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 타산지석 4
이희철 지음 / 리수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올여름 월드컵 때 한국이랑 터키랑 사촌입네 혈맹입네 하더니 급기야 <터키>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나왔다. 책 출간되고 나서 교보문고 복도 가운데에 판매대를 만들어놓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을 봤었다. 이미 그 전해에 9.11 테러 여파로 이슬람에 대한 책들, 심지어는 노엄 촘스키의 그 복잡한 책들까지 팔려나가는 걸 보면서 한국인들의 엄청난 지식욕과 유행바람 두 가지 모두에 놀랐었는데 월드컵이 불러온 터키 열품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기는 하지만, 터키에 오래 살아온 저자가 직접 겪은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이 책 <터키>는 가이드북으로서는 꽤 괜찮은 것 같다. 대략적인 지리-역사-종교-사회관습-정치구조 등등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면서도 고리타분하지 않게, 경험을 곁들여 말해주니 꼭 여행다녀온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서 재미가 있다. 한 페이지 걸러 한 장씩 사진자료가 나오니(저자가 직접 찍은 것은 아니지만) 보기에도 심심찮고 도움이 많이 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터키와 아랍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못하다는 것. 아랍과 다른 터키만의 특성이나, 터키 뿐 아니라 아랍 문화의 공통점인 사항들이 모두 뒤섞여서 정작 <터키의 특징>을 알기 힘들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그 점이 오히려 전문지식 늘어놓는 것보다는 소박하게 들리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권에 담은 동남아시아 역사
밀턴 오스본 지음, 조흥국 옮김 / 오름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찾던 게 바로 이런 책이었다. 말레이사, 필리핀사를 모두 섭렵할 의욕은 없는데 업무상 개괄적인 역사를 알아야겠고...허니, '한 권에 담은' 류의 책들이 겉핥기 공부에는 가장 좋은게 바로 이런 것 아닌가.

헌데, 장난이 아니었다. 방대한 지역의 역사를 '한 권'으로 읽는다는 게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겠지. 특히 십여년간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면서도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침 한번 안 튀기고 지나갔으니. 유럽에 대해서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니 '카놋싸의 굴욕'이니 하는 것까지 시시콜콜 배우고 연도를 외우면서, 정작 아시아라면 동남아는 물론, 인도와 일본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운 바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가장 먼저 부딪친 문제는 '동남아시아'란 과연 어디냐 하는 건데, 나는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시아에서 중국 아래쪽, 인도를 뺀 지역(^^)이라고. 이 지역의 특징은, 이른바 제3세계 대부분이 그렇듯이 도시와 농촌, 가진 자와 못가진 자, 개발과 미개발의 차이가 대단히 크다는 것. 모두 식민통치의 결과다. 동남아시아의 과거를 핵심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식민통치'다. 그 전의 역사(저자인 오스본은 '고전적인 시대'라고 불렀다)에 관해서라면, 보로부두르와 앙코르와트의 유적들, 스리위자야 제국 정도밖에 모른다.

이렇게 '고전시대'의 이야기는 얼렁뚱땅 넘어간채, 시간은 식민시절로 흘러간다. 특히 내가 궁금해했던 것들은, 독립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이다.동남아시아에서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는 장기간의 전쟁 끝에 독립한 대표적인 나라들. 그런데 어째서 베트남에서만 공산혁명이 성공했을까? 또 동남아와 일본의 관계는? 아이러니하지만, '동남아에서 일본의 만행'에 반발하는 이들 중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풀려난 네덜란드인들과, 필리핀의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다. 필리핀과 태국 등지에서는 '일제 협력자'의 불완전한 청산 문제가 아직도 논란거리로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 실태를 잘 모르겠다.

재미난 것은, 70년대 이후 아세안 지역과 공산국가들로 양분돼 있는 동남아의 상황에서 남북한의 확대판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 좌익-우익이 혼재해 있다가 (38선과 전쟁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남북한으로 갈리게 된 것과 같은 상황을 이 지역도 거쳤다는 거다. 막사이사이가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인물이었다니! 필리핀에서는 루손 섬을 기지로 한 '후크운동'이라는 공산주의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고, 이들 후크세력들은 해방정국의 인민위원회와 마찬가지로 토지개혁을 주장했다고 한다. 경제체제의 총체적인 변혁을 가져올 토지개혁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발→후크반란→막사이사이의 후크세력 제압과 친미정권 수립으로 이어졌다는 것.

그렇다면 역사에서 언제나 제기되는 논란-지속성과 변화 가운데 어느 쪽을 중시할 것인가. 쉽게 결론내릴 수는 없지만 다만 정치적 리더십의 측면에서 보자면 동남아의 20세기는 '오래된 지배집단'들과 '새로운 엘리트들'이 혼재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엘리트의 대표적인 사람이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총리같은 사람이다. 분명 20세기는 이 지역에서 기술관료의 중요성과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도 커진 시기였다.

그럼에도 어째서 이 지역에서는 '폭동의 역사'가 여전히 계속되는가-성공가능성이 매우 낮은데도 불구하고 농민폭동이 빈발하는 것은, 농민들의 불만이 그만큼 깊고 절망적이기 때문. 결국 빈부의 격차를 재생산하는 '구조'의 문제임을 알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창가의 토토'를 이제야 읽었습니다. 벌써 한 해도 전에 얻어와서 집에 굴리고 있었는데, 회사 안 가고 버려진 책처럼 저 자신도 뒹굴뒹굴 하는 김에 책장을 펴들자마자 후다닥 읽었습니다.

토토는 도쿄에 사는 여자아이입니다. 전철을 탈 때에는 역무원이 되고 싶고, 친동야(광고맨)를 보면 친동야가 되고 싶고, 스파이가 되고 싶다가 선생님이 되고 싶다가, 수시로 꿈이 바뀌는 여자아이인데 '주의가 산만'(이런 말 듣는 아이들 주변에 많이 있었죠^^)하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죠. 소학교 1학년인 주제에 퇴학을 당해서, 요즘식으로 말하면 '대안학교'에 해당되는 도모에학원으로 전학을 갑니다.

혼자서 종알종알 떠들어도 4시간씩이나 들어주는 고바야시 교장선생님과 낡은 전차를 개조한 학교. 이 책은 새 학교에서 토토가 만나는 친구들과 수업, 하루하루 벌어지는 일들을 모아놓은 것인데 아주 재미있습니다.

예전에 하이타니 겐지로의 '토끼의 눈'(우리나라에는 처음에 '어른학교 아이학교'라는 이름으로 번역됐다가 후에 완역됐었죠)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교육문제를 담은 비슷한 책이었어요. 그 책도 아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뒤에 하이타니의 군국주의 동화를 읽고 몹시 실망하긴 했었지만- 그 책이 교사들의 입장에서 쓴 것이었다면, '창가의 토토'는 어디까지나 아이의 눈으로 기억을 더듬었다는게 다릅니다.

토토는 저자인 테츠코의 어릴적 애칭인데, 테츠코는 지금은 아사히TV에서 자기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20년째 진행하고 있는 저명인사라고 합니다. 작가의 후기를 보니 안타깝게도 도모에학원은 2차대전 때 폭격으로 불타버렸고, 고바야시 선생님은 60년대에 숨지고 말았다는군요.

어릴 때 어른들한테 뭔가 '눌린' 기억 다들 하나씩, 아니 수만가지씩 갖고 있을 겁니다. 저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려서 뭘 배운다거나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중압감은 없었지만, 우리나라의 교육 자체가 무겁고 딱딱하고, 더우기 옛날에는 반공새마을교육까지 겹쳐서 자연이니 아이들의 꿈이니 하는 것들은 완전히 무시를 했었잖아요.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생각 하면서 재미있게 읽고, 또 토토의 소아마비 친구가 죽었을 때 조금 울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이고로야, 고마워
오타니 준코 지음, 오타니 에이지 사진, 구혜영 옮김 / 오늘의책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 인간들에게 희로애락을 주고, 또 그 기록을 읽는 사람들에게까지 감동을 전해줄 수 있군요. 여느 동물 이야기가 아니라, 사지가 온전치 못한 '장애원숭이'의 이야기입니다. 오타니 준코와 오타니 에이지라는 부부가 작은 일본원숭이와 함께 생활하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담담하게 적었습니다. 두어달 전 신문 북리뷰에 기사가 실린 것을 봤는데, 꼬마원숭이 다이고로의 사진이 눈길을 확 잡아끌었습니다. 즐거운 호기심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는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고서 저 책을 꼭 읽어야지, 했었는데 우연찮게 기회가 닿아 휴가기간 중에 책장을 넘기게 됐네요. 한 장 한 장이 모두 감동입니다. 감동이라는 말을 남발하면 줄어드는 법인데^^ '생명은 정녕 그 모습이 어떻든 아름다울 수 밖에 없다'는 최재천교수의 추천사가 아깝지 않네요.

일본의 한 섬에서 태어난 다이고로는 나면서부터 두 팔의 팔꿈치 아랫부분이 없고, 다리는 아예 없는 기형이었다고 합니다. 방송국 직원이면서 이른바 '사회파 사진작가'였던 오타니 에이지는 촬영 도중 발견한 이 작은 원숭이를 집으로 데려옵니다. 에이지와 아내 준코는 이 '아이'에게 다이고로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자식처럼 키웁니다.

일본에서 1955년 이후로 기형 원숭이들이 많이 태어났는데 아직까지도 원인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 즉 공해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겠거니 하는 추측만 있을 뿐이랍니다. 준코는 마침 원폭 투하가 있었던 히로시마 출신인데, 그 자신은 장애인이 아니었지만 생명의 소중함과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계속 잃지 않은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부부는 세 딸과, 다이고로와 가족처럼 살아갑니다. 이들 가족이 다이고로와 함께 보낸 2년4개월의 기록인데, 사진들만 봐도 마음이 아프면서 또 따뜻해집니다.

다이고로는 죽었고,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부부는 88년부터 남편 에이지의 고향에서 민박집을 경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맛있는 무공해요리를 만들어주는 여관인데, 장애인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얇은 책 한권, 그리고 사진들 속에 담긴 메시지와 온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음에 넣어야 할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머리 속으로 생각한 것들을 몸으로 풀어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죠. 다이고로와 이들 부부의 삶, 두 가지 모두 그렇습니다. 2년여의 짧은 기간이나마 장애를 이겨내려 애썼던 작은 원숭이. 다이고로가 전해준 고마음을 다시 바깥 세상에 퍼나르는 부부의 인생. 가볍지 않은 감동이 들어있어서,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눈물 난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키리냐가 1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방금 전 TV뉴스를 보는데, '우리는 지금'이라는 코너가 있네요. 우리가 고쳐야 할 것들을 지적하는 순서인 모양입니다. 질서 안 지키고 공공장소에서 떠들고 쓰레기 함부로 버리고, 우리 사회에서 고쳐야 할 것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제는 조금 특이하네요. '점심 시간 너무 길다'가 주제였습니다. 점심시간이 너무 길어서 기업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강남의 한 대중음식점에서 점심먹는 직장인들을 보여주고 외국계 기업 주재원들의 '평가'를 덧붙인 것만 봐도 의도는 명백하죠. 점심 때 부대찌개를 먹으면 총 45분이 넘게 든대요.

마이크 레스닉의 <키리냐가>를 읽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오늘 집에 누워 뒹굴뒹굴(인간 본연의 자세는 직립이 아니라 뒹굴뒹굴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하면서 속독 겸 숙독(뒹굴뒹굴 하다보면 이것이 가능합니다)을 했는데 말이죠. '지킨다'는 것과 '자란다'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대립이 존재합니다. 한쪽은 전통(긍정적 측면)이자 수구(부정적 측면)이고, 또 다른 한쪽은 발전(긍정적 측면)이자 정체성 상실(부정적 측면)입니다. 근대적 맥락에서는 원주민과 식민주의의 싸움이고, 기술 발전 이후의 상황에서는 보존과 개발의 딜레마와도 상통합니다.

참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중층적인 대립구도 사이에 레스닉은 한 가지 중요한 주제를 더 끼워넣습니다. 인간의 자율성에 관한 겁니다. <키리냐가>는 케냐의 키쿠유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키쿠유족 본연의 정체성을 잃고 정체성을 상실한 '케냐인'이 되어버린 키쿠유족의 현실을 안타까와 하던 한 키쿠유 노인이 서기 2130년대의 어느 시기 '유토피아 위원회'라는 범우주적 관리기구의 허가를 얻어 지구화된 무인행성 하나를 개척합니다. 이 노인은 부족의 주술사를 자처하며, 이 행성 '키리냐가'에 거주하는 키쿠유족을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전하기 위해 애씁니다. 옛 부족은 생각할 필요도, 발전할 필요도 없으며, 유럽식 사고방식을 절대로(마이신 연고 한 개라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노인은 자연스레 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요구하고 나선 부족민의 반발에 부딪쳐 결국 지구로 쫓겨나지만, 그의 실험이 성공했는지, 키쿠유들의 지구에서의 식민화 경험 대신 자생적 발전의 길을 택해 역사의 승리자가 되었는지는 미결로 남습니다. 독자들에게 던져진 질문은, '고민도 생각도 없이 누군가의 조정에 맞춰 걱정없이 사는 것이 과연 유토피아인가'하는 겁니다. 어려운 문제로군요. 만일 '유토피아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문제의 키쿠유 노인같은 이는 '당신은 서구식 사고체계에 병들어 있을 뿐'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르죠.

저는 아침 6시에 출근을 합니다. 11시30분에 업무가 끝나면 회사를 빠져나가, 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오후 2시30분까지 놀다 옵니다. 말하자면 저는 하루의 배꼽을 잘라, 먹고 떠드는 재미에 삽니다. 점심시간은 저에게 재충전의 시간이자, 하루 생활의 즐거움의 원천입니다. 그 시간 동안 답답한 사무실을 벗어나 어떤 때에는 홍대 앞에 가서 차도 마시고, 회사 부근 할리스 커피숍에서 모카커피도 먹고, 휴게실에서 낮잠을 자기도 하죠. 국가경쟁력이라는 이름 하에 점심 시간을 '외국기업에 맞춰' 줄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동양의 미학인 느림과 여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이죠. 서양에서도 일본식 선(Zen)이 유행을 한다는데, 밥 먹는 시간까지 '서양식 합리주의'에 맞추고 싶지 않거든요.

<키리냐가>에 나오는 키쿠유 주술사 노인네의 소영웅주의와 독선, 아집, 여성비하 따위가 몹시 거슬리긴 했지만, 아무리 우리가 영어 없이는 못 사는 처지일 지언정 내가 점심을 몇 분간 먹느냐 하는 것까지 남의 잣대에 재단 되어 경쟁에 떼밀리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던진 어려운 질문의 해답은 잘 모르겠지마는, 때로는 '양보하기 싫은 것'들이 있는 법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