움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87쪽) 


한국에 난민이 대량으로 유입되는, 이를 테면 북한의 유사시 탈북민이 대규모로 밀려들어오는 상황을 가정해보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이미 있는 인프라, 즉 전국 곳곳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을 캠프화하는 문제를 황두진 건축가가 연구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기발한 시스템이나 물건을 만들려 하지 말고, 우리 사회가 보유한 상당한 자원을 어떻게 소싱하느냐의 문제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그는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제도나 조직, 사회적 자원의 집합체로 군, 건설산업, 렌탈산업, 캠핑산업을 꼽았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들을 받아들이되 우리가 이미 보유한 자원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예비군 훈련장을 캠프로 바꾸되 '마을' 개념을 적용하자는 문제의식이 눈에 띈다. "임시의 잠정적 시설이긴 하지만 일상생활, 북한 커뮤니티의 삶이나 방식도 존중돼야 한다. 오랜 기간 인류가 함께 고민해서 만들어온 국제적 기준이 우리에겐 큰 도움이 된다."(64쪽)


책의 후반부는 한국에서 난민들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 즉 우리 사회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고시촌으로 상징되는 우리 내부의 거주 난민, 출생국의 GDP로 그 나라 사람들의 등급을 매기는 풍토, 다양성을 경험해보지 않아 무조건 거부부터 하는 획일화된 심리와 순혈주의, 재일동포와 탈북자들이 '간첩 조작'의 희생양이 됐던 역사, 경계인은 곧 적으로 보는 배외주의, 미국이나 유럽은 '백인들의 나라'일 것이라고만 보면서 그쪽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무지 등등. 


그런 우리 사회에서 "난민과 이주자에게 안전한 집을 제공한다는 것은 이들이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존재가 아니며 떠난다 하더라도 우리와 공존하고 자원을 공유하는 동시대적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이들의 안전한 삶에 대한 우리의 책무는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예측 불가능한 위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과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의식에서 환기된다."(89쪽) 실제로 1950년 한국전쟁 뒤 전쟁고아 2명이 시리아로 입양됐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조효제 교수에 따르면 "반세기 전만 해도 시리아는 한국의 오갈 데 없어진 아이들을 받아들이던 나라였다." (135쪽)


고민해야 할 것들 투성이다. 실상 우리는 이주노동자를 보면 "그래 한달에 얼마나 벌어"하면서 멋대로 반말을 풀어놓는 수준이 아니던가. '옆집에 난민이 이사 왔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김찬중 건축가의 답변.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는 것 같다." (22쪽) 


조효제 교수는 난민들을 대하는 우리 개개인의 태도와 관련해서, 네덜란드에서 들은 얘기라며 '호의적인 무관심'이라는 개념도 있다고 소개한다. 그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서로의 라이프스타일에 관여 하지 않은 채로 "존중하면서 그냥 살자.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거나 적극적으로 차별하지 말고 그냥 호의적인 무관심을 갖고 소가 닭 보듯이 살자. 그것만으로도 사실 굉장히 문명화되고 개방된 사회가 아니겠느냐."(156쪽)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러한 문제를 양산하는 근본 원인, 즉 질서라든지 식민지의 유산이라든지 강대국의 횡포라든지 전쟁을 만드는 자본주의의 문제 등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시민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면 세계시민으로서의 시각과 일상생활 속에서의 무덤덤한 보편적인 실천 모두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157쪽)


우리 밖에서 온, 우리 안에 있던 '다름'과 '차별'을 인식하고 고쳐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의 '뉴 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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