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대공황 - 앞으로 20년, 저성장 시대에서 살아남기
시바야마 게이타 지음, 전형배 옮김 / 동아시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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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재미있었다. 순식간에 책장을 넘겼다. 

2008~2009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왜 일시적 위기가 아닌 '공황'에 가까운 것으로 봐야 하는가, 그것이 진정 위기라면 그간 금과옥조처럼 여겨온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1%가 아닌 99%의 사람들, 우리 필부필부에게 이 상황은 어떤 의미를 지니며, 우리가 상상해야 할 신자유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너무 거창한 이야기들이라 개미만한 독자, 지구인 하나하나가 생각하기엔 버거운 주제처럼 들린다. 책은 얇고, 케인즈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빌려 궁리의 단초들만 제시해줄 뿐이다. 그런데도 뭔가 머리 속이 정리되는 느낌. 


(25쪽)
왜 1920년대에 필적할 거대한 버블이 방치돼온 것일까? 미국 경제학자 라구람 고빈드 라잔에 따르면 그 배경에는 재분배와 관련한 정치의 실패가 있다. ...계층 분리는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를 바로잡는 수단은 세제와 소득재분배다. 그런데 미 연방의회는 이런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그 대신 주목한 것이 정부에 의한 융자 확대, 그중에서도 주택과 관련한 융자 확대였다. 이는 교육과 복지의 재정립을 통한 중간층 육성이라는 번거로운 선택을 피하고, 손쉽게 저소득층에게 경제성장의 과실을 배분하려든 정치적 선택으ㅔ 결과였다고 라잔은 지적한다. 격차확대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고로움과 비용이 들고, 세금을 늘리려 할 경우 고소득층의 반발도 무릅써야 한다. 중간층 육성에 힘을 쏟기보다 내집 마련을 쉽게 해주는 것이 호경기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훨씬 손쉬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156쪽)
도쿄, 나고야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권에는 인구가 몰리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세계화의 영향만이 아니라 서비스 경제화의 영향도 있다. 대인 서비스업의 발전은 인구 밀도에 비례한다. ...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셔터 상점가 현상'이다. 인구가 감소국면으로 접어든 지역에서는 손님을 광역화하여 자동차를 이용한 쇼핑객을 겨냥한 대규모 체인점밖에 살아남지 못한다. 
인구구조의 전환은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1990년대 이후 도시 주민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대도시 출신 정치가의 영향력도 덩달아 커졌다. 2000년대의 구조개혁에서는 공공사업 삭감과 지방교부금 수정이 추진됐는데, 이를 추진한 인물이 가나가와현 출신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였다. 현재도 추진 중인 지방분권 개혁은 이런 흐름 위에 있다. 그 단적인 예는 나고야의 '독립'을 선언한 가와무라 다카시 시장, '오사카로부터 일본을 바꾼다'고 주장하는 하시모토 도루 시장일 것이다. 

(166쪽)
'커다란 정부' 노선으로 전환하지 않고는 세계화가 초래하는 경제 사회의 불안정을 견뎌낼 수없다. 그러나 세계화와 '큰 정부'의 조합은 과연 바람직한가?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큰 정부에 의한 복지국가화를 도모하는 것만이 일본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일까? 아니면 세계화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며 시간이 걱릴 지라도 가족과 공동체를 재생시켜 나가면서 도시와 지방, 나아가 산업 간의 균형을 도모하는 선택이야말로 일본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일까? 

(178쪽)
1936년 '일반이론'에서 케인즈는 '투자의 사회화'가 20세기에 안게 될 최대의 과제라고 썼다. 통상적으로 이는 정부에 의한 공공투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좀더 확장시켜 생각해보고 싶다. 물적 자본의 투자만이 투자는 아니다. 최근 주목받는 사회관계자본이라는 개념이 있다. 공동체에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규범 혹은 호혜의 네트워크를 일종의 자본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유지와 확대의 프로세스에 주목하는 접근법이다. 이런 생각에서 보자면 공동체의 인간관계는 자본이다. 자본에는 물적 자본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인간관계나 조직의 신뢰같은 무형의 자본도 들어간다. 화폐로 환산가능한 유형의 자본뿐만 아니라 무형의 자본도 늘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생활이 풍요로워지지 않게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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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폐허에서 -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판카지 미슈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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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너선 스펜스의 <천안문>을 '범아시아 버전'으로 읽은 듯하다. 실제로 등장인물 중 중국의 상당수(캉유웨이, 량치차오, 천두슈 등)가 겹치기도 한다. 


인도 출신인 저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공격과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가 서양을 이기기 위해 어떤 고민과 모색을 했는지 보여준다. 아시아 대륙의 이 끝과 저 끝을 오가는 '근대 초기 아시아 사상가들의 지적 편력'이 화려하고 또한 음울하게 전개된다. 이 지적편력기의 주인공은 크게 두 사람이다. 이슬람권에 두고두고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슬람 테러범들'로 숱하게 폄하되는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창시자 격인 알 아프가니가 첫번째 인물이다. 알 아프가니에 대해서는 9.11 테러가 난 뒤 -_- 공부를 좀 해보려 했으나... 안 했다. 그러다가 이제야 그의 행보에 대한 좀 상세한 설명을 읽은 셈인데, 그의 생각틀 자체가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니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두번째 인물은 량치차오다. <천안문>의 세 사람 중 한 축인 캉유웨이의 제자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쑨원과 마오쩌둥, 옌푸와 탄쓰퉁을 비롯한 중국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의 행로가 그려진다. 인도에서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모한다스 간디, 무함마드 이크발의 이름이 나온다. 사아드 자글룰, 사이드 쿠툽 같은 이집트의 지식인과 이란의 알리 샤리아티, 아야툴라 호메이니도 한 자리 차지한다. 일본의 근대를 형성한 오카쿠라 가쿠조, 미야자키 도텐, 베트남의 호치민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을 통해 보여주는 '아시아 지식인들의 저항'은 모두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서구라는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 그들의 모색이 혼돈을 맴도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세밀화가들이 전통과 개혁,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것처럼.


재미있었다. 책은 '일본의 개가에 환호하는 범아시아인들'로 시작하며, 일본이 아시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아무래도 '우리 조선의 후예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혹은 눈감으려 하는 역사적 진실이라 생각할 수밖에.

아시아 사상가들의 지적 궤적에는 좌절과 희망이 수시로 교차한다. 어찌 되었든, 과거는 과거다.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이미 테러와의 전쟁이 금세기의 첫 10년을 망쳐놓았다. 그렇지만 미래에 되돌아보면, 그 10년은 이미 근대적인 경제는 물론이고 근대화 중인 경제에도 필요한 귀중한 자원과 원자재를 차지하기 위해 더 큰 규모로 더 많은 피를 흘린 분쟁의 전초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경제성장을 끝없이 추구하도록 부채질하는 희망- 인도와 중국의 소비자 수십억 명이 언젠가 유럽인과 미국인의 생활양식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은 알카에다가 꿈꾸는 공상 못지않게 터무니없고 위험한 공상이다. 이 공상은 전 세게의 환경을 더 빨리 파괴하고 있고, 수억 명의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 허탈한 분노와 절망의 저수지를 만들고 있다. 서구 근대성의 보편적인 승리라는 이런 씁쓸한 결과로 말미암아, 동양의 복수는 어딘지 음울하고 모호하게 변해가고 있으며, 서구가 거둔 모든 승리는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로 바뀌고 있다."

저자의 맺음말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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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케넌의 미국 외교 50년 - 세계대전에서 냉전까지, 20세기 미국 외교 전략의 불편한 진실
조지 F. 케넌 지음, 유강은 옮김 / 가람기획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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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압의 도구가 갖는 의미와 가능성을 국가적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국제적인 장에서 이 도구를 계속 사용한다면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만큼이나 피해를 입게 될 거라고 봅니다. 인간을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것, 인간의 주거지를 비롯한 여러 시설을 파괴하는 것은 아무리 다른 이유 때문에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 어떤 민주적 목표에도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게 중요합니다.

민주주의의 융성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계몽이 확대되고 다른 사람들과의 실제적인 관계에 대한 의식이 커질 때만 가능합니다. 타인의 존엄이 손상되면, 여러 인간 중 하나인 자신의 존엄도 줄어든다는 각성이 생겨야 하는 겁니다. 

전쟁의 파괴 과정 자체를 세계의 진보라는 희망과 열망과 꿈을 위한 적절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무력은 평화와 마찬가지로 추상물이 아닙니다. 무력을 목적과 방법이라는 주어진 틀의 외부에 자리한 개념으로 이해하거나 다뤄서는 안 됩니다. 


이런 문장만 보면, 어느 점잖은 반전운동가의 글이라 해도 될 것 같다. '냉전의 설계자' '봉쇄정책의 주창자'라 불리는 미국 외교관 겸 국제정치학자 조지 케넌의 강연문이다. <조지 케넌의 미국 외교 50년>(가람기획)은 수십년 전 케넌의 강연문, 정확히 말하면 1951년과 1984년의 강연에다 '포린어페어스' 기고 등을 묶은 것인데 국내에서 케넌의 책이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국제문제 전문 번역가로 '믿고 보는' 유강은 번역이다. 역자는 후기에서 '이토록 중요하고 특히 한반도와도 관련 있는 케넌의 책이 왜 이제껏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을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케넌이 미국 국무부 장관급의 고위층이 아니었고 1950년 고등연구소로 옮겨간 뒤에는 조용히 학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 둘째는 국무부를 떠난 뒤 케넌 스스로 제안한 '봉쇄정책'이 점점 '군사화'되는 걸 보면서 미국 외교정책에 몹시 비판적인 입장을 돌아서 현실에서의 영향력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어찌 되었든 이 때문에 케넌은 '봉쇄정책의 주창자'라는 타이틀로만 남았을 뿐, 그가 주장한 내용을 세세히 접할 기회는 없었다는 것. 나 역시 케넌의 이름만 이 책 저 책에서 접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케넌의 이 강연록은 정말 재미있었다. 


책의 전반부는 주로 19세기 말부터 2차 대전 때까지 미국 외교정책을 좌우한 '시각'과 개념틀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내용이다. 맨 앞에 책의 내용 전반에 대한 미어샤이머의 비평이 실려 있다. 케넌의 '논리적 모순'에 대해서는 미어샤이머가 이것저것 짚었지만 딱히 중요한 지점들을 지적했다는 생각은 안 들고.


케넌은 미국 정치지도자들의 이상주의와 미국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확신(오만함), 국수적이고 맹목적인 애국주의로 흘러가기 쉬운 민주주의 자체의 맹점 등을 들며 20세기의 전쟁들이 '전면전'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주장한다. 케넌은 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이고, 책에는 '현실주의'가 뚝뚝 묻어난다. 

전투에서는 '승리'라는 게 있을 수 있는 반면, 전쟁에서는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거나 달성하지 못하는 결과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윤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상대 국민 전체의 태도와 전통이나 정권의 성격을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우라면, 군사적인 수단만으로, 또는 단시간 안에 승리를 달성하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아마 이런 점이 우리가 느끼는 혼란의 근원일 겁니다. 

전면적 승리라는 개념이야말로 과거에 우리에게 가장 큰 손해를 끼치고 미래에도 가장 큰 손해를 야기할 위험한 망상입니다. 전면적 승리라는 개념을 포기하면, 오늘날 우리의 국경 밖에서 벌어지는 성가시고 불쾌한 많은 일들에 대해 새로운 태도가 나타날 겁니다. 유쾌하지도, 다행스럽지도 않은 인체의 물리적 현상을 대하는 의사의 태도가 이런 것이겠지요. 초연하고 냉정하며 기꺼이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 말입니다.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라는 국제정치 이론간의 대립 차원이 아니고, 그냥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현실적' 혹은 '현실주의적'이라는 맥락에서도 케넌은 참 현실주의자다. 소련에 대한 전방위 봉쇄를 주장하지만 핵무기 경쟁에는 반대하고, 베트남전에 반대하고, 훗날 이라크전에 반대한 것(케넌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인 2005년에 사망했다)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핵무기 경쟁과 미국의 베트남, 이라크 침공은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으니까. 
심지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오히려 케넌은 이상주의자로 보이기까지 한다. 케넌 스스로 자신의 제언들이 (워싱턴의 정치 속에선)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현실을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미국에는 언제나 외부에서 단일한 악의 중심을 찾아서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의 책임을 돌리려는 흥미로운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니카라과나 시리아 같은 나라의 통치자들이 소박한 마르크스주의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독립적인 정치 행위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보입니다. 그들이 주로 스스로 판단하는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며, 모스크바의 지령이나 이데올로기적 압력에 맹목적으로 따른다고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해, 많은 미국인들의 눈에 악은 언제나 단수형으로 보여야 합니다. 


핵무기의 파괴성 자체,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는 실질적인 확실성 때문만이 아니라 환경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도 핵무기는 자멸적인 무기입니다. 이처럼 자멸적인 동시에 합리적인 군사적 목적에 적합하지도 않은 무기에 집착함으로써... 우리의 사고뿐만 아니라 삶까지도 극단적으로 군사화하는 결과가 생겨났으며, 이런 점이야말로 전후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이 됐습니다. 
이런 군사화는 대외 정책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자체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군사화는 우리 국가경제의 심각한 왜곡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매년 국민소득의 막대한 부분을 무기 생산과 수출에 지출하고 거대한 규모의 군대 시설을 유지하는 데 익숙해져야만 했습니다. 
이제 이런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극심한 금단 증상을 겪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수백만 명이 군복을 입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수백만 명이 군산복합체에 생게를 의존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책의 어느 부분은 지난 10여년을 휩쓴 '테러와의 전쟁'에서 드러난 미국의 오만과 실패를 염두에 두고 읽었다. 그런가 하면 뒤쪽의 어느 부분을 읽으면서는 자연스레 남북한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케넌은 이 또한 미국의 잘못된 전략이 만들어낸 실패의 사례로 본다)에 대해 상당량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소련을 완전히 복속시키거나 뜯어고치려 하는 미국인들의 태도에 대한 지적을 보면서 우리 안의 냉전 잔재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일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한 나라로서 현대 전제 정치의 굴레 속에 사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았다. 전체주의는 일국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어느 정도 걸릴 가능성이 있는 질병이다. 이런 체제 아래서 사는 것은 어떤 민족 전체가 저지른 특정한 죄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그 민족에게 닥칠 수 있는 불행이다. 

전체주의 아래서 시민과 정치 당국의 관계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절대로 순조롭고 단순하지 않다.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들과 우리의 관계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현실을 보면,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들은 부역자와 순교자로 깔끔하게 나눌 수 있고 그 사이에는 아무도 없다는, 우리 마음에 드는 확신이 자리할 여지는 없다. 


손쉽고 유치한 반응에서 벗어나 소련의 비극을 어느 정도 우리 자신의 비극으로 보는 데 뜻을 모으자. 그리고 소련 국민들을 인간이 자기 자신과 공존하고 고통받는 이 행성의 자연과 공존하는 더 행복한 체제를 만들기 위한 고되고 오랜 싸움을 함께 하는 동지로 바라보자. 


나는 이것은 주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촉구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미국의 국민 생활 자체의 정신과 목적의 문제이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그 메시지가 우리 자신의 모습과 일치해야 하며, 세계의 존경과 신뢰를 자아낼 만큼 충분히 인상적인 메시지여야 한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은 여전히 이런 국가적 성격의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다. 


케넌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같기도 하고,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이런 책을 지마켓에서도 판다는 건 참 재미있다. 지마켓에서 이런 책을 사 읽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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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레이디 리더십 - 실수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라! 알파레이디 리더십 1
경향신문사 인터랙티브 팀 지음 / 들녘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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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팀 책 나왔네요. 지난 1년의 강의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http://ttalgi21.khan.kr/3673 후기 올려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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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물고기 - 물고기에서 인간까지, 35억 년 진화의 비밀
닐 슈빈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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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바다에서 태어난 생물은 언제 처음 뭍으로 올라왔을까. 그들은 어떻게 뭍에서 살 수 있는 다리를 갖게 되었을까.
박테리아에서 사람에 이르는 38억년간의 기나긴 진화과정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고생물학자들은 화석을 통해 생물의 지나온 역사를 복원한다. 복원되지 않은 채 빠뜨려진 부분을 ‘잃어버린 고리’라고 흔히 부른다. ‘물에서 뭍으로’ 동물의 이동을 보여주는 화석도 그런 ‘잃어버린 고리’들 중의 하나였다. (이 책의 저자는 '잃어버린 고리'가 아닌 '찾아낸 고리'라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2006년 4월, 북극에서 가까운 캐나다 북부에서 발견된 3억8000만~3억7500만년 전 화석의 연구결과가 발표돼 세계가 떠들썩했다. 학계와 언론들은 "잃어버린 고리를 찾았다"며 환호했다. 나도 그 때 외신을 보고 기사를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거대한 물고기 모양에 지느러미가 달려 있지만 사지(四肢)와 비슷한 관절이 달려있고, 악어(파충류)나 도롱뇽(양서류)처럼 머리가 넙적한 희한한 생물이었다.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기 시작한 시절의 동물. 물 밖으로 나가기 직전의 동물 화석과, 물 밖으로 나온 직후의 화석은 이미 발견돼 있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물과 뭍에 걸쳐져 있는 중간단계의 화석을 발견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 화석을 발견해 ‘틱타알릭(학명 Tiktaalik roseae)’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이 책의 저자인 시카고 대학의 닐 슈빈 교수였다.
‘틱타알릭’은 이누이트 언어로 ‘얕은 물에 사는 큰 물고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슈빈은 이 책에서 틱타알릭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그것이 상징하는 진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른 생물들과 가깝다. 우리 몸속에는 우리에 앞서 이 땅에 살았던 선조 동물들, 고양이나 물고기, 파리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말하자면 우리 몸속에는 물고기의 일부가 있고, 물고기 속에는 인간의 일부가 있다.”

사람은, 아니 어떤 생물도, 혼자서 지구상에 뚝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생물은 DNA와 골격 안에 지구의 역사를 담고 있다. 헤켈의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사람이 생겨나는 과정에는 어류-양서류-파충류-포유류로의 발달과정이 모두 들어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에는 일면의 진실이 담겨 있다. 사람도, 상어도 모두 같은 생명의 법칙에 지배되며, 몸 안에는 진화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슈빈은 그 신비에 이끌려 생물학자가 되었고, 화석을 찾는 작업에 나서게 되었고, 틱타알릭을 만났다.

“칼 세이건은 별을 들여다보는 것은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별빛은 영겁의 세월 이전에 이미 우리 눈으로 오는 여행을 시작했다. 지구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말이다. 나는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은 별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인체는 타임캡슐이나 마찬가지이다. 캡슐을 열면, 지구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에 관한 이야기, 고대 바다와 개울과 숲에서 벌어졌던 먼 옛날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람은 개조된 물고기이다. 물고기의 체제를 가져다가 포유류의 옷을 입힌 뒤, 미세한 조정을 가해 두 다리로 걷고, 말하고, 생각하고, 손가락을 정교하게 움직이도록 만들면 갖가지 문제점들이 잠복한 조리법이 완성된다. 물고기를 포유류로 변장시키면서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완벽하게 설계된 세상이라면, 즉 진화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치질에서 암까지 온갖 질병들 때문에 고통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주 탐사 계획이 달을 보는 우리 시선을 바꾸어놓았듯, 고생물학과 유전학은 우리 자신을 보는 시선을 바꾸고 있다. 많은 것을 알아갈수록, 한때 까마득하게 멀어서 이해할 수 없는 듯 보였던 것이 어느새 우리 손아귀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발견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을 통해 해파리, 벌레, 쥐 같은 여러 생물의 내적 작동방식을 밝히는 시대 말이다.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인류 역사의 진실들을 정확하게 짜 맞추어 나가고 있는 셈이다. 수십억 년에 걸친 변화의 과정을 돌아볼 때, 생명의 역사에서 혁신적이거나 독특했던 것들은 하나같이 오래된 재료를 재활용하고, 재조합하고, 재배치하는 등 새 용도에 맞게 변형시켜 이루어낸 성취들이었다. 바로 우리 몸 구석구석, 감각기관에서 머리까지, 나아가 몸의 체제 전체에 담긴 이야기다.”


저자는 화석을 찾아 ‘필드’에서 뛰는 고생물학의 즐거움과, 실험실에서 유전자 연구를 통해 신체 기관 발달의 메커니즘을 엿보는 실험 생물학, 즉 ‘이보디보(진화발생생물학)’ 양측에 발을 걸치고 있다. 고고학도, 고생물학도, 분류학도 모두 현대 DNA 분석기술의 발달로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하지만 ‘필드와 실험실’ 모두를 아우르지 않고서는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다. 저자의 설명을 듣다 보면 현대의 진화생물학자들이 생명의 역사를 밝혀내기 위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책의 후반부는 틱타알릭 이야기라기보다는 ‘슈빈이 들려주는 생물 이야기, 진화 이야기’다. 도킨스의 <눈 먼 시계공>을 읽은 사람이라면 쉽게 넘길 수 있을 내용들이다. 설명 자체가 아주 쉽고 간결해서 생물학 맛보기 책으로도 좋을 것 같다. 쉬엄쉬엄 기분전환으로 읽다 보니 끝부분에 가선 어느새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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