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풍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
장 지오노 지음, 박인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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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희랍 사람들이 비극을 좋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비극을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을 쓰는 동안 장 지오노가 그리스의 비극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비극은 항상 운명과 함께 간다는데. 운명,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말이다. 더우기 나처럼 말초적인 드라마들에 몰두해 있는 독자한테는 다소 어렵기도 한 단어다.

운명은 선대의 실수나 악의, 또는 신의 저주 따위를 후대의 사람들이 극복해낼 수 없기에 생기는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업보'이고,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 그런 일들을 말하는 것 아닐까.


프랑스의 어느 소도시에 '폴란드의 풍차'라는 영지가 있다. 이 소설은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화자가 지켜본 한 집안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이 우리를 망각해버리기를!'이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던 한 부유한 지주는 신의 장난으로 인한 불행을 피하겠다는 신념으로 두 딸을 어느 평범한 집안의 형제에게 시집보낸다.

결과는? 비극이다. 가족들은 4대에 걸쳐 사고로 죽거나 실종되거나 정신이 이상해져버린다. 그러나 더욱 비극적인 것은 비극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다. 사람들은 항상 타인의 비극 그 자체를 미워하면서 마치 전염병이나 되는 것처럼 비극의 주인공을 왕따시키는 동시에 또 비극을 즐긴다. 그래서 비극은 더욱 증폭되고 운명은 더욱 가혹해지지만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

이어져 내려오는 저주의 역사, 그런 불행한 역사를 가진 가족에 관한 이야기같은 건 사실 현대인들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지워져버린 일종의 추억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이 짧은 소설을 통해 뇌세포 어딘가에 숨어있었던 그 추억을 건드린다. 잊은줄 알았던 기억을 그집어낸 작가는 무심한 세상 사람들에게 훈계라도 하듯이, '운명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힘을 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운명에 몸을 던지기 위해 유혹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가 보여주는 비극은 오이디푸스의 전형을 따르고 있으면서, 어느 고전 못지 않게 아름답다.


이 소설은 자연주의 작가로 알려진 지오노의 다른 작품들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나는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고 감동을 받았고, '지오니즘'으로까지 불리는 자연주의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말년의 작품에 해당하는 이 소설에서 지오노는 비극의 모티브와 함께 마키아벨리즘, 즉 권력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보인다.

'풍차'라는 제목에 걸맞는 조용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기대했기 때문인지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마저 아름답게 여겨지게 만드는 것은 이 소설가의 능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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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공존 - 하랄트 뮐러의 反 헌팅턴 구성
하랄트 뮐러 지음, 이영희 옮김 / 푸른숲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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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서구 학자들이 '학술용어'들을 놓고 껌씹기같은 놀이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화, 문명, 아시아적 가치, 민주주의같은 개념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또 그 홍수가 오랫동안 계속되다보니 받아들이는 뇌가 지쳐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단물 빼먹듯 개념들을 널려놓고 자작자작 씹어대는 것을 보니 식상하긴 하지만, <문명의 공존>의 저자인 하랄트 뮐러 때문에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뮐러가 비판하는 새뮤얼 헌팅턴에 대해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정확히는 헌팅턴의 '이데올로기'를) 조목조목 비판한 책이다. <문명의 충돌>을 읽으면서 '뭐 이런 제국주의자가 다 있어'라고 분노했거나 '재미없는 책이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헌팅턴의 오만방자한 저서를 읽으면서 '그래도 재미있는걸'(나도 이런 부류였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뮐러는 이 책에서 헌팅턴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웃기는 대립주의를 설파하고 있는지, 헌팅턴의 오만이 얼마나 '미국적'인지를 따지고 든다.

첫째, '문명'은 협의의 '문화'보다는 훨씬 광의의 개념인데 헌팅턴은 의도적으로 그 개념을 '종교적 측면'으로 줄여서 얘기하고 있다.

둘째, '문명'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다못해 독일조차도 '유럽 문명'의 멤버십을 확인받은지 몇십년이 안 됐다. 문명을 고정적인 그 무엇으로 생각하고 '문명들간의 전쟁'을 상정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세째, 최근 발생한 국지적 분쟁의 대부분이 '문명의 단층선'에서 발생했으며 또 그 3분의2는 이슬람권과 다른 문명권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헌팅턴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대부분의 분쟁은 헌팅턴식으로 말하면 같은 문명권 안에서 일어났으며, 이슬람권이 전쟁을 많이 하는듯 비치는 건 단지 이슬람권이 다른 문명권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부분이 넓기 때문이다.

네째, 따라서 양키들이 퍼붓는 차이나포비아나 이슬람 위협론은 허구에 불과하다.

다 맞는 지적이다. 그런데 특히 내가 재미있게 본 것은 첫째는 헌팅턴이 노골적으로 풍기는 오만함을 뮐러에게서는 거의 느낄 수 없다는 것. 이건 미국과 유럽 지식인의 차이이면서, 동시에 '전략적 투쟁론자'와 '대화론자'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서구적 가치'의 중요성을 계속 지켜나가자고 뮐러는 주장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동감한다. 인류 보편의 가치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며, 또 그 보편의 가치를 표현하는 이름이 서구의 근대화과정에서 발달한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는 뜻밖에도 뮐러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중대한 과제로 여성의 지위 강화를 들었다는 점이다. 뮐러는 여성 지위상승의 '효과'로 여러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인권의 성취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또 여성의 경제활동이 증진되면 빈민층의 상태가 엄청나게 개선될 것이다. 또 여성이 경제생활로 계속 편입되면 인구증가 압력이 줄어들 것이라는 점도 들었다. 난 여성의 지위 상승이 그런 '지구적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은 미처 몰랐다.

헌팅턴이나 브레진스키같은 오만방자한 미국 학자들 때문에 역겨웠던 뱃속이 뮐러 덕택에 조금 풀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아 있다. 우선 헌팅턴식 사고방식(미국의 정치이데올로기)이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의구심이다. 둘째, 우리같은 '약소국'은 글로벌한 역학관계의 변화과정에서 어떤 롤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역시나 해답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엘리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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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바트 비룡소 걸작선 16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지음,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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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둑 호첸플로츠>의 작가 프로이슬러가 쓴 동화입니다. 어린이도서를 전문적으로 펴내는 비룡소에서 출판했는데, 제가 어렸을 때 보던 동화보다 훨씬 예쁘네요. 책을 처음 받아본 순간, 참 깔끔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책은 크라바트라는 떠돌이 소년이 사악한 마법사의 방앗간 직공으로 들어가 마법을 배우면서 못된 마법사를 물리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숱한 민담처럼 내용이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이야기의 얼개는 민담의 구조를 그대로 빌어왔지만 문장이 아름답고 정교하고, 꿈같습니다. 문장 자체가 '판타스틱' 합니다.

동화나 전설에 항상 나오는 장치가 있습니다. 바로 '금기(taboo)'라는 것이죠. 오르페우스가 지옥에서 유리디케를 데리고 나오는데 뒤를 돌아보면 안 되듯이 뭔가를 돌아보면 안 되고, 입밖에 꺼내면 안 되고, 꼭 삼세번을 해야하는데 모자라면 안 되고...

이런 금기들이 민담이나 전설마다 등장하는 건 아마도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이겠지요. 기존 질서를 깨지 말라는 광범위한 메시지로 해석한다면 너무 지나친 걸까요. 그 금기를 깨는 사람을 바로 '영웅'이라고 부릅니다. 해서는 안 되는 금기가 있고, 그 금기를 수호하는 악역이 등장하고, 영웅을 둘러싼 '사랑'이 이야기에 적당히 기름칠을 해주는 것이 전설의 일반적인 구조인 듯 싶습니다. 이렇게 모두들 겁내고 꺼리는 금기를 깨뜨리면서 주인공은 성장을 하고, 결국 영웅이 되고야 맙니다.

이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라바트는 '스승이자 적인' 마법사를 물리칩니다. 마법사가 크라바트에게 방앗간(성공과 富)이라는 미끼를 던졌지만 별로 강인해뵈지 않는 작은 영웅 크라바트는 사랑의 힘으로 이겨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인생사의 진실인지는 제가 세상을 더 겪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사악한 적을 이기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 아직은 그저 동화로만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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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까지 100마일
아사다 지로 지음, 권남희 옮김 / 산성미디어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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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문제를 치밀한 구성과 농익은 문장으로 재미나게 들려주던 아사다 지로가 아예 독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기로 결심을 했나보다. 약간은 빈정대는 듯한, 그리고 탁탁 내뱉는듯한 작가 특유의 말투를 잠시 누그러뜨리고 최루탄을 펑펑 터뜨린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모든 것을 다 바친 어머니에게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고. 그리고 무엇을 해드릴 수 있냐고.

이 책은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그리고 어머니에게 해드릴 것도 별로 없는 한 못난 중년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40줄에 접어든 키도코로 야스오는 거품경제의 단물에 빠져 흥청망청 살다가 어느날 회사의 부도로 급전직하한 '고개숙인 남자'다.

홀어머니의 '등거죽까지 벗겨먹으며' 자라난 두 형과 누나는 제잘난 맛에 어머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철부지 막내아들 야스오는 병상에 누워 수술대에 오를 날만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이제사 무심함을 뉘우치지만 정작 돈이 없다. 잘난 상류층 형제들과 효심 깊지만 무능력한 막내아들.

너무 전형적인 구조라서 대체 이 안에서 어떤 감동이 나올 수 있을까 싶지만 작가는 기어이 독자를 울리고 만다. 야스오가 어머니를 너덜너덜한 승합차에 눕히고 100마일 떨어진 시골마을의 명의를 찾아가는 이 여행에 작가의 '진심'이 배어있기 때문일까.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내가 대학시절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날 이불깃을 만들어주시던 모습을 떠올릴 것 같다. 이상하게도 나는 '별것 아닌' 그 장면이 우리 엄마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떠올려진다. 흰 천에다가 노란 천을 덧대어 모양을 넣고 계시던 모습.

그냥, 궁상맞아 보였고, 가난해 보였고, 너무 피곤해보였고, 가게에 가면 이쁜 이불보가 쌓여있는데 재봉틀과 손바느질을 번갈아가며 새벽까지 바늘끝을 들여다보고 계신 모양이 감동적이면서도 우울해보였기 때문일까.

하숙할 때, 자취할 때, 취직하고 나서 원룸에 나와 살 때, 그리고 결혼한 지금까지 나를 따라다니는, 가운데에 다이아몬드 모양의 꽃무늬천이 박혀있는 그 하얀 이불보를 보면 난 안 어울리게 감상적이 된다. 난 이불보의 모양 같은 거 신경도 안 쓰는데 그걸 붙들고 계셨던 이유는 안 물어봐도 안다. 아마 기숙사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방을 쓰는데 이쁜 이불보를 가져가야 할 것 같아서 그러셨을 거다. 엄마가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을 돈 주고 살 필요가 없다는 이유도 있었을테고.

야스오는 100마일을 힘겹게 여행하며 어머니와 그동안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얘기를 나눈다. 자식이 넷이나 딸린 젊은 과부였던 야스오의 어머니에게도 한때 '남자'가 있었다. 과부를 좋아했던 이 총각은 자신의 성(姓)을 버려가면서라도 함께 있겠노라고 했는데 어머니는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너무 미안해서 거절을 한다.

우리 엄마에게도 내가 알지 못했던 여러가지 기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내가 알지 못했던 많은 기회들을 자식들 때문에 포기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엄마와 함께라면 1000마일이라도 달려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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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마틴 하트-랜즈버그 지음, 신기섭 옮김 / 당대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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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진보적 학자인 마틴 하트-랜즈버그가 쓴 '한국현대사'입니다. 원제는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인데 번역자가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라는 다소 도전적인, 명쾌한 '격문'으로 제목을 바꿔 붙였습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부터 개항기까지 한국의 역사를 개관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방 이후 한국의 분단과 그 과정에서 미국이 저지른 '악행'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좌파 소장학자인 저자는 그중 해방공간에서 인민위원회-인공을 중심으로 한 한국민들의 자생적, 조직적 건국운동을 집중 조명합니다. 미국이 이를 어떻게 짓밟고 제네바합의를 무시한채 한국에 친미정권을 수립했는지를 밝혀내고, 그것이 남북한의 사회를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한반도의 분단과정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을 위해 책을 썼다'고 밝힌대로, 개괄적인 역사서이면서도 아주 명확하고 읽기가 쉽습니다. 사회과학 번역서인데도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는 점과 논리적 단순성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해빙무드가 무르익고 있습니다. 그런 한편에서는 미군의 노근리 학살과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벌인 베트남인 학살이 이제서야 여론의 도마위에 오르고 있구요. 얼마전 뉴스를 보다가 '미군이 한국전쟁 때 왜 양민까지 죽였을까'하는, 뒤늦은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왜 미군은 한국의 비무장 양민을 죽였을까. 이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서 노근리 약살이 밝혀지게 된 것이 왜 중요한가'하는 문제와 곧바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질문 뒤에는 아마도 '문제제기 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하는 과제가 남아있겠죠.

'왜 양민을 죽였는가' 하는 질문이 중요한 것은, 양민학살 문제가 한국전쟁의 성격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놓습니다. '한국전쟁을, 미국이 대다수 한국인들의 의지에 반대하기 위해 개입한, 통일을 위한 내전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다. 이 전쟁의 내전적, 대중적 성격 때문에 미군은 민간인과 적을 구별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민간인 학살을 명령하게 됐다'.

저자는 광복이후 한반도에 아주 잠깐 동안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됐었던 사실에 주목하면서 '민주적이고 사회주의 지향적이던 정부가 노동조합, 농민, 여성, 청년학생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조선을 지배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역사의 복원'이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즉 잔학행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잔학행위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회정의와 사회변화의 동력이 되게 만들려면, 더 폭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이 사건들을 조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통일이 돼야 하는가'라는 질문 역시 '우문'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당위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편에서는 신세대들의 통일에 대한 무관심이 '구세대'들의 비난거리가 되고 있는 혼란스런 통일의식의 한편에서 저는 '통일의 당위성을 누군가가 논리적으로 설명해줬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통일을 통해 한국사의 제대로된 복원이 이뤄져야지만 남북한이 갖고 있는 모순의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지적은 통일이 갖고 있는 '감정적 측면'을 넘어서 역사적 측면을 다시 살펴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을 듯 싶습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 역사 복원은 북한과 미국의 평화와 화해의 대화가 시작되는 지점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이라는 화두가 한동안 젊은 학자들을 휩쓸고 지나가더니 어느새 'e의 시대''n의 시대'라면서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이렇게 떠들썩한 변화의 담론들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지나온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는데에서만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미국 젊은 학자의 한국 인식이 몹시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복원해내고, 그 역사적 의미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거기에서 얻은 교훈을 화해와 협력의 바탕으로 만드는 일은 정말 '우리 머리와 손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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